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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7장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by 2mokpo 2023. 7. 5.

27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현대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전통을 완전히깨트리고 이제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고 하는 미술의 종류로 생각한다. 진보의 관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술도 시대의 진전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좋았던 옛 시절' 이라는 슬로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대 미술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대의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졌으며 현대 미술도 과거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현대 건축은 서서히 이루어졌으나 그 원칙은 확고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건축과 장식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 어떻게 아르 누보라는 실험적 운동을 이끌어냈는지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르 누보 양식의 철재 구조가 보여준 새로운기술의 가능성은 아직도 경쾌한 장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20세기 건축은 아르 누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기발한 창안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미래는 옛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양식이나 장식의 편견에서 탈피하여 새로워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이 예술에 속한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장식을 거부하였으며 건축을 그 목적에 비추어서 새롭게 보자고 제안하였다.

건축에 대한 이러한 참신한 접근 방법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전통이 기술적 발전을 짓누르지 않았던 미국에서 가장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그러나 건축가가 의뢰인에게 전혀 선례가 없었던 비전통적인 집을 짓자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에게 강인한 정신과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람은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 1869-1959)였다. 그는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부가 살기 편하게 설계되어 있고 거주자의 요구에 잘 들어맞는다면 건물 외관도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363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 페어오크스 가 540번지>, 1902. ‘양식을 배제한 주택

(도판 363)은 시카고의 부유한 교외에 있는 라이트의 초기 주택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흔하게 사용되던 쇠시리, 처마 장식띠 등을 배제하고 건물을 그 목적에만 맞게 지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신을 단순한 기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라이트는 기술자의 당연한 요구 사항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당시는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확산되던 시기였으므로 이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기계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보다 못하다는 모리스의 주장이 옳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은 기계가 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해내고 거기에 맞추어서 디자인을 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축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건축물이 그냥은 볼 수 없을 정도로 벌거벗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러한 건축물의 외관에 익숙해졌고 현대 기술이 탄생시킨 양식이 지닌 명확한 윤곽, 단순한 형태를 즐기게 되었다.

도판 364는 이러한 취향의 혁신은 최초로 현대적 건축 재료를 대담하게 사용하는실험을 하고 그로 인해 때때로 조소와 적의를 받았던 몇몇 선구자들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다.

365 발터 그로피우스 설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1926

도판 365는 현대 건축에 대한 찬반 논쟁의 중심이 되어왔던 실험적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독일 사람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데사우(Dessau)에 설립한 바우하우스(Bauhaus)인데 후에 나치의 탄압으로 폐쇄된 건축 학교이다. 이 학교는 미술과 기계 기술이 19세기처럼 분리될필요가 없고 오히려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functionalism)' 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그에 따라서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은 확실이 상당 부분 진실에 가깝다. 어쨌든 기능주의는 19세기 미술 관념이 우리들의 도시와 방을 어질러놓는 데 사용했던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차 대전 전에 최고조에 올랐던 미술 혁신운동에서는 흑인 조각에 대한 예찬이 열병처럼 퍼졌다. 그것은 다양한 경향을 떠었던 젊은 미술가들을 한데 묶어놓았다. 흑인 조각은 골동품 가게에서 싸게 구할수 있었다. 이제 아카데미 파() 미술가의 화실을 장식했던  아프리카 부족의 가면으로 대체되었다. 아프리카 조각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도판 366)를 보면, 유럽 미술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모색했던 젊은 세대들에게 그와 같은 형상이 왜 그렇게도 강렬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유럽 미술에 있어서 2대 주제였던 '자연에 대한 충실함이나 이성적 미'는 이 가면을 만든 장인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유럽 미술이 오랫동안 추구했으나 마침내는 상실해버린 것처럼 보이는강렬한 표현성, 명쾌한 구성, 솔직하고 단순한 기법을 지니고 있다.

