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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by 2mokpo 2023. 6. 16.

앞서 언급했던 '전통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의 여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들과 감식가들은 '예술(Art)' 과 단순한 '기술' (화가의 기술이든 건축가의 기술이든)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이제 미술이 존재 근거로 삼아왔던 바탕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은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갔다.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보면 19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이전 시기에 수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영국과 미국 전역의 도시들이 급속도로 팽창하여 모두 '건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변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건물들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양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조지 시대까지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경험적인방식이나 견본 책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너무 단순하며 '비예술적' 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업가나 시의원들은 새 공장이나 기차역, 학교나 박물관을 세우는 데 있어 자기 자신의 취향을 고집했다. 예를 들어 일단 기타 세부 사항이 합의된 후에는 건축가에게 문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은 노르만 성이나 르네상스의 궁전 혹은 오리엔트 회교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들이 세운 건물들은 그 도시의 얼굴이 되었고,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마치 자연 풍경의 일부처럼 보겠다. 런던의 국회 의사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327 찰스 배리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 <런던의 국회의사당>, 1835

도판 327 특히 이 건물의 설립 과정은 다음과 같이 당시 건축가들의 고충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1884년 의사당이 불타 없어지자 새로운 설계가 공모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인 활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 : 1795-1860)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시민적 자유는 중세 시대에 쟁취 되었으므로 자유의 상징인 의사당도 중세 고딕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였다(이러한 주장은 심지어 2차 대전 후 독일군 폭격기에 의해 파괴된 의사당을 복구하려는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휘했다. 그리하여 배리 경은 고딕 양식의 부활을 줄기차게 옹호하던 건축가들 중 한 사람으로 고딕 식 세부 장식의 전문가인 퓨진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의 협력 관계는 이런 식이었다. 베리는 건물의 전체 공격과 배치를 맡고 정면과 내부의 장식은 퓨전이 담당하게 되었다. 미술은 설립 추진에서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즉 이 건물의 윤곽선은 저 멀리 런던의 안개 속에서 보면 상당히 위험 있어 보이는 반면서 보이는 고딕 장식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다.

미술가와 대중 사이의 불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적인 것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보기에 미술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작품에 대해 터무니 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고 반면에 미술가들은 거만한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인종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벨벳이나 골덴 옷을 입었으며 챙 넓은 모자에 헐렁한 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리고는 소위 고상한 관습들에 대해 경멸을 퍼부었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미술가들의 길에함정들이 널려 있긴 했지만 변화된 상황이 이를 메꾸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함정이란 뻔한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려는 미술가들과 작품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천재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과장하는 미술가들은 모두 파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유약한 화가들에게만 절망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택의 폭이 확장되고 후원자의변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 외에도 그들이 치른 대가는 다음과 같은 이점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즉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미술가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을 지녔다는 전제하에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의 피렌체, 17세기의 로마를 거쳐 19세기에는 파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미술가들이 당대의 지도적인 미술가들에게 배우기 위해, 또 무엇보다도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미술의 본질에 대한 토론에 함께 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바로 그곳에서미술의 새로운 개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으며 다비드처럼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도판328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 캔버스에 유채, 146x97.5cm, 파리 루브르

