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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9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1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 소위 '유행의 변천' 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벽으로 사회에 충격을 주려는 돈 많고한가한 사람들이 있는 한 정말 계속 변화를 유지해 나갈 듯 싶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끝이 없는 이야기'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류를 타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유행하는 옷을 알려주는 패션 잡지들은 신문과 마찬가지로 뉴스의 조달자인 셈이다. 나날의 사건들은 후세의 발전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두었을 때야만이 비로소 이야기' 로 엮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을거북하게 여긴다. 가장 최근의 유행과 글을 쓸 당시에 각광을 받게 된 사람들에대해 기록하고 논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가들이 .. 2023. 7. 12.
27장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27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현대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전통을 완전히깨트리고 이제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고 하는 미술의 종류로 생각한다. 진보의 관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술도 시대의 진전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좋았던 옛 시절' 이라는 슬로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대 미술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대의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졌으며 현대 미술도 과거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현대 건축은 서서히 이루어졌으나 그 원칙은 확고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건축과 장식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 어떻게 아르 누보.. 2023. 7. 5.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표면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변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스스로 만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마음에 드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건축은 공허한 틀에 박힌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엄청나게 팽창하는 도시의 구획 구획을 꽉 채운 아파트, 공장 그리고 공공 건물들이 그 건물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다한 양식으로 세워졌다. 그것은 기술자들이 먼저 짓고자 하는 건물에 적절한 뼈대를 세운 다음, '역사상의 양식들을모아놓은 양식집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건물 정면을 장식하여 약간의 예술성을 가미시킨 것처럼 보였다. 대다수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2023. 6. 27.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앞서 언급했던 '전통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의 여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들과 감식가들은 '예술(Art)' 과 단순한 '기술' (화가의 기술이든 건축가의 기술이든)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이제 미술이 존재 근거로 삼아왔던 바탕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은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갔다.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보면 19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이전 시기에 수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영국과 미국 전역의 도시들이.. 2023. 6. 16.
23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한껏 위세를 떨치던 이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왕정복고시기에도 그랬다. 이 시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1632-1723) 이었는데 영국은 1666년의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299)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와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도판 299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1632~17.. 2023. 5. 23.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한 것은 로마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이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이것은 특히 17세기 말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정책을 꾸몄다. 루이 14세가 그의 왕궁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웅대한 .. 2023. 5. 15.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우리는 16세기 후반에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에서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한다. 델라 포르타는 보다 많은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소위 고전적인 건축의 규칙이라는 것을무시해버렸다. 일단 예술이 이러한 길로 접어들면 계속해서 그 길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면 그 이후의 미술가들은계속해서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더 복잡한 장식과 더욱 놀라운 아이 디어를 고안해내야만 했다.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불리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도판 282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 1653년,.. 2023. 5. 8.
13. 전통과 혁신 I :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15세기 초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Flanders)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5세기의 미술을 사로잡았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절의 한 영향으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략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 2023. 3. 11.
6.기로에 선 미술: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311년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대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능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 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 2023.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