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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by 2mokpo 2023. 6. 27.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표면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변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스스로 만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마음에 드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건축은 공허한 틀에 박힌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엄청나게 팽창하는 도시의 구획 구획을 꽉 채운 아파트, 공장 그리고 공공 건물들이 그 건물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다한 양식으로 세워졌다. 그것은 기술자들이 먼저 짓고자 하는 건물에 적절한 뼈대를 세운 다음, '역사상의 양식들을모아놓은 양식집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건물 정면을 장식하여 약간의 예술성을 가미시킨 것처럼 보였다. 대다수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 같은 과정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대중은 이러한 원주, 벽기둥, 처마 장식띠, 쇠시리 장식 등을 원했고 건축가들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의 불합리성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비평가와 미술가들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수공예기술의전반적인 쇠퇴에 불만을 느꼈고, 한때는 그 자체로 의미와 기품을 지녔던 장식물이 기계에 의해 값싸고 천박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반감을갖게 되었다.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mis) 같은 사람들은 미술과 수공예의 철저한 개혁과 싸구려 대량 생산물 대신 양심적이고 가치 있는 수공예품이 자리를 되찾길 꿈꾸었다. 비록 그들이 옹호했던 변변찮은 수공예품이 현대에 와서는 엄청난 사치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의 비평은 광범위한 영향을미쳤다. 그들의 선전 계몽 활동이 기계적 대량 생산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에 대중의 눈을 뜨게 했고 순수하고 단순한 '손으로 만든 소박한것에 대한 기호를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미술 즉 아르 누보(At Nouncau;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의기지는 1880년대에 올려졌다.

349 빅토르 오르타 계단, 뷔셀에 있는 폴-에밀 장송가에 있는 타셀 호텔, 1893년,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

위 도판 349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이래 처음으로 유럽의 건축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창안은 매우 자연스럽게 아르 누보와 동일시되었고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양식'에 대한 이러한 자각과 일본 미술이 유럽 미술을 곤경으로부터구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미술의 업적, 19세기 말까지도 젊은 미술가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그 업적에 대한 우려와 불만의 느낌이 생겨나게 된 것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에서 요즘 흔히 '현대 미술' 이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미술 운동이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인상파 화가들이 당시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회화의 규칙들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현대 미술의 시조로 생각하기도 한다.

350 폴 세잔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73x92cm 펜실베이니아 주 메리온 반스 재단

남프랑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 도판 350을 그린 풍경화는 빛을 담뿍 받고 있지만 동시에 명확하고 견실하다. 이 그림은 명료한 화면 구성과 함께 깊이감과 거리감을 확실하게 전해준다. 중앙의 다리와 길의 수평적인 묘사와 전경에 그려진 집들의 수직적인 묘사는 질서와 평온함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것이 세잔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느낌은 찾을 수 없다. 붓놀림조차도 화면을 구성하는 주요한 선들과 일치하며 자연스런 조화의 느낌을 배가시킨다.

도판 351 풀 세잔 <프로방스의 산>

352 폴 세잔, 세잔 부인의 초상, 1883-7년. 캔버스에 유채, 62x51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세잔이 윤곽선에 상관없이 붓놀림의 방향을 바꾼 경우는 위 도판 351에서 볼 수있는데, 전경에 있는 바위의 단단하고 실감나는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화면 위쪽에생길 뻔했던 평면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아내를 그린 훌륭한 초상화 위 도판 352는 세잔이 강조한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가 그림에 얼마나 안정감과 평온한 인상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평온한 걸작과 비교해볼 때 마네가 그린 모네의 초상화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단지 즉흥적으로 재치 있게 그린 것 같아 보인다.

 