도판 328은 형태의 표현에 있어서의 그의 탁월한 솜씨와 구도에 있어서의 엄격한 명료성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면 왜 많은 화가들이 앵그르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그의 완벽한 기교를 부러워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동시대의 보다 열정적인 화가들이 왜 이런 매끈한 완벽함을 못견뎌 했는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앵그르의 반대자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 였다.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배출된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멋진 일기를 보면 정작 자신은 열광적인 반항아로 간주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같다. 만일 그가 이러한 역할을 맡았다면 그것은 그가 아카데미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 그리스로마 시대 조상의 끝없는 모사를 거부했다. 심지어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못견뎌 했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앵그르와 그 유파가 장중한 양식(Grand Manner)에몰두하여 푸생과 라파엘로를 찬탄하고 있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베네치아 파와 루벤스에 주목함으로써 감식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아카데미가 화가들에게 요구하는 진부한 주제에 싫증이 나서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 세계의 눈부신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을 연구했다. 그는 탕헤르에서 전투중인 말을 보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말들은 처음부터 앞발을 들고 울부짖으며 맹렬하게 싸워서 말에 타고 있는 병사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에는 아주 근사한 장면이었다. 나는 정말 엄청나고도 환상적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아마 루벤스는 이런 것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도판329  외젠 들라크루아,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 1832년, 60x73.2cm,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도판 329는 그가 여행에서얻은 성과 중의 하나다. 이 그림은 다비드와 앵그르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명확한 윤곽선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빛과 그림자 부분의 색조가 섬세하게 표현된 나체도 없고, 구성상의 배치와 절제는 물론 애국적 이거나 교훈적인 주제도 없다. 화가는 단지 우리가 그 격양된 순간-아랍 기병대가 폭풍처럼 내달리고 준마가 앞발을 들고 일어서는 것을 함께 하기를 바라며 그 역동적이고도 낭만적인 장면에서 느꼈던 기쁨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다. 개성이나 낭만적인 주제 선택으로 미루어보면 들라크루아는 터너와 비슷한 듯 하지만 정작 파리에서 전시된 컨스터블의 작품에 찬사를 보낸 사람은 바로 들라크루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들라크루아가 진정으로 찬양한 미술가는 그와 동시대의 프랑스 풍경화가인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였다. 그의 미술은 이처럼 대조적인 자연에 대한 접근 방식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있다고할 수 있다. 컨스터블처럼 코로도 가능한 한 진실하게 현실을 묘사하려는 결심에서 출발하였으나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진실은 조금 달랐다.

도관 330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정원>, 1843, 캔버스에 유채, 43.5x60.5cm, 파리 루브르

도관 330은 그가 여름날 남프랑스의 열기와 정적을 표현하기 위해 세부 묘사보다는 모티프의 전반적인 형태와 색조에 주력했음을 보여준다.

1848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 181475)이다.

그는 풍경화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인물화로까지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혁명'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농부들은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도판 331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 1857, 캔버스에 유채, 83.8x111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도판331은 밀레의 유명한 작품 <이삭 줍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없으며 줄거리도 없다. 다만 세 명의 농부들이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목가적인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이 농촌 여인들은 천천히 육중하게 움직이면서 완전히 일에 열중하고 있다. 밀레는 이들의 건장하고 튼튼한 체격과 신중한 움직임을 강조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하고도 견고하게 묘사했으며 이를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치는 들판과 대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농촌 아낙들은 아카데미 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허술한 듯한 구성은 고요한 균형감을 지탱해주고 있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는 계산된 리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이 전체 구성에 안정감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화가가 이 장면을 얼마나 엄숙한 것으로 보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 1819-77)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LeRealistme), G. 쿠르베 전'이라 불렀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을뜻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개성과 방식은 카라바조와 유사했다. 즉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도판 332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 캔버스에 유채, 129x149cm,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도판 332에서 그는 그림 도구를 지고 시골길을 걷다가 친구와 후원자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라는 제목을 붙였다. 관전파의 요란한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이 그림은 유치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아한 포즈도 유려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다. 이 그림의 꾸밈 없는 구도와 비교해보면 심지어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의 구성도 계산된 것처럼 보인다. 또 화가가 자기 자신을 셔츠 차림의 부랑아처럼 묘사한다는 발상 자체가 소위 점잖은 화가들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이 쿠르베가 원했던 인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랬으며 상부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러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82)는 이탈리아 망명자의 아들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혔다.

도판 33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Ecce Ancilla Domini)>, 1849-50, 목판에 붙인 캔버스에 유채, 72,6x41.9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도핀333은 로제티의 <수태 고지>이다. 그러나 로제티가 따르고자 한 것은 중세거장들의 정신이었지.~ 그가 갈망했던 것은 그들의 태도를 본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천사가 마리아 에게와서 인사하는 장면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 복음 129)."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서 로제티가 그 나름의 새로운 표현 속에서 단순함과 순수함을 추구했으며 우리로 하여금 참신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의 세번째 혁명의 물결(들라크루아에 의한 첫번째 혁명의 물결과 쿠르베에 의한 두번째 파동을 거쳐)은 에두아르 마네(Édouand Manet : 1832-83)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하여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모든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장소는 창문이 있어 빛이 들어오는 화실이었으며 둥글고 입체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점차 변화를 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1863년 아카데미 파 화가들은 '살롱(Salon)'이라 불리는 관전에 마네의 작품들을 입선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 후 소란이 일자 당국은 심사 위원들이 낙선시킨 작품들을 모아 소위 낙선전(Salon des Refusés)' 이라 불리는 특별 전시회를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중들은 주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판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풋내기들을 비웃으러 전시회에 왔다. 이 유명한 일화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격렬하게 계속된 논쟁의 첫 단계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그 당시 화가들과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상상하기 힘들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마네의 작품이 그 이전 시대의 위대한 거장들, 특히 프란스 할스와 같은 화가들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마네는 그 자신이 혁명가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거부했던 색채의 대가들의 위대한 전통, 즉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서 파생되었고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19세기 고야에까지 이르는 위대한 전통 속에서 충실히 영감을 찾아내었다.