 

도판366 <서아프리카 단 족의 가면>, 1910-20년경. 눈꺼풀 주위에 고령토를 붙인 목조, 높이 17.5cm, 취리히 리트베르크 박물관(폰 데어 하이트 컬렉션)

오늘날 우리는 원주민의 미술 전통이 당시에 그것을 발견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덜 유치(primitive)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싫든 좋든 20세기의 미술가들은 창안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주목을 받기 위해 과거 대가들의 감탄적인 솜씨보다는 독창성을 추구해야 했다. 전통과 단절함으로써 비평가들의 주의를끌고 추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무엇이든 새로운 '주의'가 되어 미래의 미술을 주도하곤 했다. 그 미래는 언제나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이처럼 끊임없는 실험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 시대의 수많은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이러한 노력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실험은 아마도 기타의 다른 미술 운동에 비해 가장 쉽게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그다지 잘 고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행동을 통해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인상주의와 반대되는 것으로 쉽게 기억되었기 때문에 편리한 명칭이 되었고, 꽤 유용하게 쓰였다. 반 고흐는 한 편지에서 자신과 친한 친구의 초상을 어떤 식으로 그리려고 했는지 설명하고 했다. 최초의 단계에서는 그대로 닮게 그렸다. 일단 '정확한 초상을 그리고 난 뒤에는 색채와 배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아름다운 금발을 과장했다. 오렌지 색, 연노랑, 미색을 칠하고 머리의 뒤쪽으로는 평범한 방의 벽이 아니라 무한의 공간을 그려놓는다. 나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선명한 파란색만으로 단순한 배경을 만든다. 이 선명한 파란서울 배경으로 금발의 빛나는 머리는 창공의 별처럼 신비스럽게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아아,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과장님을 만화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문제가 되라? 그가 대한 수법이 만화가의 수법과 비교될 수 있다고 한 반 고흐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화(canicature)는 항상 '표현주의적'이다. 만화가는 그가 조롱하려는 인물을닮게 그리고 나서 그 인물에 대해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왜곡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왜곡이 유머의 기치 아래 이루어지는 한 아무도 이를 이해하기어렵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만화를 볼 때는 미술(art)을 대할 때 처럼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만화, 즉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사랑,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관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미술은 반 고흐가 예언했던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임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모순되는 점은 없다.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은 그것을 보는 방식은 물론 더 나아가 기억하는 형태를 변화시킨다. 같은 장소라도 기쁨 때와 슬플 때에 따라 아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는 바이다.

도판367 에드바르드 뭉크, <비명>, 1895. 석판화, 35.5x25.4cm

이러한 가능성을 반 고흐보다 더 깊이 탐구한 최초의 미술가들 가운데 노르웨이화가인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 1863-1944) 가 있다. 도관 367은 그가 1895년에 제작한 <비명(The Scream)이라는 제목을 가진 석판화이다. 이 작품은 갑작스런 정신적 동요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모든 선들이 이 판화의 유일한 초점인 소리 지르고 있는 얼굴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장면 전체가 그 비명 소리의 고통과 흥분에 가담하고있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마치 만화처럼 왜곡되어 있다. 둥그렇게 뜬 눈, 홀쭉한 뺨은 죽은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판화는 더욱 불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독일의 미술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 1867-1945)는 순전히 큰 인기를 얻기위해서 감동적인 판화와 소묘들을 만들어 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과 학대받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그들의 주장을 앞장서서 옹호하려 했.

도판 368 케테 콜비츠 <궁핍> 

도판 368은 실업과 사회적 봉기가 잦았던 시기에 슐레지엔 방직공들이 당면한비참한 처지를 다룬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1890년대에 그린 일련의 삽화들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그린 이 장면이 그 희곡에는 나오지 않으나 연작의 통렬함을 더 가중시킨다. 이 연작이 금상에 선정되자 책임 내각은 품의 주제와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거나 달래주는 요소가 전혀 없는 그 자연주의적 표현 기법을 이유로 황제에게 이 추천을 수락하지 않을 것을 권했다. 물론 이것이 바로 케테 콜비츠가 의도한 바이다. '이삭 줍는 사람들'을 통해 노동의 존엄성을 느끼게 하려 했던 밀레와는 달리, 그녀는 혁명의 존엄성만이 길이라고 여겼다. 그녀의 작품이 서구 유럽에서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던 동구공산권에서 그 곳의 많은 미술가들, 특히 선전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은 당연하다.

