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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2. 현실성의 정복 : 15세기 초

by 2mokpo 2023. 3. 1.

12. 현실성의 정복 15세기 초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다. 조토는 이런 식으로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이탈리아에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은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인들은 먼 옛날에는 로마를 수도로 한 자신들의 나라가 문명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고트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해 와서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이래로 그 권세와 영광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 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넘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 시대와 그들이 이제 희망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때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중간 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 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파괴하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미술을 고딕 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적'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고전 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도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 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 1377-1466였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고딕 성당으로 브루넬레스키는 고딕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술적인 창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명성은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 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했을 구성과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doxne)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도판 146)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이런 고대 건물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물들은 15세기피렌체의 요구에는 채택되기 힘들었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列柱)나 박공pediment)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건축가들이 브루넬레스키의 방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고딕 전통에 반기를 든 것처럼 르네상스 식 전통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심지어 원주나 그와 비슷한 장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까지도 아직 문이나 상품의장식(moulding)에서, 또는 건물의 치수와 비례 등에서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새로운 시대의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분명히 성공한 셈이다.

도판 147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Puzz) 가를 위해서 지은 작은 예배당의 정면이다. 우리는 한눈에 이 건물이 고전적인 신전과 거의 공통점이 없음을 알 수 있지만 고딕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형식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게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원주와 벽기둥(pilaster)과 아치를 자기 식대로 결합해서 그 이전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중략~

 

146 필리포 브루넬리스키 설계, <피렌체 대성당의 돔>, 1420-36년경

 

147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초기 르네상스 교회당: 피치 예배당>, 1430년경, 피렌체

 

148 브루넬레스키 설계 <파치 예배당 내부>, 1430년경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가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 백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 (遠近法, perspective)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 (短縮法, foreshortening)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 (p. 114, 도판 72) 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 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이것이 그의 화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킨 흥분은 엄청났을 것이다. 도판 149는 이러한 수학적인 법칙에 근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피렌체의 어느 교회에 있는 벽화로 삼위 일체와 십자가 아래의 성모와 성 요한, 그리고 기부자들인 바깥쪽에서 무릎꿇고 앉아 있는 나이 많은 상인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그린 화가는 마사초(Masaccio : 1401-28)라는 사람인데 마사초는 '어줍은 톰마소' 라는 뜻(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리숙하고 겉모습에 무관심하며 얼빠진 행동을 자주해서 붙여진 별명 - 역주)이다. 그는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28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 회화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비록 원근법이 새롭게 등장했던 당시에는 그것 자체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을 테지만 이 혁명은 기법적인 수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 벽화가 제막되어 마치 벽에 구멍을 뚫어놓은 듯이 보이는 그 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이 당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양식에 따른 새로운 납골당을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이 새로운 건물 안에 배치된 인물상들의 단순함과 장엄함에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에 피렌체 사람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피렌체에서도 유행했던 국제 양식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 이었으며, 유려한 곡선이 아니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이었고, 꽃이나 보석같은 고상한 세부 묘사 대신에 유해를 안치하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 였다. 그러나마사초의 작품이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덜 주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는 마사초가 조토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극적인 장엄함을 찬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모가 십자가에 못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엄숙한 이그림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대단히 웅변적이고 인상적이다. 이 그림의 인물상들은 사실 조각상처럼 보인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들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느낌이 이 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시대의 거장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사람이 보다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피렌체의 대가 도나텔로Donatello : 13867-1466)였다. 그는 마사초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많았지만 더 오래 살았다.

149 마사초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 1425-8년경, 프레스코, 667 x 317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도판 151은 그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무기 제조자들의 조합이 주문한 것으로 그들의 수호 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피렌체의 한 교회 (오르 산 미켈레) 외부의 벽감 속에 세워두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p229

151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경, 오르 산 미켈레의 대리석상, 209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중략~

 

도판 152<성 게오르기우스> 보다 약 10년 뒤 시에나 성당의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청동 부조이다. 도판 118 (p. 179)의 중세 세례반처럼 이것도 세례 요한의 생애 중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살로메 공주가 해롯 왕에게 춤을 춘 대가로 성 요한의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받는 끔직한 순간을 보여준다. p230

 

152 도나텔로, <헤롯 왕의 잔치>, 1423-7, 청동에 금도금, 650 x 60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

