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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8.혼돈기의 서양 미술: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by 2mokpo 2023. 1. 31.

우리는 이제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까지,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데 형상(形象)이 유용하다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칙령이 받아들여진 6세기 까지의 서양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초기 기독교 시대를 뒤이은 시대, 즉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 시대라는 명예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암흑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 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기를 명확하게 한계지을 수는 없으나 논의상 대략 500년경부터 10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500년이라면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오랜 기간이며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이고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마무리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암흑 시대의 역사를 약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하등 놀라움 게 없다. 이 시기는 단지 암흑기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과 계급들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뒤죽박죽의 시대였다. 이 500년 동안에도,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었고 또 이들은 도서관과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고대 세계의 작품들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학식 있고 교육 받은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왕국의 궁정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그들이 그렇게 경탄했던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기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그것은 그들과 예술관이 전혀 다른 북쪽의 무장 침략자들의 새로운 전쟁과 침략때문이었다. 전 유럽을 기습해서 약탈을 일삼던 여러 튜턴 족의 부족들인 고트족,반달 족, 색슨 족, 데인 족과 바이킹 족들은 문학과 미술 분야에 있어서의 그리스와로마의 업적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들은 야만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전혀 느낄 줄 모른다거나 그들 나름의 고유한 미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켈트 족의 아일랜드와 색슨 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 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해서 교회와 첨탑들을 돌로 건축했다 (도판 100). 

▲100 <목조 건축을 모방한 색슨 족의 탑: 얼스 바톤 올 세인츠 교회>, 1000년경, 노샘프턴

우리는 이러한 문양들이 7세기에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튜턴 족들의 이러한 예술관이 다른 지역의 원시 부족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이러한형상들을 마술을 행하고 악귀를 내쫓는 수단으로 생각했다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근거가 있다.

바이킹 족의 썰매와 배에 있는 용의 조각상들이 이 미술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도판 101). 이처럼 위협적인 괴물의 머리가 단지 순수한 장식 이상의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족에게는 배가 고향 항구에 들어가기 전에 그 배의 선장은 '대지의 정령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형상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놀라운 업적은 7세기와 8세기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도판 103은 700년 직전에 노섬브리아 (Northumbria)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린디스판 복음서 (Lindisfarne Gospels)>의 한 페이지다. p159

101 <용의 머리>, 800년경, 목조, 노르웨이 우세베르그에서 출토, 오슬로 바이킹선 박물관

이러한 미술가들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필사본 삽화에 그려놓은 인물상을 보면 더욱 놀랍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같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형상으로 만든 이상한 문양같이 보인다 (도판 102). 우리는 이 미술가가 옛날 성경에서 찾아낸 어떤 표본을 사용해서 그것을 그의 취향에 맞게끔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102 <성 루가>,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

 

두 가지 전통, 즉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고전 미술의 업적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의 궁정에는 로마 장인들의 전통이 열광적으로 부활되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800년경에 아헨(Aachen)에 있는 그의 궁정에 세운 대성당(도판 104)은 약 300년 전 라벤나에 세워진 유명한 교회의 충실한 복사판 같은 것이었다.

103 <린디스판 복음서>의 한 페이지, 698년경, 런던 대영도서관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고전 미술의 업적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샤를마뉴 (Charelemagne) 대제의 궁정에는 로마 장인들의 전통이 열광적으로 부화되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800년경에 아헨 (Aachen)에 있는 그의 궁정에 세운 대성당 (도판 104)은 약 300년 전 라벤나에 세워진 유명한 교회의 복사판 같은 것이었다. 

104 <아헨 대성당의 내부>, 805년 건축

 

▼도판 105는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제작된 필사본 성경의 한 페이지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성 마태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스와 로마의 책에서는 첫 페이지에 저자의 초상화를 초상화를 싣는 것이 관례였는데 복음서를 쓰고 있는 이 성인의 그림도 이런 종류의 초상을 매우 충실하게 모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단히 고전적인 이 중세의 화가가 당시 존중되었던 모범적인 예를 가능한 정확하고 훌륭하게 모사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05 <성 마태오>, 800년경,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아헨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빈 미술사 박물관