독일에서도 역시 급속한 변화에 대한 요청이 빈번했다 1906년 일군의 독일 화가들은 과거와 완전이 결별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투쟁하기 위해 다리파 (Die Bricke) 라는 단체를결성했다. 에밀 놀데는 그들의 목적에 동조했으나 오랫동안 그 단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도판 369는 그의 인상적인 목판화가운데 하나인 <예언자>, 다리파 화가들이 목표로 했던 거의 포스터와 같은 강렬한 효과를 잘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장식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그들의 단순화는 전적으로 표현을 한층 더 강렬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도판의 모든 것은 법열에 빠진 신의 사자의 응시에 집중되어 있다.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가장 풍요롭게 전개되었다. 독일에서 표현주의는 사실상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나치가 1933년에 권력을 잡게되자 현대 미술은 일체 금지되고 이러한 미술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제작을 금지당했다. 표현주의 조각가 에른스트 바를라흐(Emst Barlach : 1870-1938)의 운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370 에른스트 바를라흐, <불쌍히 여기소서>, 1919. 목조, 높이 38cm, 개인 소장

도판 370은 그의 조각 불쌍히 여기소서!(Have pity)>. 이 거지 여인의 늙고 뼈만 앙상한 손이 보여주는 단순한 제스처에는 매우 강렬한 표현성이 있어서 이 위압적인 주제로부터 관심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여인은 웃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가려진 머리 부분의 단순화된 형태는 우리의 감정에 강하게 호소해온다. 이 작품을 추하다고 해야 할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의 문제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는 렘브란트,또는 표현주의자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원시' 미술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사물의 밝은 측면만을 골라서 보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화가들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가 있다. 1909년 빈에서 그의 초기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자 사방에서 비난과 욕설이 빗발쳤다.

도판 371 오스카 카카슈카<놀고있는 아이들>

도판 371 은 이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초상화가 왜 그처럼 반발을 일으켰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레이놀즈, 게인즈버러와 같은 거장들의 어린이 초상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그토록 충격을 받은 이유를 깨닫게 된다. 과거에는 그림 속의 어린아이가 예쁘장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고, 만약 이러한 구석이 눈에 띄면 불쾌하게 생각했다.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면 미술이 더욱 순수해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언어의 도움이 없어도 완벽한 것이 될 수 있는 음악과 같은 예는 미술가와 비평가들에게 순수하게 시각적인 음악에 대한 꿈을제시해주었다. 휘슬러가 자신의 그림에 음악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어느 정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말로만 그러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전혀 그려져있지 않은 그림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당시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였다. 칸딘스키는 다른 많은 독일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와 과학의가치를 싫어하고 순수한 '정신성' 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랬던 신비주의자였다. 그가 지은 다소 혼란스럽지만 열정적인 저서 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1912)라는 책에서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 를테면 밝은 빨강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필요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도판 372). 이로써 '추상 미술(abstract art)' 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판 372 바실리 칸딘스키, <카자크 인들>, 1910-11. 캔버스에 유채, 95x130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373 마티스, <식탁(붉은 색의 조화)>, 1908. 캔버스에 유채, 180x220cm,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도판 373후식(La Desserte)이라는 제목을 가진 1908년의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티스가 보나르가 개척한 길을 따르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나르가 여전히 빛과 광채의 인상을 보존하려고했던 반면, 마티스는 더 나아가 눈 앞에 전개된 장면을 장식적인 패턴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다. 벽지의 디자인과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 있는 식탁에 깔린 식탁보가 서로 어우러져 이 작품의 주된 모티프를 형성하고 있다. 인물과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도 이 패턴의 일부가 되고 있다. 여인과 나무의 윤곽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고 벽지의 꽃무늬와 어울리도록 형태마저 왜곡되어 있어 더욱 일관성 있게 보인다. (--)가령 우리가 어떤 물건,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생각할 때 신체의 눈으로 본바이올린과 마음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본 바이올린의 형태를 한순간에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사실 그렇게 한다. 그형태들 가운데 어떤 것은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분명하게 떠오르고 어떤 것은 흐릿하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스냅 사진이나 꼼꼼하게 묘사된 종래의 그림보다 이상스럽게 뒤죽박죽된 형상들이 '실재'의 바이올린을 더 잘 재현할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피카소의 바이올린을 소재로 한 정물화(도판 374) 같은 작품이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374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과 포도>, 1912. 캔버스에 유채, 50.6x61cm, 뉴욕 근대 미술관, 데이비드 M. 레비 여사 유증

