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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3.위대한 각성-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 그리스

by 2mokpo 2023. 1. 22.

오리엔트 전체 군주들의 통치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미술 양식이 생겨난 곳은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렬하여 강에 연해 있는 땅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러한 양식들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국들과 인접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과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들의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보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들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이 지역들은 한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들은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면서 무역이나 선상 강도질을 해서 얻은 엄청난 재화를 성이나 항구에 축적해 놓고 있는 모험적인 뱃사람이나 해적왕 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Creta) 섬으로 크레타의 왕은 한때 이집트에 사신을 보낼 만큼 부유하고 강했으며 크레타의 미술은 그곳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도판 46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관을 놓는 대 위에 누워 있으며 좌우에서 울부짖는 여인들은 원시 사회 추도식의 풍습처럼 애도의 의식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다.

46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광경>, 기원전 700년경, '기하학적 양식'의 그리스 도자기, 높이 155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그리스 미술가들이 돌을 가지고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하였다.

 

도판47 아르고스의 폴리메데스 <두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이러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아티카(Attica)의 아테네(Athens)는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여기에서 미술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혁명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리스에 최초의 석조 신전 들이 세워진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 고대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가들은 그들 특유의 표현 방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그들 선조의 미술을 본받으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배운 신성한 규칙들을 엄수 하려고 했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돌을 가지고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하였다.

47 <아르고스의 폴리메데스 두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기원전 615-590년경, 대리석, 높이 218, 216cm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도판 47<두 형제상>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신체의 각 부분과 근육을 구분하는 방법을 이집트 양식에서 배웠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입상들은 이것을 만든 조각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공식만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도판 48 <장기를 두고 있는 아킬레스와 아이아스>

기원전 6세기에 그려진 초기의 화병들에는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여러 화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도판 48).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두 영웅인 아킬레스와 아이아스가 막사 안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눈은 정면에서 보는 것으로 그려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체는 이제 이집트 방식으로 그려져 있지 않으며 팔과 손도 그렇게 명확하고 딱딱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이 화가는 만약에 두 사람이 이러한 방법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 실제로 어떻게 보이겠는가를 상상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이 고대의 규칙들이 깨지고 또 미술가들이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화가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발견, 즉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기원전 500년 조금 전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그리스 미술의 대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이 시기는 바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신들에 관한 오랜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편견 없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또한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 인류가 처음으로 눈을 뜬 때이며, 연극이 디오니소스(Dionysus)를 찬양하는 축제의 단계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발전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가들이 도시 국가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도시 국가의 정사를 맡고 시장에서 끝없는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던 부유한 그리스의 시민들은, 어쩌면 시인이나 철학자들까지도 대부분 조각가나 화가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국가에 있어서의 그들의 비중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장인들 보다는 엄청나게 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 특히 아테네는 부유한 속물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이들 보잘것없는 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 수준에 도달 했을 때는 바로 그리스의 미술이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가들이 도시 국가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도시 국가의 정사(政事)를 맡고 시장(市場)에서 끝없는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던 부유한 그리스의 시민들은, 어쩌면 시인이나 철학자들까지도 대부분 조각가나 화가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손으로 일을 했으며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했다. 그들은 땀과 때에 절은 주물(鑄物) 공장에 앉아 일반 노역자들과 같이 일을 했으므로, 교양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국가에 있어서의 그들의 비중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장인들보다는 엄청나게 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는 부유한 속물(俗物)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이들 보잘것없는 동자들도 어느 정도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바로 그리스의 미술이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후시민들은 페리클레스(Pericles)의 지도하에 페르시아 침략군이 파괴한 것들을 다시재건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성스러운 암반인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신전들이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약탈당했다. 이제 이 신전들이 대리석으로 다시 건립되었는데 그 전보다도 훨씬 더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도판 50).