도판 334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9, 켄버스에 유채, 169x125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마네에게 발코니에 서 있는 인물들 도판 334을 그리도록 해서, 옥외의 완벽한 밝음과 형태들을 집어삼키는 듯한 내부의 어두움 사이의 대조를 감행하게 자극한 것은 분명히 고야의 그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69년도의 마네는 60년 전에 고야가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이 같은 탐사를 수행했다. 고야와는 다르게 마네가 그린 여인들의 머리는 우리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나 루벤스의 딸 초상화 게인즈버러의 <하버필드 양>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이들 과거의 화가들은 방법에 있어서 서로 달랐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단단한 몸체들이 주는 인상을 찾아내려 했고 명암 대조를 통해 그것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들이 그린 인물들과 비교해서 마네가 그린 인물들의 머리는 평면적이다. 배경 속의 여인은 확실한 코도 없이 그려져 있다. 마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처리들이 순전히 무지의 소치로 보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간다. 그러나 사실은 야외의 환한 빛 속에서 보면 둥근 형태들은 때때로 단순히 색칠한 것들처럼 평면적으로 보인다. 마네가 탐색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효과였다. 그 결과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그림은 과거의 어떤 거장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과 정말로 얼굴을 맞대고 쳐다보는 듯한 환영(幻影)을 느끼게 된다. 전체의 일반적인 인상은 평면적이지 않고 오히려 실제적인 깊이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놀라운 효과를 주는 이유들 중 하나는 발코니 난간의 대담한 색상이다. 난간은 색의 조화라는 전통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구도를 가로지르는 밝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 결과 이 난간은 정면에 대담하게 돌출되어 보이며, 그 때문에 이 장면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이론들은 외광(外光, Plein air), 즉 옥외의 자연 광선에서의 색의 취급뿐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형태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도판 335 에두아르 마네, <롱상의 경마>, 1865, 석판화, 36.5x51cm

도판 335는 마네의 석관화ithographs ; 돌 위에 직접 드로잉해서 찍어내는 방법으로 19세기 초반에 발명되었다) 가운데 하나이다. 얼핏 보면 혼란스러운 낙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경마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마네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시한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만 해줌으로써 빛과 속도와 운동감의 인상들을 포착하길 원했다. 말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질주하고 스탠드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이 밀레는 마네가 형태를 재현함에있어 얼마나 그의 지식에 영향 받기를 거부했는가 하는 사실을 훨씬 더 명확히 알려준다. 그가 그린 말들 중 어느 것도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장면을 순간적으로 힐끗 볼 때 네 개의 다리가 다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네와 손을 잡고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협력한 화가들 중 르아브르(Le Havre)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다름아닌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였다. 친구들을 종용해서 모두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素材) 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모네였다. 그는 옥외에서 작업하기에 좋은 스튜디오 용 작은 배를 한 척 가지고 있었기에 강가의 풍경이 지니는 분위기와 효과들을 탐색하는 작업이 가능했다. 그를 만나러 찾아온 마네는 자기보다 연하인 이 젊은이의 건실한 방법에 확신을가지게 되었고, 작은 배에서 작업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를 그려줌으로써 자신의

우정을 표현했다.