 

도판 375 파블로 피카소<어린 소년의 두상>

도판376파블로 피카소<두상>

도판 375와 376은 모두 사람의 머리를 그린 것인데 이 두 작품을 한 사람의 화가가 그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것이다. 도판 376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낙서 실험 이나 원시 사회의 물신(物神), 또는 가면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분명히 피카소는 얼굴의 형상과는 전혀 닮지 않은 재료와 형태를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얼굴 형상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거친 재료에서 머리 모양을 잘라내 데생해 놓은 화면에 풀로 붙이고 가장자리에 도식화된 눈을 가능한 한 멀리 떨어트려 그렸다. 꺾인 선으로 치열(齒列)이드러난 입을 표현하고 완만한 곡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불가능성의 한계에까지 도달했다가 도판 375와 같이 확고하고 설득력 있으며 감동적인 형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어떤 수법이나 기법에도 오래 만족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수제(手製) 도기를 만드느라 그림을 팽개쳐두곤 했다.

도판 377 파블로 피카소<새>

도판 377에서 보이는 접시를 이 시대의 가장 세련된 기교를 지닌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피카소로 하여금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그리워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놀라운 소묘 솜씨와 숙달된 기교라고 생각된다. 노련하고교묘한 솜씨를 던져버리고 농부나 어린아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무엇인가를 자신의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에게 특별한 만족감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피카소 자신은 그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새의 노래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가?" 물론 그의 말은 옳다. 어떤 그림도 말로써 완전하게 '설명' 될 수 없다. 그러나 말은 때때로 편리한 지침이 될 수 있고 오해를 없애주며 적어도 미술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피카소로 하여금 그처럼 이색적인 '발견' 을 하게 한 상황이야말로 20세기 미술의가장 전형적인 양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원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는것이다. '좋았던 옛 시절' 에 살았던 미술가들에게는 주제가 제일 우선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성모상이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최선을 다해 작업을 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주문이 점점 줄어들자 화가 자신이 직접주제를 선택해서 그려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그림을 팔아줄만한 고객들이 좋아할주제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술 취한 수도승이나 달빛 아래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나라와 민족을 구한 극적인 역사적 장면을 그렸던 것이다. 또 어떤 화가들은 이런 설명적인 주제를 가진 그림을 그리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주제를 택해 그림을그릴 경우 자신의 기법적인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주제를 고르곤 하였다. 그래서옥외의 빛의 효과에 매료되었던 인상주의자들은 '문학적 인 매력을 지닌 장면보다는 교외의 한적한 길이라든지 건초더미 같은 것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휘슬러는 그의 어머니의 초상 회색과 검정색의 구성 이라고 제목을 붙임으로써, 화가들에게 있어서 주제란 단지 색과 디자인의 균형을 연구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할 뿐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과시했다. 세잔 같은거장은 이러한 사실을 구태여 주장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세잔의 정물화는 자신의 예술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아야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놓은 곳에서부터 계속해나갔다. 그 이후로 점점 더 많은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것은 소위 형태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에게는 항상 '형태'가 먼저이고 '주제'는 그 다음의문제였다. 이러한 과정은 스위스의 화가이자 음악가인 파울 클레 (paul Klee : 1879-1940)의 경우를 살펴볼 때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칸딘스키(Kandinsky)의 친구였으나 1912년파리에서 알게 된 입체파의 실험에서도 큰 감명을 받았다. 클레에게 입체 실험온 현실을 재현하는 새로운 방법의 모색이라기보다는 형태와 씨름하며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였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한 강의를 통해 선과명암, 색을 서로 결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어떤 부분은 강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부분은 가볍게 하기도 함으로써 모든 미술가가 추구하는 균형 감각 또는 제대로된 상태'를 어떻게 이룩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형태들이 그의 손 아래에서 점차 형상을 드러내면서 어떤 식으로 현실적 또는 환상적인 주제를 상상하도록암시해주는가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해낸 이미지들을 완성시키는 것이 조화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느낄 때 그가 이러한 암시를 어떻게 추구해 나갔는지 설명했다. 이러한 방식으로형상을 창출해내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에 충실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자연 그 자체가 예술가를 통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의 기이한 동물 형태나 심해에 사는 생물의 환상적인 요지경을 창조해낸 것도 바로 이러한 신비스러운 힘이다. 이불가사의한 힘은 아직도 미술가의 정신 속에 살아 있으며 그의 창조물이 자라나게해준다.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클레도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상들을즐겼다. 그의 무궁무진한 환상 세계를 작품 하나만을 통해서 평가하기는 힘들다.

