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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by 2mokpo 2023. 5. 15.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한 것은 로마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이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이것은 특히 17세기 말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정책을 꾸몄다. 루이 14세가 그의 왕궁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웅대한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루이 14세의 또 다른 궁전은 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1660~80년경에 세워진 베르사유 궁전(도판 291)이다.

도판291 루이 르 보와 쥘아르두앵 망사르, <베르사유 궁>, 파리 부근, 1655-82, 바로크 양식의 궁전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진을 통해서는 그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정원에 면해 있는 창문이 각 층에 적어도 123개씩이나 있고, 양옆으로 잘 다듬어진 나무들과 단지들과 조각상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가로수길(도판 292),

 

도판 292

그리고 테라스와 연못들로 이루어진 정원이 수 마일에 걸쳐 전원을 이루고 있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이 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를 좌우 날개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각 익부 에는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을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주요층의 중심부를 이오니아 식 열주(列柱)로 악센트를 주고 그 열주들이 떠받치고 있는 엔타블레이처 위에는 일렬로 조각상들을 놓았다. 이 인상적인 중심부의 측면도 이와 유사한 장식으로 되어 있다. 순수한 르네상스 식 형태들만으로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정면은 그 단조로움을 깨지 못했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건축가들은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건물에서 바로크 형태의 진정한 기능과 목적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 만약 베르사유 궁전의 설계자들이 좀더 대담하고 또 이 엄청난 건물들을 분할하고 배열하는 데 비정통적인 수단을 더 많이 활용했더라면 그들은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교훈이 그 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은 그 다음 세대에서였다.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와 프랑스의 성들은 그 시대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남부 독일의 작은 공국(公國)들도 모두 나름대로 그들을 위한 베르사유궁전을 가지고 싶어 했고, 또 오스트리아나 스페인에 있는 작은 수도원들조차도 보로미니나 베르니니 설계의 인상적인 화려함에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1700년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성과 교회당들은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넓은 시골 들판은 정원으로, 시냇물은 폭포로 변형되었다. 미술가들은 그들 마음에 맞게 자유자재로 설계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광경은 돌과 도금된 치장 회반죽 세공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설계를 현실화하기 전에 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엄청난창작 활동의 결과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많은 소도시들의 경관은 완전히 변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특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293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빈의 벨베데레 궁>, 1720-24년 사이

도관 293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lebrandt: 16681745)가 말버러(Mulborough) 공작의 동맹자인 사부아 (Savoy )의 외젠(Eugene) 공을 위해서 빈에 세운 성을 보여준다. 이 성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분수대와 깎아 다듬은생울타리가 있는 테라스 정원 위에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힐데브란트는이 성을 일곱 개 부분으로 구분했으며, 정원속의 누각(樓閣)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 창문이 다섯 개 있는 중앙 부분은 앞쪽으로 튀어 나와 있고 그 양쪽에 높이가 약간 낮은 두 개의 건물이 접해 있으며 중앙의 이 세 건물군 양 옆에 조금 더 낮은 부분이 이어져 있고 건물 전체의 테두리를 이루는 탑과 같은 네 개의 모서리건물들이 양쪽을 마감하고 있다. 중앙 건물과 모서리의 네 건물들은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부분이다. 건물 전체는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윤곽은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가늘어지는 벽기둥들이나 창문 위를 장식한 소용돌이 모양의 울퉁불퉁한 페디먼트, 또는 지붕 위에 줄을 지어 서 있는 조각상들과 전승 기념비 등 힐데브란트가 장식의 세부에 사용한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 온갖 장식에도 불구하고 건물 전체의 명료한 윤곽은 그대로 살아 있다. 우리가 이러한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갈 때이다.