도판 337 에두아르 마네, <배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1874, 캔버스에 유채, 82.7x106cm, 뭰헨 노이에 피나코텍

도판 337 동시에 이 작품은 모네에 의해 주장된 새로운 방법의 실험작 이기도 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안이한 제작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 혹은 '모티프'는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수면에 파장을 일으킬 때 시시각각 변화한다. 대상의 순간적인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예전의 대가들처럼 갈색 바탕 위에 겹겹이 덧칠하는 것은 물론, 색채들을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 방식이었다. 심지어 마네가 그의 초상화나 인물 그림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모네 주변의젊은 풍경화가들은 그들의 비정통적인 회화가 '살롱 전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1874년 함께 모여 어느 사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전시회에는 <인상 : 해돋이>라는 제목이 달린 모네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아침 안개를 통해 드러나는 항구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모네가 그린 파리의 철도역 그림은 비평가들에게 아주 불성실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도판 338 클로드 모네, <파리의 생라자르 역>, 1877, 캔버스에 유채, 75.5x104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도판 338 모네의 이 작품에는 바로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인상'이 담겨 있다. 모네는 철도역이라는 공간을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로서 여기고 흥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김 위로 유리 지붕을 통해 흘러드는 빛의 효과와 그러한 혼란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기관차와 객차의 모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가에 의해 목격된 이 장면에는 되는 대로 처리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네는 과거의 어느 풍경화가 못지 않게 신중한 솜씨로 색조의 균형을 이루어냈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원리들을 풍경화에만 적용시킨 것이아니라 실제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도판 339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모도회>, 1876,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도판339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 1841-1919)1876년에 그린 야외 무도회의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 술렁이는 인파에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모네의배를 그린 마네의 그림과 비교해보아도 이 그림은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스케치 같아 보인다. 화면 전경에 있는 몇몇 인물들의 머리 부분들만이 꽤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편이지만 그것도 매우 대담하고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려져 있다. 전경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눈과 이마는 그늘 속에 있는 반면, 입 주위와 턱 부분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다. 그녀의 밝은 드레스는 프란스 할스나 벨라스케스가 구사했던 것보다도 더 대담하고 자유스러운 붓질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들이 바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인상주의 운동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no : 1830-1903)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는데,

도판 340 카미유 피사로, <이탈리아 거리, 아침 햇빛>, 1897, 캔버스에 유채, 73.2x92.1cm, 워싱턴 국립 박물관, 체스터데일 콜렉션

도판 340과 같은 그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묻곤 했다.

"만일 내가 이 거리를 걷고 있다면 나도 이렇게 보이는가? 두 다리는 물론이고 눈, 코가 없어지고 형태도 알 수 없는 작은 점들로 보인단 말인가?"라고 실제로 그들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에 대한 판단을 방해한 것은 인체에는 어떠어떠한 부분들이 속해 있다'고 하는 기존의 지식이었던 것이다.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색점 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이 미술가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에 대한 감회는 실로 가슴 벅찬 것 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조소와 적의를 보상해주고도남음이 있었다. 갑자기 세계 전체가 회화를 위한 적절한 주제들을 제공하였다. 색조의 아름다운 조합, 색채와 형태들의 흥미로운 구성, 태양과 그늘진 응달의 즐거운 조화 등을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장소에서라도 미술가는 이젤을 세워놓고 그가 받은 인상을 캔버스 위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품위 있는 주제' '균형 잡힌구도''정확한 소묘' 니 하는 과거의 낡아빠진 허깨비들은 이제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제 미술가들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어 오직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인상주의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돌이켜볼 때 이 젊은 화가들의 관점이 저항에 부딪쳤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관점들이너무 금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사실이 더욱 놀랍다. 비록 그러한 투쟁이 치열해서 관련된 미술가들은 너무 힘겨웠겠지만, 인상주의자들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었다. 최소한 이러한 젊은 반항아들 중 몇몇 특히 모네나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은 운좋게도 승리의 결실을 즐기며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공공(公共) 컬렉션에 포함되고 부자들이 탐내는 소유물이 되가는 것을 목격했다. 게다가 이러한 변화는미술가들과 비평가들에게 똑같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들을 비웃었던 비평가들은 결과적으로 큰 오류를 범했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로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야심적으로 찾아나가도록 협력해준 조력자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일본의 미술은 중국 미술의영향을 받아 발전하면서 약 1000년 동안 지속해왔다. 그러나 아마도 유럽판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18세기의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들을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일본 판화의 거장인 호쿠사이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 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도판 341, 우타마로는 판화 가장자리나 대나무 발로 인해 잘려나간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도판 341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우물 뒤로 보이는 후지 산>, 1835, 목판화, '후지산의 100' 중의 하나, 22.6x15.5cm