왕실의 연회실을 들여다보면 그 너머로 악사들이 앉아 있는 회랑이 있고 방들이 나란히 있으며 그 너머로 계단이 보인다. 사형 집행인이 접시 위에 성인의 머리를 담아 막 들어와서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공포에 질린 왕은 뒤로 움츠리며 두 손을 들고 있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이 범죄를 사주한 살로메의 어머니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왕에게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여자의 주위에는 연회객 들이 뒤로 물러섰기 때문에 큰 공백이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방금 춤을 중단한 것으로 보이는 살로메 주위에 모여들고 있다. 도나텔로의 이 작품에서 어떤 양상이 새로운 것인지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면이 다 새롭기 때문이다. 고딕 미술의 명확하고 우아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이야기 방식을 보고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정돈되고 유쾌한 문양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혼돈의 효과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도나텔로의 인물들도 그 움직임에는 거칠고 모가 진 데가 있다. 그들의 몸짓은 격렬하며 이 이야기의 끔찍스러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장면이 거의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은 현실의 환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도나텔로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성인의 머리를 방 안으로 가져왔을 때의 정경은 어떠했을까?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음직한 건물로 고전적인 궁전을 그렸고 배경에 있는 인물들 (도관 153)을 위해서는 로마 시대 유형의 인물들을 선택했다. 사실 그 당시에 도나텔로는 그의 친구 브루넬레스키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 로마의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미술에 관한 이런

153 도판 152의 세부

 

'피렌체에서 도나텔로의 세대가 국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힘 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이, 알프스 북쪽에서도 한 조각가가 그의 선배들의 섬세한 작품들보다는 실감나고 보다 솔직한 미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이 조각가는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로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경부터 1405년까지 일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한 유명한 순례지에서 샘을표시하는 커다란 십자가 밑부분을 이루는 예언자 군상(도판 154)이 있다. 그 예언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예언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각 손에 그런 예언이 새겨진 커다란 책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서서 앞으로 닥쳐올 비극을 묵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의 인물상들은 이미 고딕 성당 양편에 서 있는 엄숙하고 딱딱한인물상(p. 191, 도판 127)이 아니다. 이들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마찬가지로 옛날 작품들과는 다르다. 터번을 머리에 감고 있는 사람이 다니엘이고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 사람이 늙은 예언자 이사야이다. 실물보다 크고 아직도 황금색으로 빛나며 우리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조각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막 역할을 하려는 중세 종교극에 나오는 인상적인 등장 인물들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사실감과 함께 흘러내리는 의상에 기품 있는 자태를 한 이 육중한 인물상들을 창조한 슬뤼테르의 예술적 감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7~1441)였다. 슬뤼테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현재의 벨기에로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지방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헨트 시에 있는 여러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제단화(도판 155-6)이다. 이 작품은 얀보다는 덜 알려진 그의 형 휘버트(Hubert)가 시작해서 1932년에 얀이 완성했다고 한다. 1432년이라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마사초와 도나텔로의 걸작들이 완성된 그 무렵이다.

 

피렌체에 있는 마사초의 프레스코(도판 149)와 멀리 플랑드르의 한 교회를 위해그려진 이 제단화는 서로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둘 다 양쪽 아래 부분에 기도하는 모습의 신앙심 두터운 헌납자와 그의 아내도 도판155)를 그려넣었고 커다란 상징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사초의 프레스코에서는 성삼위 일체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단화에서는 예수를 상징하는 양(the Lamb)의 경배(도판 156)라는 신비스런 광경을 중앙에 배치해 놓았다. 이 부분은 주로 요한 계시록의 한 구절(79)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 그 뒤 나는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

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라고 쓰여진 이 귀절은 교회에서 모든 성인들의 축제와 관련된 것인데, 이 그림에서는 더 많은 암시를 담고 있다. 그 위로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마사초의 묘사만큼이나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지만 마치 교황처럼 눈부신 후좌에 앉아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예수를 최초로 하느님의 양이라고 불렀던 세계자 요한과 성모가 앉아 있다.

많은 장면들을 담고 있는 이 제단화는 접어서 끼어 넣은 도판 156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축제날이면 펼쳐져 그 빛나는 색채를 드러낼 수 있었고 주간에는 접혀져서 다소 칙칙한 외관(도판 155)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조토가 아레나 예배당에 선과 악에 대한 형상들(p. 200, 도판 134)을 그려놓았던 것과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 저자 요한이 입상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위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인 수태 고지의 순간이 그려져 있는데, 이 성스러운 이야기를 묘사하는 반 에이크의 전혀 새롭고도 '세속적인표현 방식을 감지하려면 백년 전에 시모네 마리티니가 그린 제단화(p. 213, 도관 141)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무엇보다도 놀랍도록 보여 주는 부분은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그림인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 (pp. 1045, 도판 64, 65)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이상화 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다소 충격을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가 심미안을 지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도 분명히 이전 세대에 <월든 두폭화> 도관143을 그린 대가가 그랬듯이, 하늘의 영광을 불러 일으키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가 음악을 들려주는 천사들이 입은 진귀한 비단옷의 광택과 그림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보석의 광채를 연구하며 그릴 때의 끈기와 숙달된 솜씨에서 다시 한 번 그 차이점에 주목할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반 에이크 형제는 마사초만큼 급진적으로 국제 양식의미술 전통과 결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랭부르 형제 같은 미술가들의 방법을 추구해서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었기 때문에 중세 미술의 개념에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그 시대의 다른 고딕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랭부르형제도 실물의 관찰에서 얻은 매력적이고 섬세한 세부 묘사를 화면 속에 가득 채우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꽃이나 동물, 건물, 화려한 의상과 보석 따위를 그리는 솜씨를 과시했으며, 또 눈앞에 유쾌한 시각적 향연을 선사하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154 클라우스 슬뤼테르, <예언자 다니엘과 이사야>, 1396-1404. <모세의 샘>의 부분, 석회석, 대좌를 뺀 높이 360 cm, 디종 샤르트롸즈 드 샹몰 예배당