도판 378 파울 클레, <작은 난장이의 작은 이야기>, 1925, 판지에 그린 수채와에 니스칠, 43x35cm, 개인 소장

그러나 도판 378을 통해서 그의 기지와 궤변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그림의제목을 조그만 난쟁이의 조그만 이야기>라고 붙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난쟁이를 동화적으로 변용시킨 솜씨를 볼 수 있다. 이 난쟁이의 머리는 그 위쪽에 있는커다란 얼굴의 아랫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클레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이러한 트럭을 생각해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꿈 속에서처럼 자유스럽게 형태를 가지고 유희함으로써 이러한 창안을 할 수있었고 그런 다음 이것을 완성시킨 것이다.

미국 출신 라이오넬 파이닝어(Lyonel Feininger : 1871-1956)의 작품은 형태에 대한특수한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 주제를 선택한 대표적인 예이다. 클레와 마찬가지로파이닝어도 1912년 파리에서 '입체주의로 떠들썩한 미술계를 보았다. 그는 이 입체파 운동이 옛날부터 내려온 회화의 난제, 즉 명료한 구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편평한 화면 위에 공간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해결 방법을 발견했다(pp. 5404, 573-4)고 생각했다. 그는 서로 중첩되는 삼각형들로그림을 구성하는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는데 그 삼각형들은 마치투명한 것처럼 보이고, 그럼으로써 무대 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투명한 커튼처럼겹겹이 쌓인 층을 암시해준다. 이 형태들은 서로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감이 있고 그림을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대상의 윤곽을단순화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닝어는 박공 지붕이 늘어선 중세 도시의 거리나 범선과 같이 삼각형과 대각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소재들을 즐겨 선택했다. 범선들의 범주를 묘사한 그림 도판 379은 그가 이 방법을 통해 공간감뿐만 아니라 운동감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판 379 라이오넬 파이닝어 <범주>, 1929, 캔버스에 유채, 43x72cm, 디트로이트 미술 연구소, 로버트 H 태너힐 기증

루마니아 출신의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 1876-1957)와 같은 조각가는 내가 형태에 관한 문제들이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관심에서 미술학교에서 얻은 기술과 로댕(pp. 5278)의 조수 시절 쌓았던 솜씨를 거부하고 극도의 단순화를추구하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입맞춤하는 두 형상을 입방체의 형태(도판380)로 나타내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각을 했다.