아래 도판 342 처럼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과감하게 무시한 점이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에서 시각에 대한 고대의 지배적인 지식이 잔존해 있음을 발견해냈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도판 342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자두꽃 만발한 경치를 보려고 발을 걷어올리는 정경>, 1790년대 말엽, 목판화, 19.7x50.8cm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화가는 다름 아닌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였다. 드가는 모네나 르누아르보다는 다소 나이가 많았다. 그는 마네와동년배였고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였지만 그 그룹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열렬히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앵그르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초상화 (아래 도판 343) 에서 드가는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이것은 또한 그 가옥외 장면보다도 발레 장면을 주제로 선택하기 좋아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발레연습 장면을 지켜보면서 드가는 매우 다양한 자세와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신체를바라볼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의 무대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소녀들이 춤추고 쉬는 모습을 보고 인체에 입체감을 주는 무대 조명의 효과와 미묘한 단축법을 연구하곤 했다. 도판 344는 드가에 의해 그려진 파스텔 소묘 중 하나이다. 얼핏 보기에도 구도가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무희들 중 몇몇은 다리만 보이고 또 다른 몇몇은 몸만 보인다.

도판 343 에드가 드가, <앙리 드가와 그의 조카딸 뤼시>, 1876, 캔버스에 유채, 99.8x119.9cm, 시카고 아트 미술 연구소

로댕은 곧 저명한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당시의 어떤 미술가에 비교해보더라도 커다란 대중적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작품도 비평가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되었으며 인상주의 반항아들의 작품과 함께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우리가 그의 초상 조각들 중 하나 도판 345만 보아도 분명해질 것이다.

도판 345 오귀스트 로댕, <조각가 쥘 달루>, 1883, 청동, 높이 52.6cm, 파리 로댕 박물관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그도 '마무리' 된 외간을 혐오했다. 그들처럼 로댕도, 자신의 작품을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형상이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의 이러한 행위는 순전히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면 비정상적인 기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반감은 틴토레토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작품의 완성이란 여전히 모든 것이 깔끔하고 매끄러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물의 창조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에 대한 그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도판 346 로댕은 이러한 쓸데없는 인습들을 무시함으로써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주장했던 렘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 누구도 그의 작품 제작 절차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인상주의를 얼마 안되는 프랑스의 찬미자들 무리 밖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길을 터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도판 346 오귀스트 로댕, <신의 손>, 1896년경, 대리석, 높이 992.9cm, 파리 로댕 박물관

전 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와 접촉하였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복음을 가장 영향력있게 행사한 사람은 바로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 1834-1903)였다. 휘슬러는 새로운 운동의 첫 번째 투쟁에 참가했는데 1863<낙석전>에 마네와 함께 출품했다. 또한 그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는 드가나 로댕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인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주된 관심사는 빛과 색채의 효과에 있다기보다는 미묘한 색면의 구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파리의 화가들과 공유했던 점은 일반 대중이 감상적인 일화에 보여주는 관심을 경멸했다는 데 있다. 그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고, 그것을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휘슬러의 유명한 작품 중 가장 뛰어나고 아마도 가장 대중적 인기를 누린 작품은 그의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일 것이다. 도판 347 휘슬러는 1872년 이 작품을 전시했을 때 <회색과 검정색의 구성>이라는 특이한 제목을 붙였다. 그는 '문학적인' 관심이나 감상적인 어떤 단서도 제시하기를 꺼려했다. 실제로 그가 목표로 한 형태와 색채의 조화는 주제가 주는 느낌과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도판 347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 1871, 캔버스에 유채, 144x162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이 그림에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단순한 형태들 사이의 조심스런 균형이다. 그리고 부인의 머리와 드레스로부터 벽과 배경에까지 배열된 '회색과 검정색'의 가라앉은 색조는 이 그림이 대중적인 공감을 얻도록 한 체념적인 쓸쓸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1877년에 휘슬러는 일본풍의 야경화(夜景畵)들을 야상곡 도판 348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작품 하나에 이백 기니(guinea)를 매겼다.

도판 348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 오래된 배터시 다리>, 1872-5년경, 캔버스에 유채, 67.9x50.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휘슬러는 예술적 감각만이인생에서 진지하게 논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노력했던 이른바 '심미주의(審美主義) 운동' 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19세기가끝날 무렵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노레 도미에, <낙선한 화가의 분노 : 게다가 내 그림을 낙선시켰어, 무식한 바보들 같으니!>, 1859, 석판화, 22.1x27.2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