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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7.동방의 미술 : 2세기 ~ 13세기까지 : 이슬람과 중국

by 2mokpo 2023. 1. 27.

유럽의 미술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이 수 백년간의 격동기에 세게의 다른 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황들을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세기와 8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휩쓸어버리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금기라고 해서 예술을 그렇게 쉽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알함브라 궁 (도판 90)의 중정과 통로를 거닐며 무진장한 각양 각색의 이러한 장식적인 문양에 감탄하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된다

▲90 <이슬람 궁전, 그라나다 알함브라에 있는 사자궁>, 1377년 건축, 스페인

 

회교권 밖에서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중동의 양탄자 (도판 91)를 통해서 이러한 신비한 문양들에 친숙하게 되었다

▲91 <페르시아 양탄자>, 17세기 제작,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후기의 몇몇 회교 종파들은 형상의 금지라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덜 엄격했다. 종교에 관계가 없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인체와 삽화를 그리는 일이 허용되었다. 14세기 이후의 페르시아의 그 뒤에 무굴(Mogul) 왕조 때의 인도에서 제작된 연애나 역사, 우화 등을 묘사한 삽화들은 당시의 화가들이 문양의 디자인에만 국한되었던 훈련에서 배운 바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준다

15세기 페르시아의 연애 이야기에서 따온 달빛 아래 정원의 정경 (▼도판 92)은 이 놀라운 솜씨의 완벽한 표본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동하의 세계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는 비잔틴 미술에서처럼 사실적인 현실 공간의 묘사가 거의 없다. 어쩌면 더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단축법도 없고, 명암이나 인체의 구조를 암시하려는 시도도 전혀 없다. 인물과 초목들은 마치 색종이에서 오려내 완전한 문양을 만들기 위해서 화면 전체에 고루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화가가 실제 광경을 실감나게 그리는 것보다 그 책에는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마치 본문을 읽듯이 이런 그림을 읽을 수 있다.

▲92 <페르시아 왕자 후마이가 중국의 공주 후미윤을 공주의 정원에서 만나는 장면>, 1430-40년경, 페르시아 필사본에 실린 세밀화, 파리 장식미술관

 

중국에서는 종교가 미술에 끼친 영향이 이슬람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매우 일찍부터 청동의 주조 기술에 뛰어났으며 고대의 청동 제기(祭器)들 중에는 기원전 천년 또는 그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중국 미술의 기원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회화와 조각에 관한 기록은 이 제기들처럼 오래되지는 않았다.

1세기를 전후해서 중국에서는 어딘가 이집트인들을 연상시키는 매장 풍습이 생겨났는데 그 묘실에는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생활과 풍속을 반영하는 생생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도판 93). 

▲93 <연회도>, 150년경, 중국 산동성 무량사 무덤의 부조에서 탁본

 

이미 그 당시에 우리가 전형적인 중국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발견되었다. 중국 미술가들은 딱딱하고 모가 진 이집트 식 표현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더 선호 했다. 날 뛰는 말을 묘사해야 할 때 중국 미술가는 그것을 여러 개의 둥근 형태에서 만들어내는 것 같이 보인다

중국 조각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뒤틀리고 구부러진 것같이 보이지만 결코 확고부동함과 견고함을 잃지 않는다 (도판 94). 

▲94 <날개 달린 동물>, 523년경, 소수 묘의 석수, 중국 장쑤 성, 남경 부근

 

중국 위대한 사상가들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미술을 과거의 황금시대에 있었던 도덕의 위대한 모범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옛날 두루마리 그림책 중에는 유교 정신에 따라 쓰여진 덕망 있는 여인들의 훌륭한 모범을 모아 놓은 것이 있다. 그것은 4세기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여사잠도(女史箴圖)> 이다

도판 95는 남편이 부인을 부당하게 나무라는 장면인데 우리가 중국 미술을 볼 때마다 느끼는 위엄과 우아함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가정 안에서의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인 만큼 이 그림의 몸 동작과 배열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더욱이 이 작품은 이 중국 화가가 운동감을 표현하는 어려운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초기의 중국 그림에는 딱딱한 부분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은 물결치는 듯한 선이 화면 전체에 운동감을 불어 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95 <부인을 나무라는 남편>, 400년경, 비단 두루마리 그림의 부분, 고개지의 <여사잠도>를 복제한 것으로 추정, 런던 대영박물관

그러나 중국 미술을 가장 힘있게 작그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이와는 다른 종교, 즉 불교의 영향이었다. 불교의 승려나 고행자들은 가끔 놀랄 만한 사실적인 조상으로 표현되었다 (도판 96). 여기에서도 우리는 귀와 입술, 볼의 윤곽을 이루는 곡선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곡선들이 실제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원시인들의 가면 (p. 51, 도판 28)의 오래된 원칙들이 이처럼 호소력 있는 얼굴의 표현에도 다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96 <나한상>, 1000년경, 실물 크기의 유약 바른 테라코타, 중국 하북성 이현 출토