353 폴 세잔, 정물, 1879-82년경. 캔버스에 유채, 46x55cm, 개인 소장

세잔의 작품 중에는 이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위 도판 353과 같은 정물화는 도판으로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그린17세기 네덜란드의 거장 칼프의 확신에 찬 솜씨에 비해 이 작품은 얼마나 어설퍼 보이는가. 과일 그릇은 받침이 중심을 못 찾고 빗겨나 있을 정도로 서툴게 그려져 있다. 탁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앞쪽으로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네덜란드 화가가 부드럽고 북실북실한 천의 표면을 뛰어나게 묘사한 반면 세잔은 여기저기에 슬쩍 붓질만 해놓아 마치 은박지처럼 냅킨을 표현하였다. 세잔의 작품이 처음에 더덕더덕 칠해진 형편없는 것이라고 조롱받았던 것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이처럼 눈에 띄게 서툰 솜씨가 생겨난 이유는 쉽게 추리해볼 수 있다. 세잔은 회화의 전통적 수법 중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어떠한 그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긁기에서부터 출발하려고 결심하였다. 네덜란드 화가는 자신의 놀라운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정물을 그렸다. 하지만 세잔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했던 몇몇 특정한 문제들을 연구하고자 정물을 소재로 택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에 몰두해 있었다. 사과처럼 밝은 색채의 견고하고둥근 물체가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소재였다. 또한 그는 균형잡힌 화면 구성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과일 그릇의 한쪽을 잡아들여 왼쪽의 빈 공간을 메꾸려했던 것이다. 그는 탁자 위에 있는 모든 형태들 사이의관계를 연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관계가 잘 드러나 보이도록 탁자를 앞으로 기울게 묘사했다. 아마도 이러한 작품들이 세잔에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밝은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깊이감을 살리고, 깊이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질서 있는 화면 배치를 이루려고 한 그의 피나는 노력, 그모색과 고투 속에서 필요하다면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했던 단 하나는 바로 윤곽선의 고루한 '정확성' 이었다. 그가 굳이 자연의 형태를 왜곡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라는 효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소한 세부의 왜곡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한 '선 원근법' 은 그를 서로잡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전통적인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세잔이 인상파의 방법과 질서의 필요성을 어떻게 결합시킬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그보다 한참 나이 어린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가문제를 마치 수학 방정식을 풀듯이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기법을 출발점으로 하여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탐구하였고,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색채의 순도와 명도를 잃지 않고서도 눈에는(또는마음 속에서라도) 혼합된 색처럼 보일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점묘법(pointillism)이라는 극단적인 기법은 자연히 모든 윤곽선을 무너트리고 모든 형태를다양한 색깔의 점으로 분할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그림은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릴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쇠라는 세잔이 이때까지 시도했던 것보다 더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그의 복잡한 회화 기법을 보완하였다.

354 조르주 쇠라, 쿠르부브아의 다리, 1886-7년, 캔버스에 유채, 46.4x55.3cm, 런던 코톨드 미술연구소

↑도판 354 쇠라는 거의 이집트 회화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수직선과 수평선을 강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모습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으며, 홍미 있고 표정이 풍부한 색면 구성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888년 겨울, 쇠라가 파리에서 주목을 끌고 있고 세잔은 엑스에 은거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왔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밀레의 작품과거기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상(畵商)의상점에서 일하던 그의 동생 테오(Theo)가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동생은 참으로 놀랄만한 인물이었다. 그 자신 역시 가난뱅이였으면서도항상 형 빈센트를 성심껏 도와주었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가는 여비까지 마련해주었다. 빈센트는 그가 만약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방해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림을 받아 너그러운 아우의 은혜를 갚을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에 머물며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빈센트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일기처럼 매일 계속되는 편지에는 그의 모든 생각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명성을 얻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독학초라한 화가가 쓴 이 편지들은 문학 작품으로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한 것가운데 하나이다. 그 편지들에서 우리는 반 고흐의 화가로서의 사명감, 그의 투쟁과 승리,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자 했던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또한그가 불 같은 경열로 작품을 제작했던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알게된다. 아들에 온 지 1년이 채 못된 199812, 그의 정신은 쇠약해져 마침내 발작을 일으켰다. 19895월 정신병자 수용소로 들어갔지만 그런 중에서도 때때로 평정을 회복하였을 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 고통은 14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18907월 고흐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었고 그 나이는 라파엘로와 같은 37세였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이 채 못되며, 더욱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들은 정신적인 위기와 절망으로 작품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마지막 3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 한두 점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가 그린 해바라기, 빈 의자, 사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몇몇 초상화들은천연색 복제판으로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평범한 실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고흐 자신이 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스스로 그토록 찬탄해 마지 않던 일본 판화가 지닌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지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또 그는 돈많은 감식가의 마음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

도판 355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2.1x90.9cm, 런던 국립 미술관

불꽃처럼 생긴 짙은 색의 사이프러스 나무 도판 355의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눈뜬 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고흐는 광기어린 강렬한 창작 행위에 그 자신을 던졌다.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도판 356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어떠한 화가도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보잘것없고 평온하며 소박한 사물들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를에 있는 그의 좁은 하숙방 도판 357을 그려보내면서 그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도판 356 반 고흐, 생트마리 드 라 메르의 풍경, 1888년, 43.5x60cm,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도판 357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9년. 캔버스에 유채, 57.5x74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제3의 화가가 1888년 남프랑스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이었다. 그와 친하게 되길 무척 갈망하고 있던 고흐는 영국의 라파엘 전파가 지녔던 화가들 간의 우정을꿈꾸면서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고갱을 설득하여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 아주 달랐다. 그는 고흐가 지닌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화가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화가로서는 비교적 늦게 출발했고고갱은 이전에 유능한 주식 중매인이었다), 거의 혼자서 그림 공부를 했다. 두 화가의 우정은 결국 불행하게 끝을 맺었다. 발작적인 정신 착란을일으킨 고흐가 고갱에게 달려들었고 고갱은 그 길로 파리로 도망쳤다. 2년 후 고갱은 유럽을 완전히 떠나 소박한 삶을 찾아 이른바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섬으로 갔다