도판 380 콘스탄틴 브랑쿠시, <입맞춤>, 1907, , 높이 28cm,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미술관

그의 해결책은 너무나 혁신적이어서 익살맞은 만화의 주인공을 또다시 연상시키기까지 하지만 그가 씨름하고자한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미켈란젤로의조각 개념은 대리석 속에 잠들어 있는 듯한 형태를 끄집어 내어 (p. 313) 원석의 단순한 윤곽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의 형상에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브랑쿠시는 정반대쪽에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기로 결심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조각가가 돌덩이를 변형시켜 인물상을 암시하게 만들면서도 원석의 본래모습을 얼마만큼이나 보존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 1872-1944)은 가장 단순한 요소인 직선과 원색으로 그림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도판 381). 그는 우주의 객관적인 법칙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명료하고 절도 있는 회화를 열망하였다. 몬드리안도 칸딘스키나 클레와 마찬가지로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런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주관적인 눈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형태들 속에 감추어진 불변의 실재(實在)를 그의 예술이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랬다.

도판 381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의 구성>, 책과는 다른 작품, 1921, 캔버스에 유채, 59.5x59.5cm,

영국 미술가 벤 니콜슨(Ben Nicholson: 18941982)은 이와 유사한 예술관을 갖고자신이 선택한 문제들에 몰두했다. 그러나 몬드리안이 기본색들의 관계를 탐구했던 반면에, 니콜슨은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단순한 형태들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형태들을 흰색의 판지에 각각의 깊이를 약간씩 다르게 하여 돋을새김으로 새겨놓곤 했다.

도판 382 벤 니콜슨, <1984(부조)>, 1934년, 돋을 새김된 판자에 유채, 71.8x96.5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도판 382). 그도 역시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실재'이며 그에게 있어 예술과 종교적 체험은 동일한 것이라는 신념을 표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건 미술가가 몇 개 되지 않는 형태와색채를 결합시켜서 그것들이 제대로 어울려 보일 때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결시켜보는 신비스런 작업(pp. 32-3)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던 마음의 상태는 쉽게이해할 수 있다. 사각형 두 개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만드는 제작자가 성모를 그렸던 과거의 화가보다 더 큰 고민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모상을 그리는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과거의 전통이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고 맞닥트린 문제에 대해 그 자신이 내려야 하는 결정의 수도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사각형으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의 추상화가는 보다 바람직하지 못한 위치에 있다. 그는 사각형을 캔버스 여기저기에 놓아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검토해볼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설사 우리 자신이 그와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노력을 무턱대고 비웃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미국 출신 조각가인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r : 1898-1976)는 이러한상황을 매우 개성적인 방식으로 빠져나왔다. 콜더는 기술자로 교육받았으나 몬드리안의 미술에 큰 감명을 받고 1930년 파리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몬드리안처럼 그도 우주의 수학적 법칙을 보여주는 미술을 갈구했는데, 그에게는 그러한 미술이 딱딱하거나 정적(靜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균형을 잡아주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균형에 대한관념이 콜더를 고무하여 그로 하여금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게 하였다

383 알렉산더 콜더, <어떤 우주>, 1934, 모터로 움직이는 모빌, 채색한 쇠 파이프와 철사 및 나무와 끈, 높이 102.9cm,

그림383 그는 다양한 형태와 색으로 이루어진 물체를 매달아 그것들이 공중에서 원을그리며 흔들거리게 하였다. 여기에서 '균형' 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비유적인 표현이아니다. 많은 생각과 경험을 통해 이러한 섬세한 평형이 창출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교가 일단 창안되고 나면 그것은 최첨단의 장난감을 만드는 데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빌을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 아직도 우주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몬드리안의 사각형 구성을 책 표지 디자인으로 응용하는 사람들이그의 철학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균형과 제작 방식에 대한 수수께끼가 아무리 미묘하고 흥미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사로잡힌화가들은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과거처럼 '주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형태'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들이 추구하는 작품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이 훨씬 쉽다. 왜냐하면 말로 하는 설명이란 흔히 쓸데없이 심각한 이야기로 빠지거나 전혀 무의미한 헛소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한다면, 현대 미술가들은 사물을 창조하고자 한다는 것이 그 해답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창조와 사물이라는 말이다. 즉 현대 미술가들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창조했다고 느끼고자 한다. 제아무리 솜씨 있게 만들어졌다 해도, 혹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품이나 단순한 장식품에 그치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그럴 듯하고 영속적인 어떤것, 이 무미건조한 세상에 존재하는 볼품없는 물건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어떤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벽돌이나 모래로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 느끼며, 빗자루가 마술 지팡이가 되고 돌멩이 몇 개로 마법에 걸린 성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물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치 형상이 원시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던 것처럼.