불교가 중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단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공해준 데서 그치지 않았다. 불교는 그림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을 받은 시인(詩人)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동양의 종교는 올바른 영상, 즉 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명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해 그것을 마음속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동일한 신성한 진리를 여러 시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하여 그 본체를 상실함이 없이 모든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정신적 훈련으로 서양 사람들이 육체적인 운동이나 스포츠에 부여하는 것 보다 도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어떤 승려들은 단 하나의 문구를 몇일 동안이나 조용히 앉아서 그들의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명상하고 그 문구의 전후에감추어져 있는 적막에 귀를 기울인다. 또 어떤 승려들은 자연의 사물에 대해서, 예를 들면 물에 대해서 명상하며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운다. 물이란 얼마나 겸허한가. 물은 비켜서 흐르지만 단단한 바위를 닳아 없어지게 하지 않는가. 물은 얼마나 맑고 차갑고 또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가. 그리고 목말라하는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는가. 혹은 산에 대해서 산이란 얼마나 강하고 의연하며 또 그 위에나무들이 자라게 해주니 그 얼마나 착한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종교 미술은 중세의 기독교 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의 전설이나 중국 사상가들의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은 어떤 특수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경의 염()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단 두루마리에 그린 이런 그림들은 아름다운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가 조용한 시간에 꺼내어 마치 시집을 들고 아름다운사를 음미하듯 펼쳐서 감상되거나 음미되곤 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중국 산수화의걸작들이 의도했던 바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아마도 옛날 중국인들이 육체적인훈련의 기술을 몰랐던 것 이상으로 명상하는 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참을성도 없는 유럽인으로서는 그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판97과 같은 작품을 오랫동안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것이 그려진 정신과 그것이 전달하려는 높은 목적에 관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실제의 풍경화를 그린 것이나 명소의 그림엽서 같은 것을 보게 되리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예술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먼저 그들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소나무''바위', '구름' 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이런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여행길에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 마치 시인이 산책을 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짜 맞추어 시를 짓듯이, 소나무와 바위와 구름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들을 한데 결합하여 그 분위기를 다시 화면에 재현하려고 했다.

▲97 마원 <일과 후 춤추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농부들>, 1200년경, 비단에 먹물과 물감

중국인들은 그림에서 세세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현실 세계와 비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림 속에서 미술가의 감흥이 가시화된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판 98과 같이 구름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몇 개의 산봉우리들로 구성된 대담한 필치의 작품은 유럽인들로서는 감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 자신을 화가의 입장에 놓고 그가 이들 당당한 산봉우리들을 보고 느꼈을 경외감을 같이 느껴보려고 노력한다면, 푀소한 중국인들이 미술에서 제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8 고극공(高克恭)으로 추정, <우산도(雨山圖)>, 1300년경. 족자, 종이에 먹물, 122.1 x 81.1 cm,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

 

연못 속에서 노니는 세 마리 물고기를 그린 그림 (▼도판 99)은 화가가 이 단순한 소재의 그림을 그리는 데 쏟아 부었을 끈기 있는 관찰과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보인 유유자적한 운필의 숙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중국의 미술가들이 얼마나 곡선을 좋아 했으며 또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곡선의 효과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형태들은 명확한 대칭적 구도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페르시아의 세밀화에서처럼 화면 전체에 고루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고기들은 대단히 정확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이런 그림은 오랫동안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번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다.

자연에서 몇 개의 단순한 주제를 선정해서 그것을 절도 있게 전개시키는 중국 미술의 방법은 경탄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회화에 대한 사고방식 에도 위험이 수반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대나무를 그린다든가 또는 험준한 바위를 그리는 필치의 모든 유형이 공식(公式)으로 정해지고 전통에 의해서 고정되어 과거의 작품만을 지나치게 찬양한 나머지 미술가들은 점점 더 그들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중국과(중국의 화론을 따른) 일본에서는 회화의 수준이 계속 상당히 높아졌으나 마치 세련되고 까다로운 놀음도 그 술수가 알려져서 흥미를 잃듯이 예술도 점점 더 그런 식으로 되어갔다. 그러다가18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미술의 업적을 새로 접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 미술가들은 새로운 주제에 이러한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들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실험이 서양에 처음 알려졌을 때 그것이 서양 미술에 얼마나 값진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99 <세 마리의 물고기>, 유채의 작품으로 추정, 1066-85년경, 화첩, 비단에 먹물과 물감, 22.2 x 22.8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히데노부, <대나무를 그리고 있는 일본 소년>, 19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 채색 목판화, 13 x 18.1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