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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1

by 2mokpo 2023. 7. 12.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

 

소위 '유행의 변천' 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벽으로 사회에 충격을 주려는 돈 많고한가한 사람들이 있는 한 정말 계속 변화를 유지해 나갈 듯 싶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끝이 없는 이야기'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류를 타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유행하는 옷을 알려주는 패션 잡지들은 신문과 마찬가지로 뉴스의 조달자인 셈이다. 나날의 사건들은 후세의 발전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두었을 때야만이 비로소 이야기' 로 엮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을거북하게 여긴다. 가장 최근의 유행과 글을 쓸 당시에 각광을 받게 된 사람들에대해 기록하고 논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가들이 진정으로 '역사화 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으며, 대체로 비평가들은 형편없는 예언자임이 과거에 증명되곤 했다.

현재가 과거로 됨에 따라 무엇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을 경험할 만큼 오래 산 역사가라면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윤곽이 변화하는 방식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 책의 이 마지막 장이 그와 같은 경우이다. 내가 초현실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던 무렵에 훗날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초로(初老)의 망명자가 영국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내가언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 1887-1948)인데, 나는그를 1920년대 초기의 호감가는 별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는 버려진 버스표, 신문에서 오려낸 것, 누더기 조각 등 잡다한 여러 잡동사니들을 접착제로 함께 붙여 아주 멋지고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도판 392).

도판 392 쿠르트 슈비터스, <보이지 않는 잉크>, 1947. 종이에 콜라주, 25.1x19.8, 화가 소장

 

전통적인 안료와 캔버스의 사용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취리히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예술 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다다(Dada)' 그룹을 원시주의(Primitivism)와 관련지어 앞 장의 부분에서 논의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파르테논 신전의 말()을 넘어서서 어린 시절의 흔들 목마로까지 되돌아가야만 한다고 느꼈던 고갱의 편지를 인용했다. 이 다다라는 유치한 음절은 그러한 장난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프랑스에서는 붓놀림에 의해 생겨나는 흔적에 관심을 가진 이러한 경향을 타쉬슴(tachisme)이라 했는데 이는 타슈(tache), 즉 얼룩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감을 바르는 새로운 방법으로 흥미를 유발시켰던 사람은 바로 미국인 작가잭슨 폴록(Jackson Pollock : 1912-56)이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에 빠져 있었으나 점차 그의 그림에 주로 등장하던 괴이한 이미지를 버리고 추상 회화를 실험하게 되었다. 이전의 틀에 박힌 방법에서 벗어나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뚝뚝 떨어트린다거나 또는 화면에 붓거나 뿌려대는 등의 방법으로 놀라운 형상을 만들어냈다(도판 393).

도판 393 잭슨 폴록, <작품 No. 31>, 1950. 초벌칠 안한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269.5x530.8cm, 뉴욕 근대 미술관, 

아마 폴록은 이러한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제작했던 중국화가들이나 주술적인 목적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경우를 기억해냈던 것 같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생기는 엉킨 선들은 20세기 미술의 양립하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준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형태를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유치하게 그려대는 낙서와도 같은 그림들에 대한 기억을 연상시켜주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자발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한 가지는 그와는 반대로 '순수 회화'의 문제들에 대한 복잡하고 고답적인 관심이다. 이리하여 폴록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즉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고 알려진 새로운 양식의 주창자들 중의 하나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미국 화가인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 1910-62)의 작품과 프랑스의 타쉬스트인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 1919-)의 작품을 각기 한 점씩 비교를 했을 때 얻는 바가 없지는 않을 것이(도판 394,395).

도판 394 프란츠 클라인, <하얀 형태들>, 1955년, 캔버스에 유채, 188.9x127.6cm, 뉴욕 근대미술관, 

도판 395 피에르 술라주, <1954년 4월 3일>, 194.7x130cm, 버펄로, 알트브라이트녹스 미술관, 

클라인이 자신의 작품을 '하얀 형태들' 이라고 부른 것이 특이하다. 그는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선뿐 아니라 그 선들이 바꾸어 놓은 캔버스의 여백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가 그려낸 선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그 결과 화면의 하반부가 중앙을 향해 후퇴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공간구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술라주의 작품이 더 흥미롭게 보인다. 그의 힘찬 붓질로 이루어내는 농담법은 3차원의 인상과 물감의 아름다운 발색을 이뤄내므로 내게는 클라인의 작품보다 더 마음에 든다. 이러한 차이점을 도판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현대의 작가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는 나타낼 수 없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이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기계로 제작되어 규격화된 세상에서 자신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을 진실로 유일한 것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어떤 이들은 그 크기만으로도 충격을 줄 수 있는 거대한 캔버스에 작업을 한다. 그러나 도판을 통해서는 이러한 효과가 살아날 수 없다.