 

도판 384 헨리 무어, <기대누운 인물>, 1938, 돌 폭 132.7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 : 1898-1986 가 자신의 작품(도판 384)을 보고 우리가 느끼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도 신비한 힘을 가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사물의 유일무이함에대한 강렬한 느낌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무어는 모델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석재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작품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 돌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돌을 조금씩 깨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아갈 길을 돌을 통해 느끼고 그 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만약 그 돌이 인물 형태를 암시해주면 그런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이 인물 형태 속에서도 그는 바위의단단함과 단순함 같은 것을 보존하려고 했다. 그는 돌을 사용해서 여인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암시해주는 돌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20세기 미술가들이 원시 미술의 가치를 새롭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이었다.

사실 그들 중 일부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득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또한 원시 부족의 매우 엄숙한 종교 의식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은 듯해 보이는 형상을 제작해낸 부족의 장인들을 거의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고대의 우상과 먼 옛날의 물신(物神)들이 지닌 신비는 상업주의에 오염된 현대 문명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현대 미술가의 낭만적인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원시인들은 야만적이고 잔인할지는 모르나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20세기 초 파리의 젊은 화가들은 한 아마추어 화가의 예술 세계를발견하게 되었다. 이 화가는 파리 교외에서 세관 관리로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을보내며 그림을 그렸던 앙리 루소(Henri Rousseau : 18441910)였다. 그는 젊은 화가들에게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 위한 교육은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루소는 정확한 소묘나 인상주의의 기법 등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하고 순수한 색채와 명확한 윤곽을 사용해서 나뭇잎 하나하나잔디밭의 풀잎 하나하나까지 전부 묘사했다.

도판 385 앙리 루소, <조제프 브뤼머의 초상>, 1909, 캔버스에 유채, 116x88.5cm, 개인 소장

 

(도판 385)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의 그림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속에는 힘차고 솔직하며 시()적인 무언가가 있다. 따라서 그를 거장으로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소박하고 때묻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이 이상한 부류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루소처럼 소박한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 자연히 우세하기 마련이었다. 예컨대 1차 대전 직전 러시아의 작은 유태인 마음에서 파리로 온 마르크 샤갈(MateChagall : 1887-1985)이 이런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여러 가지 실험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마을 풍경이나 악기와 한 몸이 되어 있는 음악가 도판 386 같은 재미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은 진정한 민속 마음이 지닌 묘미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경이감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도판 386 마르크 샤갈, <첼로 연주자>, 1939년캔버스에 유채, 100x73cm, 개인 소장

무소와 '일요 화기(Sunday Painter)' 등이 독학으로 터득한 소박한 방식에 감탄한화가들은 표현주의나 입체주의의 복잡한 이론을 불필요한 점으로 생각하고 팽개쳐버렸다미국 화가 그랜드 우드는 자기고향 아이오와의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단순하게 그렸다. 돌아오는 봄 도판 387 라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는 진흙으로 모형까지 만들었다.

도판 387 그랜트 우드 <돌아오는 봄>, 1936, 판지에 유채, 46.3x102.1cm, 노스캐럴라이나, 윈스텀-세일럼,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계 미술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1978)는 예기치 못한 것이나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낯선 느낌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인 재현 수법을 사용해 기념조각의 고전적 두상과 거대한 고무 장갑을 황량한 도시 속에 결합해 놓고는 거기에 '사랑의 노래' (도판 388)라는 제목을 붙였다.

