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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0. 교회의 승리 : 13세기

by 2mokpo 2023. 2. 15.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을 비잔틴 미술 및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유럽과 심각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또 그것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으나 서유럽은 이런 불변성을 전혀 몰랐다.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미술가들이 교회에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들의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참신한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볼품없는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딕(Gothic) 양식의원리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것을 단지 기술적인 혁신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결과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서로 교차하는 아치를 이용하여 교회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방법은 노르만 건축가들이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일관성 있고보다 훌륭한 건축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만일 기둥들이 또 다른 석조로 메워져 있는 궁의 아치를 지탱할 수 있다면 기둥들 사이의육중한 벼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일종의 돌의골조(骨組)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가느다란 기둥과 좁다란 늑재 정도였다. 그 골조가 주저앉을 위험이 없는 한,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다 없애도 상관없었다. 육중한 돌로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온실을 짓는 것과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짓는 것이 건축가들의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강철로 만든 문틀과 철로 만든 대들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석재로 대치했고 거기에 따른 대단히 조심스러운 계산이 필요했다. 만약에 그러한 것들이 정확하다면 전혀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짓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돌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에서발전된 고딕 식 대성당 건축의 중심 원리였다.

물론 '늑재'를 서로 교차해서 사용하는 원리만 가지고는 이 같은 혁명적인 양식의 고딕 건축을 세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이러한 기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다른많은 기술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로마네스크 식의 둥근 아치들은 고딕 식 건축가들의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두 기둥 사이를 반원형 아치를 가지고 메울 경우, 그것을 해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궁륭 천장은 항상 일정한 정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다. 만일 그 높이를 더 올리고 싶다면 아치의 경사를 더 가파르게 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최선의 방법은 둥근 아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활 모양의 늑재를 접합시키는 것이었다. 첨형 아치는 이런 발상에서 나왔다.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건축물의 요구에 따라서 평평하게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좀더 뾰족하게 만들어 높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것이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궁륭을 만드는 무거운 돌들은 아래쪽으로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를 당긴 활처럼 양 옆으로도 압력을주게 된다. 이 점에서도 침형 아치가 둥근 아치의 개량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둥만을 가지고 이 외부의 압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건물 전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궁륭 천장을 가진 측랑 부분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없었다. 밖에 부벽(扶壁, butress)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이런 교회들을 단지 공학 기술상의 업적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고딕 건축가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설계의 대답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배려했다.

우리는 도리아식 신전을 보고 수평적인 지붕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일주들의 기능을 감지한다. 그리고 고딕 성당의 내부(▼도판 123)에 들어서서 보면 아찔할 정도로 높은 궁륭형 천장을 지탱시켜주는,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는 빈 벽이나 육중한 기둥 같은 것은 없다.

내부 전체는 가느다란 기둥과 늑재로 짜여진 것같이 보인다. 그 망이 천장을 덮고, 주랑의 벽을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돌 가지들을 묶어놓은 것같이 한데 모여 합쳐진다. 창문들조차도 트레이서리 (tracery)라고 알려진 엮어짜여진 선으로 덮이 있다(▼도판 124).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의 대성당들은 주교들 자신의 교회(대성당이라는 말의 어원인 cathedra는 주교의 보좌를 의미한다)로서, 대부분이 너무나 대담하고 장대한 규모로 구상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처음에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완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계획이 수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대한 내부로 들어가보면 그 규모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사소한 것들은 모두 왜소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하고 엄격한 건물들만을 보아온 사람들이 이와 같은건물에 들어와서 받았을 인상을 우리로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아마도 그 힘과 권세에 있어서 악의 공격에 대해서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전투적인 교회' 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이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신자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신자들은 설교와 찬송가를 통해서 진주로 만든 문과 값진 보석, 순금과 투명한 유리로 된 천상의 예루살렘(요한계시록 21)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환상의 광경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이 성당들의 벽은 차갑거나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성당의 벽은 루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졌다. 기둥과 늑재, 창의 트레이서리 장식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데 넋을 잃은 신자들은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기적과 같은 건물들은 아주 멀리서 보아도 마치 하늘의 영광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건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도판 125). 현관과 창문의 배열은 매우 명료하고도 힘이 안들어 보이며, 회랑의 트레이서리 장식도 아주 날씬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돌더미의 무게를 잊게 되며, 마치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우리 눈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천상의 주인처럼 현관의 좌우에 배치된 조각들도 경쾌하고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를 성당(p. 176, 도관 115)을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가는 성인들의 상을 건물의 구조에 딱 들어맛는 단단한 기둥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사르트르(Chartres) 대성당의 북쪽현관(▼도판 126 127)을 장식한 고딕 양식의 미술가는 성상들을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듯이 묘사했다. 그 성상들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옷 주름의 흐름도 그 밑에 살아 있는 육체가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암시해주고 있다.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들이 누구의 상()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앞에 세우고 있는 늙은 사람이 아브라함임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다. 또한 모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십계명이 새겨진 명판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는 데 사용했던 뱀이 감긴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은 구약 성경(창세기16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 이며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을 맞기 위해서 '빵과 포도주를 가져온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다. 그래서 그는 중세신학부)에서 성사를 집전하는 신부들의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성직자들의성찬배)와 향로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대한고딕 대성당들의 현관에 모여 있는 조각상들은 거의 다 특유의 상징으로 묘사 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의미와 신탁을 충분히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었다.

