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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5. 세계의 정복자들: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by 2mokpo 2023. 1. 24.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도시였던 품페이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로마 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 위에 그들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인들이었으며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복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도 어느 정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으며, 거기에 따라 방법을 채택해야 했다. 로마 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마도 토목 공학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도로나 수로, 공중 목욕탕 등에 관해 잘 알고 있다. 폐허가 된 이러한 건물들은 아직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로마의 거대한 기둥들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마치 자신이 개미처럼 왜소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로마는 위대했다 (the grandeur that was Rome)'라는 것을 후대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해준 것은 바로 이러한 유적들이었다

이러한 로마 건축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콜로세움 (colosseum, 도판 73)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경기장일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많은 찬탄을 불러 일으킨 로마의 특징적인 건축물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실용적인 구조물로서 내부에 광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람석을 받쳐주는 층층이 쌓아올린 세 단의 아치(arch)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의 건축가는 이 아치들의 정면에 일종의 그리스 식 칸막이 벽을 세웠다. 사실 도리아 식의 변형으로서 메토프와 트리글리프 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은 이오니아 식이고, 3층과 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半圓柱)이다.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 형식, 또는 '그리스 기둥 양식들'과의 결합은 그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주위의 도시를 둘러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영향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73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 80년경, 로마

그러나 로마 인이 그들의 제국 전역에, 즉 이탈리아, 프랑스 (도판 74),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세운 개선물들보다 더 영원한 인상을 남긴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 건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유니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콜로세움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개선문에서는 기둥 양식을 사용해서 중앙의 큰 입구를 프레임 (frame)하여 강조하고, 양 옆의 약간 작은 두 개의 문이 중앙의 큰 문을 장식한다. 그것은 음악에 화음이 사용된 것과 같이 건축 구성에 사용된 배열이었다.

74 <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14-37년경, 남부 프랑스, 오랑주

그러나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다리나 수로의 기둥들 사이를 아치로 연결시킬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이런 방식을 사용해서 궁륭(穹窿, vault)으로 된 천장을 만들 수도 있었다. 로마 인들은 여러 가지 기술적인 고안에 의해서 궁륭을 만드는 예술의 위대한 전문가들이 되었다. p119

이러한 건물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것은 <판테온 (Pantheon)>이라 불리는 만신전 (萬神殿)이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예배의 장소로 남아 있는 고전 시대의 유일한 신전이다. 아 신전은 기독교 초기에 교회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황폐화되지는 않았다. 그 내부 (도판 75)는 궁륭형 천장과 그 꼭대기에 하늘을 볼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 거대한 둥근 방이다. 다른 창문은 하나도 없으나 실내 전체가 위로부터 풍부하고 고른 빛을 받아들인다. p121

75 <로마의 판테온 내부>, 130년경, 18세기 화가, G. P. 판니니의 그림

그들이 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肖像)이었다. p121

베스파시아누스 (Vespasoanus) 황제의 흉상 (도판 76)에는 아첨기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를 신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마치 돈 많은 은행가나 선박 회사의 사주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 초상들에는 자질구레한 구석이 없다. 어쨌든 미술가들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실물 같은 초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p121

76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80년경, 대리석,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로마 인들이 미술가들에게 맡겼던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제는 우리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배운 관습을 부활 (p. 72, 도판 45)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인드 역시 그들의 승전을 선포하고 그들의 전투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예를 들면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는 다키야 (지금의 루마니아)에서의 전쟁과 승리를 모두 그림으로 보여주는 연대기를 새긴 거대한 원형 기둥을 세웠다. p121~p122

77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비>, 114년경, 로마

여기에서 우리는 침략하여 싸우고 정복하는 로마의 군단 (▼도판 78)을 볼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그리스 미술이 이룩해낸 모든 기술과 업적이 전쟁을 보고하는 이 공적에 구사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본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훈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세부의 정확한 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적이 이제는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에 있지 않았다. 로마 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시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78 도판 077의 세부, 다키아 군과의 전투,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두 명의 부관이 잘린 적의 머리를 바치고 있다.

 

그리스도 탄생 이후 수백 년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의 미술은 오리엔트 미술을 그 본거지에서조차 완전히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았다

이집트인들은 그때까지도 그들의 시신을 미이라로 매장했으나 이집트 식으로 그들의 형상을 거기에 덧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그리스 초상화 (▼도판 79)의 온갖 기교를 알고 있는 미술가로 하여금 초상을 그리게 했다. 미천한 장인들이 헐값으로 그렸음이 분명한 이 초상화 들은 그 생생함과 사실성에 있어서 아직도 우리를 감찬하게 만든다. 이들처럼 참신하고 '현대적'으로 보이는 고대의 미술 작품은 매우 드물다. p124

79 <한 남자의 초상>, 100년경, 이집트 하와라에서 출토된 미이라의 관에서 나옴, 밀랍 바탕 위에 채색, 33 X17.2 런던 대영박물관

 