도판 388 조르조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1914, 캔버스에 유채, 73x59.1cm, 뉴욕 근대 미술관, 넬슨 A 록펠러 유증

 

아래 도판 3891928년에 그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 장()의 표어로 인용할 수도 있을 법하다.

도판 389 르네 마그리트,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 1928, 캔버스에 유채, 105.6x81cm, 개인 소장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로 자처한 일군의 미술가들 중에서 유명한 일원이었다.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은 1924년에 앞서 언급했듯이,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열망을 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 그룹의 초기 구성원 중 한 사람인 젊은 이탈리아 계 스위스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 1901-66)가 조각한 두상(도판 390)브랑쿠시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단순화라기보다 최소한의 수단을 통한 표현의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두 군데에 하나는 수평으로 또 하나는 수직으로 움푹패여진 부분이 이 대리석판에서 볼 수 있는 전부이지만 그것은 마치 제1장에서 논했던 원시 부족의 미술 작품들처럼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도판 390 알베르토 자코메티, <두상>, 1927, 대리석, 높이 41cm,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 있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저작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예술은 완전히 깨어 있는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이성이 과학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비()이성만이 우리들에게 예술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도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시를 일종의 '신성한 광기' 라고 이야기했고, 콜리지(Coleridge)나 디 퀸시(De Quincey)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성을 몰아 내고 상상력이 정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아편이나 기타 마약 종류를 시험적으로 복용하기도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마음 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열망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클레의 말,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계획할 수 없지만 그 작품이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는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그 결과는 제3자가 보기에는 괴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견을 버리고 자유롭게 공상을 펼치면 예술가의 기묘한 꿈을 같이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 1904-89)가 있다. 그는 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야릇한혼돈 상태를 모방하려 했다. 몇몇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단편들을 놀랍도록 잘 섞어놓았고,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치밀한 정확성으로 그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이런 광기 있는장면 속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예를들어

도판 391 살바도르 달리, <해변가에 나타난 얼굴과 과일 그릇의 환영>, 1938년, 캔버스에 유채,

도판 391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윗부분에 꿈의 풍경인 파도치는 만()과 터널이 뚫린 산 등이 동시에 개의 머리를 나타내고 있으며, 개의 목걸이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 철교로 되오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는 공중에 둥둥 떠 있고 그 몸뚱이의 중간 부분은 서양배가 담긴 과일 그릇으로 되어 잇으며 그것은 동시에 소녀의 얼굴로 연결되고 있다. 소녀의 눈은 해변에 있는 기묘한 조개껍질로 이루어져있고 해변 위에는 그 밖의 많은 괴이한 환영이 가득 차 있다. 마치 꿈에서처럼 다른 형태들은 흐릿한 반면 밧줄이나 천 같은 것은 이상스럽게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일반 대중은 흔히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어내듯이 미술(Art)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미술가라고 여기고 이러한 생각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이전에미술(Art)이라고 이름 붙은 회화나 조각 같은 종류의 것을 미술가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막연한 요구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요구야말로 미술가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제시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미술가를 분발시킬만한 과업이 없다. 일반 대중이 아닌 비평가나 '고상한 교양인' 들도 때때로 이와 비슷한 오류를 범한다. 그들 역시미술가에게 미술(Art)을 창조해내라고 말하며 미래의 미술관에 전시될 표본으로 회화와 조각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미술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과업은 '새로운 것'의 창조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양식, 새로운 '주의' 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최고의 재능을 지닌 현대 미술가들조차구체적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위와 같은 요구에 굴복하고 만다. 어떻게 하면 독창적일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방안은 간혹 무시하지 못할 기지와 명석함을 지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다. 현대 미술가들이 미술의 본질을 다룬, 즉 새롭거나 낡은 다양한 이론에 관심을 돌리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표현한다' 라든가 '미술은 구성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라도 그것이 극단적으로 애매모호하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진실의 핵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마치 진주 안에 핵이 있듯이.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제작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파블로 피카소, <화가오 모델>, 1927, 에칭, 19.4x28cm, 발자크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걸작>의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