 

슈비터스나 그외의 다른 다다이스트들이 이것저것 갖다 붙여놓은 방법에 대해서 관심이 되살아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이다. 마대의 거칠음,플라스틱의 매끈거리는 표면, 녹슨 쇠의 우둘투둘한 표면은 모두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진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중간쯤에 놓인다. 스위스에서 살았던 헝가리 미술가 졸탄 케메니(Zoltan Kemeny:1907-65)는 이런 식으로 그의 추상 작품을 금속으로 제작했다(도판 396).

도판 396 졸탄 케메니, <파동>, 1959, 철과 동, 130x64cm, 개인 소장

우리의 도시 생활에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우리로 하여금 다양함과 경이로움을 인식하게 하는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풍경화가 18세기의 감상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두 가지의 예로써 최근 현대 미술의 전시회에서 맞부딪치게 되는 가능성과 그 다양함의 영역을 모두 설명했다고 생각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예를 들어 옵 아트(Op Art)' 라 불리울 수 있는 미술 운동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작가들도 있다.

 

신세대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으려는 예술가라면 물론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의 사용에 있어 나름대로의 흥미로운 방법을 익혀야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후 시기에 있어 가장 주목을 받았던 몇몇 작가들은 때때로 추상 미술의 탐구로부터 구상 미술의 제작으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 1914-55)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한 말이다. 그는 단순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물감의 특질을 그대로 살리면서 놀랍게도 빛과 거리감이 살아 있는 풍경을 환기시켜준다(도판 397).

도판 397 니콜라 드 스탈, <아그리젠토 풍경>, 1953년, 캔버스에 유채, 73x100cm, 취리히 미술관

전후 시기에 속하는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의 형상에관해서만 작업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MarinoMarini : 1901-80)는 전쟁 중 그가 강렬하게 인상을 받았던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시킨 작품들을 통해 유명해졌다.

도판 398 마리노 마리니, <말탄 사람>, 1947년, 청동, 높이 163.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도판 398은 공습 때 이탈리아 농부가 농장의 말을 타고 마을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에 관한 것이다. 베로키오의과 같은 전통적인 영웅적 기마상과 비교하여 볼 때 불안하기 그지없는 이 피조물들은 독특한 비애감을 나타내고 있다. 독자들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예들이 미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데 보태질는지 또는 한때 큰 강이었던 것이 많은 지류와 실개천으로 갈라지고 있는지에대해 당연히 의아해 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말할 수는 없으나 바로 그 다양한 노력들을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는 비관적인 이유가없다. 나는 앞 장의 결론 부분에서 미술가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내 신념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었다. “즉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 방안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는 남녀가 존재할 것이라고 이 말을 훌륭하게 실현해 보인 미술가는 또 한 명의 이탈리아 미술가인 조르조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였다. 모란디는 데 키리코의 그림들(도판 388)서 잠시 영향을 받았었으나 그는 자기 작업실에 있는 꽃병들이나 단지들을 다른 각도와 다른 빛에서 수없이 묘사한 단순한 정물화 또는 그런 소재의 판화 작품(도판 399)을 선호했다.

도판 399 조르조 모란디, <정물>, 1960년, 캔버스에 유채, 35.5x40.5cm, 볼로냐, 모란디 미술관

 

그는 그러한 감수성으로 작업에 임했으며 한 가지 목표에만 꾸준히 몰두하는 완성에의 추구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동료 미술가들과 비평가들, 나아가 대중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모란디가 주의를 끌고자 외쳐대는 여러 '미술 운동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오로지 자신이 설정한 문제들에 전념한 금세기의 유일한 대가였다고 할 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놀라울 것도 없이 우리 세대의 다른 미술가들은 새로운 유행을 좇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창조하는 데 마음이 끌렸다.

'팝 아트(Pop Art)' 라고 알려진 운동을 살펴보자. 이 운동의 배후에 있는 이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앞 장에서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응용미술 또는 '상업' 미술과 전시회나 화랑의 이해하기 어려운 '순수' 미술 사이의 불행한 단층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념에 대한 암시를 했었다. '고상한 취'를 가진 이들이 경멸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는 미술학도들에게는 이러한 단절이야말로 당연히 도전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바람직한 결과와 마찬가지로 모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서도 미술사에만 그 탓을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우리 사회 내에서 미술가와 미술의 지위를 변화시켜 왔고 미술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시류를 타게 만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빚어낸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요소들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1 첫째 요인은 진보와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의 역사를 우리의 시대에까지 이어져 왔고 또미래로 이어지는 연속하는 시대로 보게 만들었다. 우리는 석기 시대, 철기 시대, 건 시대, 그리고 산업 혁명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이미 낙관적이지 못하다.