물론 고갱이 문명의 메스꺼움을 최초로 느낀 예술가는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예술가들이 그 시대의 '양식'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게 될 때마다 그들은 종래의인습적인 형식들에 대해 회의하고 단순한 기교를 혐오했다. 그들은 단지 배워서터득한 기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미술, 단순히 양식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어떤 것을 갈망했다.

도판 358 폴 고갱, 백일몽, 1897년. 캔버스에 유채, 95.1x130.2cm, 런던 코톨드 미술 연구소

타히티 섬에서 가져온 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의 옛 친구들조차 당황스러워 했다. 그 그림들은 너무나 야만적이고 미개해보였다. 그것은 바로 고갱이 원하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 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야만적 인 색채와 소묘만이타히티에 머물면서 감탄했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것이라고 느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그림들 가운데 하나 위 도판 358를 볼 때, 거칠고 야만적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그보다 더 야만적인 현대 미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갱이 아주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그러한 '원시' 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는 달리 그는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연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한 강렬함을 그리는 데 도움이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수세기에 걸쳐 씨름해온 유럽 미술의 문제들을 기꺼이 무시해버렸다.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룩하려는 그의 목표가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향한 그의 열의는 새로운 조화를 이룩하려는 세잔이나 새로움을 전달하려는 고흐의 열의만큼 열정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갱 역시 이상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남양 군도로 영원히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기서 고독과 절망의 몇 해를 보낸 후 질병과 궁핍에 쓰러져 죽었다.

세잔, 반 고흐, 고갱 이 세 화가는 절망적인 고독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의 예술이 이해되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느낀 예술상의 문제들은 점차 미술 학교에서 배운 기술에 만족하지 않는 젊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미술 학교에서 그들은 자연을묘사하고, 정확하게 소모하며, 물감과 붓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피에르 보나르(PiemeBonnard : 1867-1947)는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캔버스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과 색채의 느낌을 표현하는 독특한 솜씨와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도판 359 피에르 보나르, 식탁에서, 1899년, 판지에 유채, 55x70cm, 취리히 취리히, E. Q. 뷔를러 재단

펼쳐진 식탁을 그린 그의 그림 도판 359은 그가 아름다운 색채 구성을 위해 원근법과 깊이감의 묘사를 어떻게 이탈해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스위스의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odler : 1853-1918)는 그의 고향 풍경을 대답하게 단순화해서 묘사하여 마치 포스터와 같은 명료성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도판 360 페르디난트 호들러, 툰 호수, 1905년, 캔버스에 유채, 80.2x100cm, 제네바 미술역사박물관

도판 360이 그림이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유럽 미술이 일본 미술로부터 습득한 수법은 특히 광고 미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되기 이전에 드가의 재능 있는 추종자였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 1864-1901)은 이처럼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 도판 361에 활용했다.

도판 361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사절단 아리스타드 브뤼앙, 1892년, 석판화 포스터, 141.2x98.4cm

삽화 미술 분야도 역시 그와 같은 영향이 확산되면서 똑같이 도움을 받았다. 이전 시대가 책의 출판에 쏟은 애정과 정성을 상기하면서 윌리엄 모리스와같은 이들은 삽화가 인쇄된 페이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하도록 조악하게 출판된 책이나 삽화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젊은 천재인 오브리 비어즐리 (Aubrey Beardsley : 1872-1898)는 휘슬러와 일본 판화에서 영향을받은 세련된 흑백 삽화

362 오브리 비어즐리, 오스카 외일드의 '살로메' 삽화, 1894년, 일본 양피지에 양각과 망판 인쇄, 34.3x27.3cm

도판 362로 유럽 전역에서 순식간에 명성을 얻었다.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많이 사용된 찬사의 말은 '장식적' 이라는것이었다. 회화와 판화는 그것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기 전에 먼저 시각적인 즐거운 화면 구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이같이 장식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행이 미술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회화나 판화 작품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만 있다면 소재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부 미술가들은 점차 이러한 모든 추구 가운데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졌다고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앞서 보았듯이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굳건하고 지속적인 형태는 소홀히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즉 강렬한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할 수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불만을 느꼈다.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 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반 고흐의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세 가지 운동이'미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막다른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미술가들의 끊임없는 시도로서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3x92cm, 암스테르담 국립 빈센트 반 고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