인도의 조각 미술은 헬레니즘의 영향이 이 나라에 미치기 오래 전부터 번성했으나 후기 불교 미술의 전형이 된 불상이 처음 부조로 만들어진 것은 간다라(Gandhara)는 변경 지방에서 이다. 도판 80'위대한 출가"라고 불리우는 불교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젊은 왕자 고타마(Gautama)는 광야에서 한 사람의 은둔자가 되기 위해서 그의 부모의 왕궁을 떠나고 있다. 그는 그의 애마(愛馬) 칸타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칸타카야, 오늘밤 나를 다시 한번만 태워주렴. 내가 네 도움으로 부처가 된다면 나는 신들과 인간의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리라." 만약에 칸타카가 큰 소리로 울었든지 발굽으로소리를 냈다면 도시 전체가 깨어나서 왕자의 출발이 발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신들은 칸타카의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말이 발을 옮겨놓을 때마다 그들의 손을 말발굽 밑에 놓았다.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긴 들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 깊은 사색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초기의 불상(도판 81)도 간다라라는 변경 지방에서 만들어졌다.

80 <출가하는 고타마(석가모니)>, 2세기경, 파키스탄(고대의 간다라) 로리안 탕가이에서 출토, 검정색 편암에 새긴 부조, 48 x 54cm, 캘커타 인도 박물관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 깊은 사색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초기 불상 (▼도판 81)도 간다라라는 변경 지방에서 만들어졌다.

81 <석가모니 두상>, 4-5세기경, 아프가니스탄(고대의 간라라) 하다에서 출토, 석고상에 옅은 채색, 높이 29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그러나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 실제로 유태교의 율법은 우상 숭배를 경계하여 형상(形象)의 제작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도시에 있는 유태 식 민지에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회당의 벽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림들 중의 하나가 최근에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라고 불리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한 작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위대한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기원후 3세기에서 유래하는 흥미 있는 자료이다. 양식이 서툴러 보이고 장면이 비교적 평면적이며 치졸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도판 82). 이 그림은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82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는 모세>, 245-56년경, 시리아의 고대 도시 두라에우로포스(메소포타미아)의 유태교 회당의 벽화

 

기독교 미술가들이 그들의 구세주와 사도 들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그들을 도와준 것은 역시 그리스 미술의 전통이었다. (▼도판 83)는 기원후 4세기경에 나온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 상이다. 여기에 보이는 그리스도는 후세의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수염이 달린 인물이 아니라 젊은 미남으로 표현되어 그리스의 위엄 있는 철학자들처럼 보이는 성 베드로 와 성바오로 사이의 왕좌에 앉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러한 표상이 기독교에서 보면 이교적인 헬레니즘 미술의 방법과 아직도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부분이 있다. 즉 그리스도가 하늘 위의 왕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조각가는 그리스도의 두 발이 고대의 천신이 높이 떠 받치고 있는 창공의 천개 위해 놓여 있게 제작한 것이다.

83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거느린 그리스도>, 389년경, 대리석 부조, 유니우스 밧수스의 석관의 일부, 로마 성 베드로 성당 납골소

 

기독교 미술의 기원은 이것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주 초기의 기념물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묘지인 로마의 지하 묘굴(catacomb)에 최초로 그림을 그려야 했던 미술가들은 이와 대단히 유수한 정신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기원후 3세기경에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도판 84)과 같은 그림은 이들 미술가들이 폼페이에서 사용되었던 헬레니즘 시대의 화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화가들은 몇 안되는 거친 붓 자국으로 인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효과와 기술이 그들의 흥미를 별로 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의 주요 목적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을 증명해주는 예 중의 하나를 상기 시켜주는 것이다.

84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3세기, 프리스킬라 지하묘굴의 벽화, 로마

 

지하 묘굴의 그림을 그렸던화가처럼 그들은 거칠고 손쉬운 방법, 예를 들면 얼굴이나 신체의 주요한 양상을표시하는 데 기계적인 드릴을 사용했다. 흔히 이 무렵에 고대 미술이 쇠퇴했다고들 말한다. 찬란했던 시대에 개발된 기법상의 많은 법칙들과 예술적인 신비가 전쟁과 반란, 침략이라는 사회 전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상실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이 뒤떨어졌다는 것만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요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기원후 4세기와 5세기의 초상 조각들은 이러한 미술가들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도판 85). 프락시텔레스시대의 그리스 인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들은 조잡하고 야만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머리 부분은 어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아름답다고

는 할 수 없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초상 조각(p. 121, 도판 76)과 같이 놀라울정도로 실물을 닮은 작품에 익숙한 로마 인들은 이러한 작품들은 솜씨가 빈약하다고 퇴자를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 인물상들은 그 나름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이며, 용모의 특징을 강조하고 눈 언저리나 이마의 주름살 등을 표현하는 데 신경을 쓴 것을 보면 대단히 강렬한 표현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들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기독교의 대두를 눈으로 보았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85 <아프로디시아스의 한 관리의 초상>, 400년경, 대리석, 높이 178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물감통과 이젤을 옆에 두고 앉아 '장례용 초상화'를 그리는 제작소의 화가>. 100년경. 크리미아에서 출토된 석관에 그려진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