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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30

11.귀족과 시민 : 14세기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당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은 14세기와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그것은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일어났던 커다란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그들 자신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2023. 2. 22.
10. 교회의 승리 : 13세기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을 비잔틴 미술 및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유럽과 심각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또 그것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으나 서유럽은 이런 불변성을 전혀 몰랐다.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미술가들이 교회에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들의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참신한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볼품없는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딕(Gothic) 양식의원리였다. .. 2023. 2. 15.
9.전투적인 교회 : 12세기 연대(代)는 역사라는 태피스트리를 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못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1006년이라는 연대(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한 해 -역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점으로 미술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영국에는 색슨 시대의 건물들 중에서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유럽에도 그 시기의 교회가 잔존하는 예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영국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제들과 귀족들은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건물들을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Noman)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 2023. 2. 7.
8.혼돈기의 서양 미술: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우리는 이제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까지,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데 형상(形象)이 유용하다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칙령이 받아들여진 6세기 까지의 서양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초기 기독교 시대를 뒤이은 시대, 즉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 시대라는 명예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암흑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 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바가 거의 없다.. 2023. 1. 31.
7.동방의 미술 : 2세기 ~ 13세기까지 : 이슬람과 중국 유럽의 미술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이 수 백년간의 격동기에 세게의 다른 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황들을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세기와 8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휩쓸어버리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금기라고 해서 예술을 그렇게 쉽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알함브라 궁 (도판 90)의 중정과 통로를 거닐며 무진장한 각.. 2023. 1. 27.
6.기로에 선 미술: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311년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대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능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 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 2023. 1. 25.
5. 세계의 정복자들: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도시였던 품페이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로마 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 위에 그들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인들이었으며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복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도 어느 정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으며, 거기에 따라 방법을 채택해야 했다. 로마 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마도 토목 공학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도로나 수로, 공중 목욕탕 등에 관해 잘 알고 있다. 폐허가 된 이.. 2023. 1. 24.
4. 아름다움의 세계—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은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사이의 백 년 동안에 일어났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서 미술가들은 그들의 실력과 숙련됨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으며 일반인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어쩌면 속물 같은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미술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미술 유과 들의 업적을 비교했다. 말하자면 각 도시 국가들의 대가들에 따라 다른 다양한 방식과 양식 및 전통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러한 유파들 사이의 비교와 경쟁이 미술가들을 자극해서 더 많은 .. 2023. 1. 23.
3.위대한 각성-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 그리스 오리엔트 전체 군주들의 통치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미술 양식이 생겨난 곳은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렬하여 강에 연해 있는 땅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러한 양식들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국들과 인접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과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들의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보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들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이 지역들은 한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들은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면서 무역이나 선상 강도질을 해서 얻은 엄청난 재화를 성이나 항구에 축적해 놓고 있는 모험적인 뱃사람이나 해적왕 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Creta) 섬으로 크레타의 왕은 한.. 2023.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