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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by 2mokpo 2023. 5. 8.

우리는 16세기 후반에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에서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한다. 델라 포르타는 보다 많은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소위 고전적인 건축의 규칙이라는 것을무시해버렸다. 일단 예술이 이러한 길로 접어들면 계속해서 그 길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면 그 이후의 미술가들은계속해서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더 복잡한 장식과 더욱 놀라운 아이

디어를 고안해내야만 했다.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불리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도판 282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 1653, 로마 피아차 나보나 소재

 

도판 282는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그의 조수들과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이 교회당을 보면 보로미니가 채용한 것이 사실은 르네상스 형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델라 포르타처럼 그는 중앙 입구를 고대 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보다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러나 보로미니의 정면과 비교해보면 델라 포르타의 정면은 다소 엄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보로미니는 더 이상 고전 건축에서 따온 기둥 양식을 가지고 벽을 장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그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 해서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정면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굴곡이 져 있다. 세부를 들여다보면 더욱 놀라운 효과들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윗층은 원형이며 이두 개의 층이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정통과 건축 교사들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만한 것이었으나 건물 전체에는 극히 잘 어울리고 있다. 중앙 현관 양 옆에 있는 문틀은 더욱 놀랍다. 입구 위의 페디먼트(pediment)가 타원형 창문들을 만들기 위해서 장식되어 있는 것 같은 방법은 일찍이 다른 건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이 건물의 전반적인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런 바로코 양식의 건물들은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극장의 무대와 같이 과장되어 있다는 평을 들어왔다. 보로미니 자신은 이같은 비난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교회가 축제처럼 흥겹게 보이고 화려함과 운동감이 가득한 건물이 되기를 원했다. 빛과 화려한 구경거리로 가득찬 아름다운 세계에 관한 환영으로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극장의 목적이라면 교회를 설계하는 건축가가 우리에게 천상을 연상시키는 보다 으리으리한 장관과 영광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교회 내부로 들어가 보면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천상의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신중히 보석과 황금과 스터코(stucco, 치장 벽토)등으로 호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83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산타 아그네스 성당 내부>, 1663년경

 

도판 283은 보로미니가 설계한 교회의 내부를 보여준다. 북유럽 나라들의 교회 내부에 익숙한 사람들의 취향으로 보면 이 눈부신 장식이 너무 세속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이리하여 종교 개혁과 과거에 그처럼 자주 미술의 진로에 영향을 끼쳤던 우상 숭배라는 말썽 많은 문제들이 다시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 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내부를 로마 교회의 장려한 의식의 틀로 보지 않는다면, 또한 제단 위에 촛불이 켜져 있고 분향의 향기가 교회 내부에 감도는 가운데 오르간과 성가대의 선율이 우리를 별세계로 인도하는 장엄한 미사에 참석하여 보지 않는다면 이같이 호화찬란한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잔 로렌 베르니니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보로미니와 같은 세대로 반 다이크 와 벨라스케스보다는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이 위였다. 이들 거장들처럼 그도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도판 284는 한 젊은 여자의 흉상으로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가운데하나이다. 내가 피렌체의 한 미술관에서 그 작품을 보았을 때 한 줄기 햇살이 이흉상 언저리를 비추고 있었는데, 마치 그 여인이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베르니니는 그 여인의 가장 특징적인 순간의 표정을 포착했음에 틀림없다. 얼굴 표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아마도 베르니니를 능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마치 렘브란트가 인간의 행동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을 이용했듯이 베르니니는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285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환희>, 1645-52, 대리석, 높이 350cm,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부속 코르나로 예비실의 제단

 

도판 285는 로마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 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베르니니가 감히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이 인물들이 배치된 방법이 대단히 교묘해서 이들은 계단이 제공해주는 훌륭한 틀 속에 아무튼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장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북유럽의 방문객이 처음 보기에는 이 전체적인 구도가 너무나 무대 효과를 연상시키고 천사와 성녀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표시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취향과 교육의 문제이므로 이에 대해 시비를 가리는 논란은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에 베르니니의 계단과 같은 종교 미술 작품이 바로크 미술가들이 의도하는 열렬한 환희와 신비스러운 환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온당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베트니니가 이런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성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든 구속을 떨쳐버리고 미술가들이 그때까지 기피했던 감정의 극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만약 우리가 이 기절한 성녀의 얼굴을 이전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본다면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 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86 도판 285의 세부

 

도판 286을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의 두상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 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로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크 교회의 회화 장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87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1670-83, 프레스코, 로마 일 제수 예수회 교회당의 천정화

 

도판 287은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tista Gaulli: 1639-1709)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 장식이다. 이 화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 있으며 우리가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했다. 그 이전에 코레조도 천장에 천국을 그리는 데 착안했으나 도판 217)가 울리의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그 주제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예수의 이름이 교회의 중앙에 금빛 찬란한 글자로 새겨져 있다. 그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천사, 천사, 성인들이 황홀경 속에서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악마와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가 낙심천만한 몸짓으로 천국에서 내쫓기고 있다. 이 혼잡한 장면은 천장의 틀을 부수고 튀어나올 듯이 보인다. 천장에는 성인들과 죄인들을 교회로 실어 내려올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을 이같이 틀을 깨트리고 나오게 함으로써 미술가는 우리를 혼란시키고 압도해서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효과를 달성하는 데 모든 예술가들이 협력했던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치장 회반죽 세공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들은 어떠한 성이나 수도원의 홀도로 장관을 연출할 무대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거장들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인데, 그는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활약했다.

도판288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750년경, 프레스코, 베네치아 라비아 궁

 

도판288은 그가 1750년경에 그린 베네치아의 한 궁전 장식의 일부이다. 이 그림은 티에폴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그것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사치에 달한 향연을 베푼다는 이야기인데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값비싼 산해진미의 요리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부심이 강한 주인 안토니우스에게 자기는 그가 지금까지 제공한 어떤 음식보다도 더 값비싼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걸이에서 그 유명한 진주를 떼어내어 그것을 식초에 녹여 마셨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는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그 진주를 보여주는데 한 흑인 하인이 그녀에게 유리잔을 내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리기에도 재미있었을 것이며 보기에도 역시 즐겁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재치가 넘치는 작품들이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서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은 흔히 돌아갈 때 갖고 갈 기념품을 원했다. 특히 그 경치가 화가를 매혹시킨 베네치아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한 유파가 생겨났다.

290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1775-80년경, 캔버스에 유채, 70.5x93.5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도판 290은 이들 중의한 화가인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1712-93)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풍경이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이 풍경화도 베네치아 미술이 그 특유의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아르디가 그린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정경과 그보다 1세기 전 네덜란드의 지몬 데 블리헤르가 그린 수수하고 성실한 바다 풍경(p. 418, 도판 271)은 여러 모로 흥미있게 비교된다. 우리는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의 정신이 단순한 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아르디는 17세기 화가들이 연구했던 이 효과를 완전히 몸에 익히고 있었다. 그는 화가가 일단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 제공해주면 나머지의 사소한 세부들은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능숙하게 배치된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에 살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