155 얀 반 아이크, <날개를 접은 헨트 제단화>, 1432,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 x 51.4cm, 헨트 성 바보 대성당

156, 얀 반 아이크,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우리는 도판 157에서 진짜 나무를 보고, 도시로 이어지는 실제 풍경과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을 본다. 바위 위의 풀이나 가파른 돌산에 자라는 꽃들을 그리는 데 들인 무한한 인내는 랭부르 형제가 그린 세밀화의 장식적인 덤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풍경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p239

도판 156의 세부

 

반 에이크의 예술은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인 도판 158은 장사차 네덜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인 조반니 아르놀피니 (Giovanni Arnolfini)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니 (Jeanne de Chenany)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 않게 그 나름대로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현실 세계의 단순한 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반 에이크의 예술은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인 도판 158은 장사차 네덜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인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molfini)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니(Jeanne de Chenany)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않게 그 나름대로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현실 세계의 단순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 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니 부처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아마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의 약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젊은 여인은 그녀의 오른손을 아르놀피니의 왼손 위에 얹었고 아르놀피니는 그들의 결합의 엄숙한 표시로서 그의 오른손을 그녀의 왼손 위에 놓으려는 순간이다. 이와 비슷한 엄숙한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아마도 이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이 거장이 그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의 이름을 써넣

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도판 159). 이것은 마치 목격자가 확실하다고 인정하는 사진을 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데, 그림을 이런 새로운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각해낸 사람이 이탈리아의 상인인 아르놀피니인지 아니면 북유럽의 미술가반 에이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창안해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는 분명히 반 에이크의 새로운 회화 방식이 지닌 엄청난 가능성들을 재빨리 이해 했음에 틀림없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서 반 에이크는마사초와 마찬가지로 국제 고딕 양식의 쾌적한 형식과 유려한 곡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인물상들이 <월든 두폭화>(pp. 216-7, 도판143)와 같은 정교하고 우아한 작품과 비교해보면 딱딱하고 어색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그 당시의 미술가들은 진실을 정열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어서 미에 대한 구세대의 낡은 개념을 거부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나이든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으로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Conrad Witz : 14007-1446?)를 들 수 있다. 도판161은 그가 1444년에 제네바 시를 위해서 그린 제단화의 일부분이다. 이 그림은 성베드로 에게 봉헌된 것으로 성경의 요한복음(21)에 실린 대로 예수가 부활된 뒤에 성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몇 명의 사도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티베리아 해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밝았을 때 예수는 해변에 서 있었으나 아무도 그가 예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어부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고기가 어찌나많이 잡혔던지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주님이시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이 말을 듣자 "겉옷을 두르고(그는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 만약 중세의 화가가 이러한 기적적인 장면을 그리게 되었다면 그는 배경의 티베리아 해를상투적인 몇 개의 물결선만으로 묘사하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츠는 제네바의 시민들에게 예수가 물가에 섰을 때 진짜로 어떤 모습이었을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호수가 아니라 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호수, 즉 높이 솟은 웅장한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네바 호수를 그렸다. 이것은 누구나다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아직도 그 그림 속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보이는 실제의 풍경이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 풍경을 최초로 정확하게 묘사하려고시도한 작품일 것이다. 이 현실의 호수 위에 비츠는 현실의 어부들을 그려 넣었다. 옛날 그림에 나오는 위풍당당한 사도들이 아니라 고기잡이 도구를 부지런히 다루면서 배가 기울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색하게 애를 쓰

있는 평범하고 투박한 사람들을 그렸다. 성 베드로는 물에 빠져 무기력한 사람같이 보이며 또 그는 마땅히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단지 예수만이 옷자락으로 몸을 가리고 소란한 가운데 조용하고도 굳건하게 서 있다. 그의 확고한 자세는 마사초의 위대한 프레스코(도관149) 의 인물상들을 연상시킨다. 제네바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이 제단화를 대했을 때, 즉 그들의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그들과 같은 모습의 사도들과 그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호숫가에 구원과 위안을 주기 위해 기적처럼 나타난 부활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들은 틀림없이 매우 커다란 감동을 체험했을 것이다.

158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약혼>, 1434, 목판에 유채, 81.8 x 59.7cm, 런던 국립미술관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도판 159).  p240

159, 160 도판 158의 세부

161 콘라드 비츠, <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1444, 제단화의 패널, 목판에 유채, 132 x 154cm, 제네바 박물관

 

난니 디 반코, <벽돌을 쌓고, 구멍을 파고, 측정하고, 조각하는 석공과 조각가들>, 1408년경, 대리석 조각의 대좌, 피렌체 오르 산 미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