한곳에 모여 있는 이 조각상들은 앞 장에서 논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125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1163-1250, 고딕 성당

126 <샤르트르 대성당 북쪽 수랑의 현관 부분>

127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모세>, 1194, 도판 126의 세부

도판 12913세기 초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의 고딕 식 대성당의 현관인데 여기에는 이 고딕 조각가들의 전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성모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열두 사도들이 성모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성 막달라 마리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는 그의 팔 안으로 성모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 조각가가 그 전 시대의 엄숙한 좌우 대칭을 유지하려고 여전히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조각가가 사도들의 머리를 아치 주위에 미리 배치하고 침대 양끝의 사도들은 상호 대칭을 이루도록 했으며 그리스도를 중앙에 배치하기 위해서 이 인물군들을 미리 스케치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판 120에서 볼 수 있는 12세기의 거장처럼 철저한 좌우 대칭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히 그의 조각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눈을 치켜뜨고 열심히 쳐다보는 사도들의 아름다운얼굴에서 애도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사도들 중의 세 사람은 전통적인 애도의표시로 손을 얼굴에까지 들어 올리고 있다. 더욱 더 표정이 풍부한 것은 성모의 침상 곁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과 몸짓인데 이 조각가는 그녀를 평화스럽고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몸에 걸친 옷도 일찍이 초기 중세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텅 빈 껍데기가 아니며 순전한 장식적인 두루마리도 아니다. 고딕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마 그들은 프랑스에서 더러 찾아볼 수 있는 로마의 묘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물에서 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체의 구조가 옷의 주름 아래로 보이게 만드는 잊혀졌던 고전 예술을 다시 찾았다. 사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이 어려운 기술을 터득한 그들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의 발과 손, 그리고 그리스도의 손이 옷자락밑에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는 방법은 이들 고딕 시대의 조각가들이 더 이상 그들이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각성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시 한번 자연을 모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의 형상을 실감나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과 고딕 미술, 즉 신전 미술과 성당 미술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품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위안과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에 틀림없다.

128 <성모의 죽음>, 1230년경,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남쪽 수랑의 현관 부분

129 <성모의 죽음>, 도판 128의 세부

13세기에 이르러서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있어서 한층 더 깊은 발전을 보였다.

 

1260년경 독일의 나움부르크 (Naumburg) 대성당 설립자들의 조각상 제작을 위임받은 조각가는 그 당시의 실제 기사들의 모습을 신빙성 있게 전달해준다 (도판130). 그가 실제로 실물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설립자들은 오래 전에 죽어서 그에게는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남녀 조각상들은 언제라도 교회의 대좌에서 내려와 그들의 헌신과 고행이 우리 역사책의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힘센 기사들과 우아한 숙녀들 무리에 합세할 것같이 보인다.

 

130 <에케하르트와 우타>, 1260년경, 나움부르크 대성당 성가대석의 '설립자 군상'의 일부

만약 12세기의 <수태 고지> (p. 180, 도판 119)13세기에 그린 시편 중의 한 페이지 (도판 131)를 비교해 본다면 그 변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예수의 매장을 묘사한 것으로 그 주제와 정신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부조 (도판 129)와 비슷하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인물상들의 감정을 보여 주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모는 죽은 예수의 시체 위로 몸을 구부려 그를 껴안고 있으며, 성 요한은 슬픔에 싸여 두 손을 맞잡고 있다.

 

131 <그리스도의 매장>, 1250-1300년경, 봉몽에서 나온 필사본 기도서의 한 페이지, 브장송 시립 도서관

실물을 그린다는 것은13세기 미술가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로 간주되곤 했다

도판 132는 그러한 예외적인 작품을 보여 준다. 이것은 13세기 중엽에 영국의 역사가 매튜 패리스 (Mathew Paris, 1259년 사망)가 그린 코끼리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흥미 있는 점은 화가가 정확한 비례를 얻어내려고 대단히 고심했다는 사실이다.

 

 

132 매튜 패리스, <코끼리와 사육사>, 1255년경, 필사본에 실린 드로잉, 케임브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파커 도서관

133 <수태 고지, 성탄 및 목동들>, 1260, 피사의 세례당 대리석 설교 연단의 부조

이러한 방법론으로 무장을 하였기에 비잔틴 보수주의의 주문을 깬 한 천재가 신세계로 감히 뛰어들 수 있넜으며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시킬 수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 1267 - 1337)에서 확인되어 진다. p201

도판 134는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여인상으로 '신앙'의 화신이다. 우리는 이 고상한 인물상이 고딕 조각가들의 작품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싑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환조 같은 느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그림이다. 우리는 팔의 표현에서 단축법을, 얼굴과 목에서는 입체적 표현법을, 그리고 의상의 흐르는 듯한 주름에서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천 년 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p201

134 조토 디 본도네 <신앙>, 1305년경, 파도바의 델 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의 부분

파도바에 있는 조토의 한 프레스코 벽화 (도판 135)를 비슷한 주제의 13세기의 세밀화 (도판 131)와 비교해 보면 이 혁신의 범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p202

135 조토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136 도판 135의 부분

 

우리는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조각 작품들을 만든 거장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그 당대에 충분히 평가 받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러한 명예는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으로 돌렸다.

이러한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p202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美術史)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p205

<세인트 올번스 대성당의 건축 현장을 방문하는 모파 왕과 건축가(컴퍼스와 자를 들고 있다)>, 1240-50년경, 영국 필사본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의 편년사> 중 한 페이지, 매튜 패리스가 그린 드로잉,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