 

2. 이러한 상황의 조성에 공헌한 두번째 요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있. 현대 과학의 사상은 지극히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의 가치는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모든 상식적인 개념에 대해 상반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거기서 나온 질량과 에너지의 법칙이 결과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은 과학의 힘과 권위에 대해 크게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험을 존중하는 건전한 의욕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난해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존중하는 건전하지 못한 믿음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과학과 예술은 서로 다른 것을. 과학자들은 불합리한 것으로부터 심오한 이론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구별해낼 줄 안다. 그러나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런 명확한 실험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것이 새로운 실험으로써 의미가 있는지를 가려낼 만한 시간이 더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다.

 

3.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세번째 요인은 얼핏 보면 앞서 살펴본 것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미술은 과학이나 기술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 괴물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4. 이와 같은 생각들은 일종의 심리학적인 가정(假定)에 상당히 물들어 있는데 이 책을 읽어감에 따라 우리는 미술과 미술가들에 대한 이러한 가정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낭만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아의 표현이라는 이념이 있으며, 그 후 프로이트의 발견은 심오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적용하려 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예술과 정신적 고뇌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술은 시대의 표현 이라는 점차 커가는 신념과 더불어 이러한 확신은 모든 자아 통제를 내팽개치는 것이 예술가들의 권리이며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감정의 분출이 지켜보기에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면 이는 우리의 시대 자체가 아름답지 못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 세계의 현실을 직시해서 우리의 어려움을 진단해내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 즉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라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도피주의' 라고 배척받고 있다.

 

5. 이제까지 열거한 네 가지 요인은 조각과 회화는 물론 문학이나 음악이 처한 상황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 이제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다섯 가지 요인은 어느 정도 미술에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다른 창조 형태와는달리 매개 수단에 덜 의존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6. 미술 교사들의 경우라면 다를 수도 있다. 내게 있어서는 미술 교육이 여섯번째 요인으로 현대 미술의 상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교육에서 개혁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아동들의 미술 교육에서였다.  20세기 초에 미술 교사들은 영혼을 파괴하는 엄격한 전통적인 교수 방법을 버린다면 얼마나 더많은 것을 어린이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상주의의 승리와 아르 누보의 실험으로 인해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문이 생겼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수법으로부터의해방 운동을 벌인 선구자들 중에 빈의 프란츠 치제크(Franz Cizek : 1865-1946)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예술적인 기준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때 까지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원했다. 그가 노력한 결과 생겨난 아이들작품의 독창성과 매력은 많은 수련을 쌓은 화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이 물감과 세공용 점토를 섞으며 경험하게 되는 순수한 기쁨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개성의 표현'이라는 이상이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 바로 이 교실에서였다.

 

7. 첫번째 요인으로 꼽을 수도 있었지만 편의상 일곱번째 요인으로 설명해야 할것이 있는데 바로 회화와 라이벌 관계에 서게 되는 사진의 보급이다. 전 시대의 회화가 전적으로 현실의 모사만을 그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자연과의 연계성은 수세기에 걸쳐서 미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중요한 문제였으며 비평가들에게는 최소한 피상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사진술은 19세기 초로 그 발명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든 나라들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을 헤아리고, 매 휴가철이면 찍혀지는 컬러사진은 수십억 장에 이를 것이다. 이 중에는 보통 수준의 풍경화만큼 아름답고 효과적인 사진도 있고 평범한 초상화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기억될만한 운좋은 사진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 같다'는 말이 화가들이나 미술 감상을 도와주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경멸의 뜻을 지닌 단어가 되어 버린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종종 갖는 반감의 이유는 변덕스럽고 부당할지도 모르나 미술이 이제는 자연의 재현 외에 다른 가능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8. 여덟번째 요인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정해진것 이외의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가 미술가들에게 금지된 곳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해석된 마르크시즘 이론은 20세기 미술의 모든실험을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의 징후로만 여겼다. 건강한 공산주의 사회의미술은 쾌활한 트랙터 운전수를 그린다든가, 건장한 광부를 그려서 일하는 기쁨을찬양해야 했다. 위로부터 미술 제작을 규제하려는 이러한 획책은 우리로 하여금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축복임을 알게 해준다. 불행히도 이러한 획책은 또한 미술을 정치 무대로 끌어냈고 냉전 무기의 하나로 이용했다. 만일 자유 사회와독재 사회가 이처럼 대조적이라는 것을 일깨워줄 기회가 없었더라면 서구의 초현대 화가들의 반역이 그렇게 열렬하게 공적인 후원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9. 이제 새로운 상황의 아홉번째 요인을 살펴보자. 실제로 독재 국가의 단조로운획일성과 자유 사회의 밝은 다양함 사이의 대조로부터 이끌어낸 교훈이 있다. 공감과 이해심을 갖고 오늘날을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새로움에 대한 대중의 강한 관심이나 유행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흥미를 더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1975년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라는 젊은 건축가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그는 현대 건축과 동일시되어 왔고 기능주의 원리에 식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이 원리가 "19세기 미술 관념이 우리들의 도시를 어질러 놓은 데 사용했던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모든슬로건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명백히 장식은 사소하고 몰취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쾌감을 줄 수도 있다. 모더니즘운동의 '청교도들'은 그것을 대중들에게 멀리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내가 새로운 양식이라는 말 대신에 '변화된 분위기' 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양식(style)이라는 것이 연병장의 군인들처럼 차례차례 뒤이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는 독자나 저자들은 그처럼잘 정돈된 배열을 좋아하겠지만 미술가들에게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투사는 반항적인 몸짓을 피하는 미술가" 라는 말은 1966년에 그랬듯이 이제도 사실이 아니다. 주목할만한 하나의 예로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Freud : 1922-)를들 수 있는데, 그는 자연의 현상 탐구를 한번도 배격한 적이 없다. 그의 그림가지 풀(Two Plants)>(도판 403)

