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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6.기로에 선 미술: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by 2mokpo 2023. 1. 25.

311년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대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능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 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고 고전기에 '바실리카 (basilic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 바실리카란 대충 '큰 회당'이라는 뜻이다. 133 쪽

 

초기의 바실리카들 중에 변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이래로 천오백 년 동안에 이루어진 변형과 개수(改修)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건물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는 있다 (도판 86). 133쪽

86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 산 아폴리나레 교회당>, 530년경, 라벤나 클라세

이러한 바실리카를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형상(形象)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돼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134쪽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그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주었다. 즉 많은 신도들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형상들이 마치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에 있는 그림들처럼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했다. 135쪽

 

▼도판 87은 이러한 원칙이 매우 일관성 있게 적용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5백 년경 당시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거대한 항구이자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한 바실리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 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려면 아마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에 많은 군중들을 등장시켜 이 이야기를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라벤나의 대가는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그의 작품은 능숙한 붓의 획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풍부하고도 심오한 색채를 발산하는 돌이나 유리 입방체들을 꼼꼼히 짜 맞춘 모자이크(mosaic)로 교회의 내부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주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은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p135

87 <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라벤나

교회에 있어서 미술의 정당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유럽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일명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둔 동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 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이 라틴 계 교황의 지배를 거부한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교회 중의 일파(一派)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모든 형상에 대해 반대했다.

이들을 성상 파괴주의자 또는 우상 파괴자라고 불렀다. 이들이 754년 득세한 뒤로동로마 교회에서는 모든 종교적인 미술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에게는 그러한 형상이 단지 유익할 뿐만 아니라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견해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논거들은 그들의 반대파가 사용했던 것만큼이나 미묘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자비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형상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결심했다면 어째서 그와 똑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꺼려했겠는가? 우리는 이교도들처럼 형상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런 변명의 논리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미술사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파()가 백 년 동안 억압을 받다가 다시 득세하게 되자 교회 내에서의 회화는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도 같은 것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림들은 초자연의 세계를 신비스럽게 반영하는 것으로 우러러보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동로마 교회는 미술가들이 그들의 상상에 따라서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할 수가 없었다. 성모의 참된 성상 즉 '이콘(icon)'으로 인정 될 수 있는 것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어떤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에 의해서 신성시된 그런 틀에 박힌 유형이었다.

 

이리하여 비잔틴 사람들은 전통의 준수에 있어서는 이집트인들처럼 엄격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비잔틴 교회는 성상을 그린 화가에게 고대의 모델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 함으로써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짓의 묘사에 사용된 그런 유형들에 관한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8쪽

 

▼도판 88의 성모상과 같은 비잔틴 제단화를 보면서 그것이 그리스 미술의 업적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옷 주름이 몸 전체를 감싸고 팔꿈치와 무릎에서 방사선 처럼 퍼져나가는 방식이라든가 그림자가 지게 하여 얼굴과 손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방법, 더 나아가 성모 의 옥좌 부분의 묘사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비잔틴 미술은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서유럽 미술보다도 더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나 성모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허용된 범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비잔틴 미술가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자질을 개발하기는 어려웠다. 138쪽

88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1280년경, 제단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 목판에 템페라, 81.5 x 49cm, 워싱턴 국립미술관(멜론 컬렉션>

 

중세의 발칸반도 나 이탈리아에서 이 그리스 미술가들이 제작해 놓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면 이 동방 제국이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장려함과 엄숙함을 어느 정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권능을 찬양하는데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8쪽

 

▼도판 89는 이 같은 미술이 보는 사람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지를 입증 해주는 좋은 예이다. 이 그림은 1190년 직전에 비잔틴 장인들이 장식한 시칠리아의 몬레알레 (Monreale) 성당의 후진(apse)이다. 시칠리아 섬은 라틴 계인 서 로마 교회에 속해 있었다. 창문 양쪽에 늘어선 성인상들 중에서 성 토머스 베켓의 최초의 초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설명한다. 138쪽

 

약 이십 년 전에 베켓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그 당시 유럽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성인들을 선택했다는 점 이외에는 이들 미술가들은 비잔틴의 토속적인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 성당에 모여든 신자들은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고 있는 우주의 통치자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장엄한 모습을 대면하고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 아래에는 마치 왕비처럼 옥좌에 앉아 양 옆에 대천사와 성인들의 장엄한 열에 둘러싸인 성모의 상이 그려져 있다.

89 <우주의 통치자인 그리스도, 성모와 아기 예수 및 성자들>, 1190년경, 비잔틴 미술가들이 몬레알레 대성당의 후진에 제작한 모자이크, 시칠리아

 

황금색의 번쩍이는 벽면으로부터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이러한 형상들은 거기에서 떼어낼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일 만큼 완벽한 기독교적 진리의 상징들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런 형상들은 동로마 교회가 지배하는 모든 나라에서 계속 군림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의 성상, '이콘'은 아직도 비잔틴 미술가들의 위대한 창조를 반영하고 있다. 141쪽

<그리스도 상을 지우고 있는 비잔틴 성상 파괴론자>, 900년경에 그려진 비잔틴 필사본 <흘루도브의 시편>의 한 페이지, 모스크바 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