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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3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by 2mokpo 2023. 5. 23.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한껏 위세를 떨치던 이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왕정복고시기에도 그랬다. 이 시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1632-1723) 이었는데 영국은 1666년의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299)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와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도판 299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1632~1723)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1675~1710

렌은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바로크 건축가들의건물 배치 방법과 장식적인 효과에 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바로크 식 탑과 렌의 탑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2층의 경우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 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 고전 시대 건축들의 유적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그들의 연구 조사 결과를 교과서로 출판했다. 이 교과서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저술한 것인데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취향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서로 간주되었다. 자기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의 첨단으로여겨졌다.

도판 301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 <런던 치직 저택> 1725년경

도판 301은 그러한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취향과유행의 위대한 선도자인 벌링턴(Burlington: 1695-1753) 경이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 직접 설계하고 그의 친구인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1685-1748)가 장식한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힐데브란트나 가톨릭 유럽의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영국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어디에서나 고전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을 지닌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잘 다듬어진 생 울타리와 작은 길까지 건축가의 설계에 포함되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garden)' 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건축에 있어서의 이성과 취향의 척도를 한 이탈리아 건축가의 권위에서 찾았듯이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남

유럽의 한 화가에게 의존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에 조성된월트셔(Wiltshire) 주 스타우어헤드(Stourhead)의 아름다운 정원(도판 302) 풍경을 로랭과 팔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배경에 있는 '신전' 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이 클로드 로랭의 회화(p. 396, 도판 255)에서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도판 302 <윌트셔주 스티우어헤드의 정원> 1741년부터 조성됨

취향과 이성의 척도에 의거한 영국의 화가나 조각가들의 입장이 반드시 부러울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신교의 승리와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문이었는데, 이러한 기능마저도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아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이들은외국에서 명성을 얻은 뒤에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이었다.

벌링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외부의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을 원할 경우 그들은차라리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런 그림을 사려했던 것이다.

도판 303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정신 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도판 303 윌리엄 호가스(1697~1764) <베들럼의 탕아> '탕아의 편력' 중 한 장면, 1735, 캔버스에 유채, 런던 존 손 박물관

이것은 갖가지 종류의 미치광이들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이 그림의 첫번째 독방에 있는 종교적인 미치광이는 바로크 식 그림에 나오는 성인들처럼 짚으로 만든 침상 위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두 번째 독방에는 왕관을 쓰고 있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보인다. 그 밖에도 정신 병원의 벽에 세상사의 모습을 휘갈겨 그리고있는 백치와 종이로 만든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장님, 계단에 몰려 있는 기괴한 3- 인조-빙그레 웃으며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과 바보 같은 가수와 가만히 앉아서 앞만 멍하게 응시하는 감정을 상실한 사람의 애처로운 모습ㅡ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때 궁지에 빠져 있게 내버려두었던 하녀 이외에는 슬퍼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탕아 등이 있다. 탕아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잔인하게 그를 구속했던 족쇄를 벗겨준다. 그것이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적인 장면이다. 이것은 이 탕아를 비웃는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난쟁이와 화려했던 과거에 그를 알던 우아한 두 여자 방문객들과의 대조에 의해 더 비극적으로 되고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각 인물들과 에피소드는 모두 호가스가 말하는 이야기와 꼭들어맞지만 그것만으로 이 그림을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가스의 그림에서 그가 주제에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수법뿐만 아니라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에도 대단한 솜씨를 발휘한 것을 보면 그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화가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탕아를 둘러싸고 있는인물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 전통을 가진 이탈리아 그림만큼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사실 호가스는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아름다움을 지배하는 법칙을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름다움의 분석》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의 요점은 굽이치는 선이 항상 모가 난 선보다는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호가스 역시 이성의 시대에 속해 있었으므로 취향이라는 것에도 가르칠만한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거장들에 대해서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로잡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일련의 연속 그림들이 그에게 명성과 상당한 돈을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원화보다는 열성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된 판화로 만든 복제품 때문이었다. 당시의 감식가들은 화가로서의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통해서 유행적인 취향에 반대하는 끈질긴 운동을 전개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의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1723-92)이탄생했다. 호가스와는 달리 레이놀즈는 이탈리아 여행을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이탈리아의 거장들인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레조, 티치아노 등이 필적할 수 없는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감식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도판 304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 177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도판 304는 존슨 박사 그룹의 한지식인이며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영어-이탈리아 어 사전을 편찬하고 후에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이탈리아 어로 번역한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친숙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은 하나의 완벽한 기록이며 게다가 매우 훌륭한 작품

임에 틀림없다.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에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그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판 305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강 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 1775,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리스 컬렉션

도판 305는 그가 그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이다. 우리는 벨라스케스도 또한 강아지와 함께있는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기억한다.그러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이 눈으로 본 질감과 색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놀즈는 우리에게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레이놀즈는 그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소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기울였다고 한다. 레이놀즈는 보울즈 양의 집에 초청을 받아 저녁 식사 때 보울즈양 옆에 앉았다. “레이놀즈는 그녀가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옛날 이야기나 요술을 부려서 그녀를 대단히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그녀가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보도록 하고는 그 사이에 그녀의 접시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접시를 찾는 척 하다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접시가 다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레이놀즈를 따라서 그의 집으로 가 희열이 충만한 표정을 짓고 앉았다. 바로 그 표정을 그는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다."

 

그것은 <하버필드 양의 초상 도판 306으로 게인즈버러는 작은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중인것 같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는 그 단순한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도판 306 토머스 게인즈버러(1727~1788) <하버필드 양의 초상>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리스 컬렉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모두 쇄도하는 초상화의 주문으로 인해 그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자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인인 레이놀즈와는 달리 조용한 시골을 좋아했고 그가진실로 즐긴 여흥은 실내악을 듣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게인즈버러는 그의 풍경화를 사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경화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도판 307)으로 남아 있다.

도판 307 토머스 게인즈버러 <시골풍경> 1780년경, 황갈색 종이에 검정 분필과 찰필로 그리고 흰색으로 강조해 덧칠한 소묘,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이 그림들에서 그는 영국 시골의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18세기에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가스에게 만족했던 대중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에게 초상화를 그려받기 위해서 포즈를 취했던 사람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미술 작품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 효과에 밀려 유행에서 벗어났던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éon Chardin : 1699-1779)으로 그는 호가스 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도판 308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 <감사기도>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도관 308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다.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그리고 바토의 번쩍이는 그림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광채를 잃은 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원작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 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그를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18세기 화가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력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초상 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인 장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1741-182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훌륭한 흉상들은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도판 309 조각가 장 안투안 우동(1741~1828) <볼테르 상> 대리석,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도판 309는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 상〉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은 마침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되었다.

도판 310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 1760년경, 종이에 붉은색 분필, 브장송 박물관

도판 310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 1732-1806)의 소묘인데 그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 사회의 테마를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그의 풍경화 소묘 작품들에서는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능란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로마 근교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에서 본 이 장면은 그가 실제 풍경의 단면에서 어떻게 장엄함과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 조파니 <보청기를 끼고 있는 레이놀즈를 포함한 당시의 지도급 미술가들의 모습이 보이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사생 실습 정경> 1771, 캔버스에 유채, 윈저 궁 왕실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