9세기의 또 다른 필사본 성경의 삽화 (▼도판 106)를 그린 화가도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 유래하는 앞의 예와 대단히 유사한 고대의 표본을 앞에 놓고 그린 것 같다. 우선 손을 비교해 보면 둘 다 잉크가 담긴 뿔 통을 든 왼손이 책상 위에 놓여 있고 오른손은 펜을 잡고 있다. 심지어는 다리와 무릎 주변의 옷 주름도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도판 105를 그린 화가가 가능한 원본을 충실하게 복사하려고 최선을 다한 반면에 도판 196을 그린 화가는 이와는 다르게 해석하려 한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이 복음서 저자를 서재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나이 많은 침착한 학자처럼 묘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성 마태오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쓰고 있는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의도했던 초상이나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형상 속에 자신의 경외감과 감동 같은 것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미술의 역사상 지극히 중요하고 가장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성인이 큰 눈을 부릅뜨고 엄청나게 큰 손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 것은 이 화가의 솜씨가 서툴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성인에게 긴장해서 집중하고 있는 인상을 주려고 한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옷 주름과 배경을 표현한 필치를 보아도 이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격렬한 감동 속에서 그린 것같이 보인다. 이러한 인상은 부분적으로는 화가가 소용돌이 모양의 선과 지그재그 형의 옷 주름을 그릴 때 느꼈을 그의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원본 자체에도 이러한 화법을 암시해주는 요소가 있었을 것이나이것이 중세의 화가에게 매력적으로 보인 이유는 그것이 북유럽 미술의 제일 큰업적이었던 복잡하게 얽힌 리본 모양과 선의 문양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림에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이나 고전 미술이 하지 못했던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106 <성 마태오>, 830년경,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랭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에페르네 시립 도서관

▼도판 107은 약 백 년 뒤인 1000년경에 독일에서 그려진 [illustrated, 또는 '채색 장식된 (illuminated)']복음서에서 따온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뒤에 사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요한 복음 (13장 8-9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107 <사도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리스도>, 1000년경, <오토 3세의 복음서>의 한 페이지, 뭰헨 바이에른 국립 도서관

우리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도판 108은 1000년 직후에 독일의 힐데스하임 (Hidesheim) 대성당을 위해서 제작한 청동제 문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타락한 아담과 이브에게 다가가 꾸짖는 장면이다. 이 부조에도 성경의 이야기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의미를 갖는 사물들만을 강조해서 인물상들이 단순한 배경으로부터 한층 더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읽어낼 수 있다. 하느님은 아담을 가리키고, 아담은 이브를, 이브는 땅 위의 뱀을 가리키고 있다. 죄의 전가와 악의 근원이 너무나도 힘차고 명확하게 표현됐기 때문에 우리는 인물들의 비례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아담과 이브의 육체가 우리 기준으로 보아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간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든 미술이 전적으로 종교적 이념에만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세에는 교회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성들도 세워졌으며 그 성의 주인인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 역시 이따금씩 미술가들을 고용했다.

우리는 중세 초기의 미술을 논의할 때 이러한 비종교적인 작품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은 파괴당할 때가 많았던 반면 교회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인 미술은 단순한 개인 저택의 장식물보다는 존중되었고 또 보다 주의깊게 보살펴졌다. 이런 성과 같은 개인 저택의 장식 미술은 유행에 뒤떨어지게 되면 요즈음의유행이 그러하듯이 제거되거나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미술 중에서 다행스럽게도 교회에 보존된 덕택에 오늘날까지전해지는 훌륭한 작품도 있다. 그것은 바로 노르만의 정복을 그림으로 보여주는〈바이외(Bayeux) 태피스트리〉이다. 우리는 이 태피스트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마도 1080년경, 즉 여기에 묘사된 장면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우리가 고대 오리엔트와 로마 미술(예를 들면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념비(p. 123, 도판 78 참조)에서 본 바와 같은 그런 종류의 그림 연대기로전쟁과 승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은 그러한 이야기를 놀랄 만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 쓰여진 명문(銘文)이 말해주듯이 해롤드 왕이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에게 어떻게 충성을 맹세했고(도판 109) 또 그가 어떻게 영국으로돌아왔는지를 볼 수 있다(도판 110). 이 이야기보다 더 분명한 방식의 그림으로 설명된 예는 드물다. 이것은 윌리엄 공이 왕좌에 앉아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서 성스러운 유물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해롤드 왕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윌리엄 공이영국에 관한 그의 권리를 주장하는 구실로 이용한 것이 바로 이 맹세였다. 나는 특히 다음 장면에 나오는 발코니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는 손을눈 위에 얹고 멀리서 도착하는 해롤드의 배를 망보고 있다. 사실 그의 팔과 손가락들은 상당히 이상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아시리아나 로마의 연대기를 그린 화가들과 같은 자신감을 기지고 그려진 것이 아니라작고 이상한 작은 마네킹 같은 모습들이다. 이 시기의 중세 화가는 모사한 모델이없었을 것이므로 마치 아이들처럼 그렸다. 그것을 보고 비웃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간결한 수단으로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된 것만을 중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편의 서사시事詩)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결과는 아마도 오늘날의 뉴스나 텔레비전의사실적인 보도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108 <타락한 아담과 이브>, 1015년경,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청동문 부조

 

▼109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해롤드 왕>, 1080년경,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부분, 프리즈 높이 50cm, 바이외 태피스트리 미술관

<'R"자를 쓰고 있는 수도사 루필루스>, 13세기, 필사본의 한 페이지, 책상 위에는 물감이 있고 그의 바로 옆에는 깃펜을 깎는 주머니 칼이 놓여 있다. 제네바의 마르틴 보드머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