50 익티노스 설계,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도리아식 신전

페리클레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고대 저술가들은 그가 당대의 미술가들을 그와 동등한 사람들로 대접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신전의 설계를 건축가 익티노스(Jktinos)에게 위임했으며 신상들의 제작과 신전의 장식은 조각가 메이디아스(Pheidias)에게 일임했다.

페이디아스의 명성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작품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없어진 작품들이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미술이 그 당시에 어떤 목적에 봉사했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우상 숭배를 얼마나 통렬하게 비난했는가를 알고 있지만 이러한 성경 구절을 어떤 구체적인 관념과 관련시켜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페이디아스가 만든 아테나 여신은 한 위대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신상의 힘은 어떤 마력에 있다기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페이디아스의 미술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성(神性)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디아스가 만든 두 걸작품인 <아테나 여신상>과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상>은 이제는 영원히 없어졌지만 그 조각상들을 안치했던 신전들과 또 메이디아스 시대에 만들어진 장식의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 올림피아의 신전은 더 오래된 것으로 아마도 기원전 470년경에 시작해서 기원전 45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이다. 아키트레이브 위의 정사각형 벽면(메토프)에는 헤라클레스의전설이 조각되어 있다. ▼도판 52는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를 따러가는 일화를 보여준다. 그 일은 헤라클레스조차도 쉽게 해낼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창공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에게 간청을 해서 대신 가서 사과를 따오도록 했는데 아틀라스는 헤라클레스가 그 동안에 그의 짐을 대신 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수락했다. 이 부조는 아틀라스가 거대한 짐을 받쳐 들고 있는 헤라클레스에게 황금 사과를 가지고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항상 헤라클레스를 재치 있게 도와주는 아테나 여신이 그의 어깨 위에 쿠션을 얹어주고 있다.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오른손에는 창이 들려져 있었다. 전체의 이야기는 놀라올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조각가가 정면이건 측면이건 간에 인물을 똑바른 자세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나는 우리를 정면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만이 헤라클레스 쪽을 향하고 있다.

52 <하늘을 이고 있는 헤라클레스>, 기원전 470-460년경, 대리석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부분, 높이 156cm,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우리는 이러한 인물상들에서 아직까지도 이집트 미술의 영향이 남아 있음을 쉽게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과 장엄한 고요함과힘이 이러한 고대의 규칙들을 잘 지킨 데서 나온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규칙들은 더 이상 미술가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신체의 구조, 즉신체의 각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하자면 주요 관절들을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옛부터 내려오는 생각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뼈와 근육의 해부학적 구조를 탐구하고 옷자락에서도 드러나 보이는 인체의 신빙성 있는 묘사를 이룩하도록 박차를 가했다. 사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옷 주름을 이용하여 인체의 이런 중요한 부분들을 표현했던 방법은 지금도 그들이 얼마나 형태에 관한 지식을 중요시했던가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처럼 찬양을 받은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이 예술의 지침과 영감을 얻기 위하여 거듭 그리스 미술의 걸작들로 눈을 돌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자주 주문을 받았던 작품의 유형은 그들에게 사실적인 인체에 대한 지식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올림피아에 있는 신전들은 신에게 바쳐진 우승한 경기자들의 조각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한 풍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운동선수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교회에 증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55 <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450년경, 미론이 만든 청동 조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155cm, 로마 국립 박물관