도판 294

도관 294 는 외젠 공의 궁전 입구이며

도판 295

도판 295는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독일의 한 성의 계단 부분이다. 우리는 이 실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눈앞에 그려보지 않고는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향연이나 연회가 베풀어질 때 등불들이 켜지고 그 당시의 화려하고 품위 있는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남녀들이 도착해서 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러한 순간 당시의 어둡고 불빛 하나 없으며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와 귀족들의 휘황찬란한 거처간의 대조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교회의 건물들도 이와 유사한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296 야콥 프란타우어, <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1702

도관 296다뉴브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멜크(Melk) 수도원이다. 다뉴브 강을 타고 내려오다가 둥근 지붕과 이상하게 생긴 두 개의 탑을 이고 언덕위에 서 있는 이 수도원을 볼 때 비현실인 환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수도원은 야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ver: 1726년 사망)라는 그 지방의 건축가가 지은 것이며, 장식은 바로크 양식의 방대한 보고(寶庫)에서 나온 새로운 이념과 디자인을 즉시 적용할 줄 알았던 솜씨 좋은 떠돌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 이 이름 없는 미술가들은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해서 건물들을 한데 모으고 배치하는 어려운 기술을 얼마나 잘 습득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또한 장소에 따라서 장식에 차등을 두어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을 삼가하고 돋보이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되도록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실내 장식에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았다. 베르니니나 보로미니가 가장 원기 왕성한 기분일 때라 할지라도 이처럼 자유 분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오스트리아의 순박한 농부가 그의 집을 떠나서 이 이상한 신비의 나라(도판 297)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을지 상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는 사방에 구름이 가득 차 있고 음악을 연주하며 천국의 기쁨을 전하는 천사들이 있다. 몇몇은 설교단 위에 자리 잡고 있으나 모든 것이 움직이고 춤을 추는 것같이 보인다. 심지어 화려한 주제단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물 자체가 즐거운 리듬에 맞추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회의 건물 안에서는 '자연스럽" 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그것이 천당에 관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그 가운데 서 있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정지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물론 1700년대 전후에도 유명한 화가나 조각가들이 있었으나 17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거장은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16841721)이다. 그는 태어나기 불과 몇 해 전에 프랑스에 점령당한 플랑드르 일부 지역의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해 살다가 그 곳에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역시 궁정 사회의 축제와 유흥에 적합한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왕과 귀족들의 성의 실내 장식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실제의 축제가 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상의 공원에서 즐거운 야유회를 즐기는 꿈같은 생활로 거기에는 비도오지 않으며 숙녀들은 모두 다 아름답고 그녀들의 연인들은 우아하며, 모든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고 번쩍이는 비단 옷을 입고 사는 사회, 남녀 목동들의 삶이마치 미뉴에트 춤의 연속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사람들은 바토의 예술이 너무나 존귀하고 인위적일 거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그러나 바토는 단순히 당대의 유행의 대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예술가였다. 오히려 그의 꿈과 이상이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한 것이었다.

298, 앙투안 바토, <공원의 연회>, 171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7.6 x 193cm, 런던 월리스 콜렉션

도판 298은 공원에서의 소풍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다. 이 장면에는 얀 스덴의 떠들썩한 쾌활함(p. 428, 도판 278)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이들 남녀들은 조용히 앉아서 꿈을 꾸며 꽃을 만지작거리거나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빛이 그들의 아른거리는 옷 위에서 춤을 추고 있어서 이 잡목숲의 덤불을 지상의 낙원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바토의 섬세한 필법과 세련된 색조의 조화와 같은 그의 예술적인 자질들은 이러한 복제판을 통해서는 쉽게 맛볼 수 없다. 무한할 정도로 섬세한 그의 유화 작품이나 소묘 작품들은 원화()를 보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분필 자국이나 붓 자국만으로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안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 이러한 아름다움의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습작과는 다르다.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바토는 병자였으며 폐병으로 요절했다. 아마도 그를 찬미하고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었던 그런 강렬함을 그의 예술에서 엿볼 수있는 것은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실의 후원을 받는 미술>, 베르사유 박물관 소장, 1667년 재상 콜레브를 대동하고 왕립 고블랭 제작소를 방문한 루이 14세를 기념하여 제작된 태피스트리, 이 방문에서 현재 '프랑스 디자인의 전형'이라 불리는 직물에 왕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고블랭 직물은 콜베르의 수출 진흥 정책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