도판 403 루시안 프로이드, <두 가지 풀>, 1977-80년, 캔버스에 유채, 149.9x120cm, 런던 테아트 갤러리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2년에 그린 풀밭을 연상시킨다. 두 그림 모두 미술가들이 일상적인 풀의 아름다움에 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뒤러의 수채화는 자기가 사사로이 쓸 습작이었던 반면에 프로이드의 대형 유화는 지금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진열되어 있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나는 또한 앞부분에서 미술 감상을 지도하는 선생들 사이에서 사진과 같다' 라는 말이 오용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사진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게 커져서 수집가들은 다투어 과거와 현재의 유명한 사진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사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 같은 사진 작가는 오늘날 살아 있는 어떤 화가 못지 않게 커다란 존경을 받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림 같은 이탈리아의 한 마을의 스냅 사진을 찍었을 테지만 누구도 카르티에 브레송이 아퀼라 델리 아브루치(도판 404)를 포착한 것과 같이 신빙성 있는 이비지를 잡는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도판 404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아퀼라 델리 아브리치>, 1952년, 사진

 

항상 소형 카메라를 준비하고 다니는 카르티에 브레송은 총을 쏠 정확한 순간을 위해서 손가락을 방아쇠에 대고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의 흥분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기하학적인 것에 관한정열'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파인더를 통해서 어떤 장면이든지 조심스럽게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그 그림 속에 있으며 또 가파르게 경사진 길을 빵을 이고 오가는 여인들의 왕래를 감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며, 난간과 계단과 교회와 멀리 보이는 집들로 이루어진 구성에 매료되게 된다. 이러한 구성은 많은 공을 들여서 부지런히 그린 그림에 필적할 만하다.

또한 최근 들어 미술가들은 이전에는 화가들의 영역에 속했었던 기발한 효과를창출하기 위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 1937-)는 어느 정도 피카소의 1912년 작 <바이올린과 포도>와 같은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다중 영상을 잡기 위해 카메라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어머니의 초상(도판 405)

도판 405 데이비드 호크니, <어머니, 요크서, 볼튼 애비, 1982-1982>, 책과는 다른 작품, 1982년, 포토 콜라주, 119.5x68.5cm

 

은 약간씩 다른 앵글에서 찍은 여러 사진으로이루어진 하나의 모자이크로 그녀의 머리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결합이 일관성없는 뒤범벅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초상은 확실히 감동적이다. 우리가어떤 사람을 볼 때 우리의 눈은 잠시도 정지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우리가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도 우리 마음 속에 형성되는 그 사람의이미지는 언제나 복합적인 것이다. 호크니가 그의 사진 실험 속에 포착한 것은 바로 이런 경험이다. 현 시점에서는 미술가와 사진 작가 사이의 이 같은 동조가 앞으로 더욱 중요시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세기의 화가들도 사진을 대단히 많이 이용했으나 지금에 와서야 그런 관례가 기발한 효과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최근의 이러한 발전들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옷과 장식에 유행의 추세가 있는 것못지 않게 미술에도 취향의 변화가 존재한다는점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대가들과 과거의많은 양식들이 당대의 예민하고 박식한 비평가들에 의해 이해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어떤 비평가나 미술사가라도 완전히 편견이 없을 수는없으나 미술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눈에 우리의 마음에 들지 못했던 작품이나양식이라도 그것의 객관적인 장점을 찾는 데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작품 감상이 전적으로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우리도 뛰어난 미술 작품을 식별할 수 있다고여전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러한 식별 능력은우리의 개인적인 취향과는 거의 상관없다. 이책을 읽는 독자도 라파엘로를 좋아하고 루벤스를 싫어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으나 만일 이 책의 독자들이 이 두 화가들이 다같이 탁월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