(▲도판 55). 이것은 젊은 경기자가 무거운 원반을 막 던지려는 순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더 큰 힘으로 던지기 위해서 몸을 굽히고 팔을 뒤로 젖히고 있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원반을 던질 것이며 몸의 회전으로 던지는 힘에 가속을 주어 원반을 날릴 것이다. 이 같은 자세가 대단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현대의 운동선수들이 이것을 모델로 해서원반을 던지는 그리스의 정확한 스타일을 배우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은 미론의 조각상이 운동 경기의 계속적 동작에서 따온 한 순간의 '정지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미론은 주로 고대의 미술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원용해서 놀랄만한 운동 효과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조각상의 앞에 서서 그 윤곽선만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것이 이집트의 미술 전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론은 이집트의 화가들처럼 몸통은 앞모습으로, 다리와 팔은 옆모습으로 표현했고, 또 그들과 같이 신체 각 부분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종합해서 한 사람의 신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손을 통해서 이 오래되고 진부한 공식이 무엇인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실감나지 않는 딱딱한 자세로 종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델 에게 비슷한 자세를 취하게 하여 움직이는 신체의 신빙성 있는 표현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원반을 던지는 데 가장 적합한 동작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제는 그 당시의 화가들이 공간을 정복했듯이 미론은 운감의 표현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의 원작품들 중에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나온 조각 작-들이 이 새로운 자유를 가장 경이적인 방법으로 반영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도판 50)은 올림피아의 신전이 완성된 지 약 20년 뒤에 완성되었는데 이 짧은 기동안에 미술가들은 신빙성 있는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자유로움과 능란한 솜씨를 습득했다. 우리는 그러한 조각가들이 누구며, 누가 신전의 장식물들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페이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아테나 상을 만든 것으로 미루어 그의 작업실에서 다른 조각품들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56 <전차 경주자>, 기원전 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프리즈 일부, 런던 대영 박물관

57 <기마 행렬>의 부분, 기원전 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프리즈 일부, 런던 대영 박물관

▲도판 56과 ▲57은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높은 곳에 연이어 있는 띠 모양의 소벽(小壁), 즉 프리즈(frieze)의 파편들인데 이는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엄숙한 축제의연례 행진을 묘사한 것이다. 이런 축제 기간에는 언제나 경주와 스포츠 시합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경주에서 말들이 질주할 때 뛰어내렸다가 다시 올라타는 위험한 시합이 있었다. 도판 56은 그와 같은 전차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부조(浮彫)는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서 이것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감상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표현의 일부가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색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밝게 돋보이도록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바탕색이 전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의 우리들 같으면 고운 대리석의 색과 결이 너무나 근사하기 때문에 감히 그 위에 색을 칠할 엄두도 못냈을 터이지만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전들까지도 빨간색과 푸른색 같은 강한 대비 색들로 칠했다. 그러나 원작품 중에 보존된 부분이 아무리 빈약하다 할지라도 그리스의 조각 작품에 관한 한 남아 있는 부분을 발견하는 순수한 기쁨을 위해서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편이 현명하다. 우리가 이 파편에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네 마리의 말들이 중첩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머리와 다리는 그래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조각가가 작품 전체의 인상을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하게 하지 않고 뼈와 근육의 구조를 얼마나 탁월한 솜씨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인물의 묘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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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에 그림을 그리는 공예가들은 다시한번 작품이 소실된 대가들의 위대한 발견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도판 58은 율리시스에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전설에 나오는 영웅 율리시스는 19년 만에 거지로 변장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보따리와 탁발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늙은 유모가 그의 발을 씻어주면서 발에 있는 눈에 익은 상처를 보고 그를 알아본다. 이 화가는 우리가 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로 이 장면을 그린 것 같다(호메로스에 나오는 유모의 이름은 이 화병에 새겨진 것과는 다른 이름이며 거기에는 돼지 사육사 오이마이오스도 나오지 않는다). 화가는 아마도 무대에 상연된 연극 장면을 보고 이것을 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극작가들이 연극 예술을 만들어낸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극적이고 감동적인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위해서 정확한 대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모와 영웅이 교환하는 시선이 말 이상의 것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59 <에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 147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판 59와 같은 단순한 묘비를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만든 것은 육체의 자세 속에 있는 '영혼의 활동'을 표현한 바로 그 능력이다. 이 부조는 이 묘석 밑에 묻혀있는 헤게소(Hegeso)의 생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하녀가 그녀 앞에 서서 보석함을 건네주고 있으며 그녀는 보석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