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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1.귀족과 시민 : 14세기

by 2mokpo 2023. 2. 22.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당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은 14세기와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그것은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일어났던 커다란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그들 자신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만약 기사와 시골 유지, 수도승과 장인들이 등장하는 초서(Chaucer)의 서사시를 되새겨 본다면 14세기의 생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설립자 군상(p. 194, 도판 130)을 볼 때 기억하게 되는 십자군이나 기사들의 무용담이 판을 치는 세계가 아니었다. 어떤 시대와 양식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한 일반화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유보한다면 우리는 14세기의 취향이 장대한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시기의 건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 영국양식(Early English style)' 이라고 알려진 초기 대성당들의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형식들이 발전하여 그 후에 생긴 소위 '장식적 양식(Decorated style)' 이라고 알려진것으로 구분된다. 그 명칭 자체가 취향의 변화를 말해준다. 14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벌써 초기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외관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서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엑서터(Exeter) 대성당의쪽 창문이 이 양식(도판 137)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과업은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고하는 도시에서는 시청 청사라든가 조합 사무실, 대학, 궁전, 다리와 성문 등과많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이런 종류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징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베네치아에 있는 도제궁(도판 138)인데 이 건물은 베네지아의 권세와 번영이 최고에 달했던 14세기에 착공되었다. 이 건물은 고딕 양식의 발전이 후기에 이르러 장식과 트레이서리에 많은 비중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37 <엑서터 대성당의 서쪽 정면>, 1350-1400년경, '장식적 양식'

138 <베네치아의 도제궁>, 1309년 착공

 

14세기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석조물들이 아니라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小品)들이었다.

도판 139는 프랑스의 한 금세공사가 은에 금도금을 하여 만든 작은 성모상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공중의 예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대저택의 예배실에 안치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39 <성모와 아기 예수>, 1324-39년경, 1339년 에브뢰의 잔에 의해 헌납됨, 금도금한 은과 에나멜 및 보석류, 높이 69cm, 파리 루브르

 

14세기 화가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에 대한 집착은 <메리 여왕의 기도서>라고 알려진 영국의 기도서와 같은 유명한 필사본 들에서 엿볼 수 있다. 도판 140은 박식한 유대의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성전의 예수'를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를 높은 의자 위에 올라앉혀 놓았는데, 예수는 중세 미술가들이 설교사를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특징적인 손짓으로 교리의 요점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율벅학자들은 두려움과 놀라는 자세로 손을 들고 있으며, 방금 그곳에 도착한 그리스도의 양친도 서로 상대방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며 손을 들고 있다. 이야기를전개하는 방법은 아직도 다소 비현실적이다. 이 화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출하는 방법을 발견한 조토에 대해서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 의하, 당시 예수는 열두 살이었는데 어른들과 비교해서 너무 작게 그려져 있고, 또 인물들 사이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더욱이 모든 얼굴들은 곡선으로그려진 눈썹과 아래로 처진 입,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수염 등 매우 단순하고 일정한 한가지 공식에 의해서만 그려져 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점은 위의 성경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또 하나의 장면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일상생활 에서 따온 소재로 매를 이용해서 오리를 잡는 장면이다. 매 한 마리가 오리 한 마리를 덮치고 있고 다른 두 마리는 날아서 도망치고 있다. 이를 보고 말을 타고 있는 남녀와 그 앞에 있는 소년이 기뻐하고 있다.

이 화가는 윗부분의 그림을 그릴 때는 열두 살 먹은 소년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아래 그림을 그릴 때는 매와 오리를 실제로 보고 관찰해서 그렸던 것 같다. 아마 그는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너무 경외한 나머지 그의 사실적인 관찰에 대한 것을 위의 그림에는 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두 가지 장면을 별도의 것으로 분리시키려 했다. 즉 위의 그림에서는 번잡한 세부묘사를 없애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제스처로 내용을 전달하는 분명한 상징적인방법을 사용하는 한편, 여백에서는 이것이 초서(Chaucer)가 살았던 시대라는 것을상기시켜주는 실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서와 같이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들이 점차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와서 였다. 아마도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풍조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140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매사냥 놀이>, 1310년경, <메리 여왕 기도서>의 한 페이지, 런던 대영박물관

 

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이 회화의 모든 개념의 변화를 일으켰다. 고대 비잔틴 양식이 갑자기 딱딱하고 구식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 미술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과 갑자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p211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대단히 깊은 영향을 준 곳은 또 하나의 토스카나 마을로 피렌체의 적수였던 시에나 (Siena)에서였다. 시에나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처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p212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도판 141은 그의 유파 중에서 그보다 젊은 두 대가인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 : 1285? - 1344)와 리포 멤미 Lippo Memmi : ?- 1347?)가 그린 제단화이다.

이 그림은 14세기의 이상과 일반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까지 시에나의 미술에 흡수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수태고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 와 성모 마리아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인데 가브리엘 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이여 (Ave gratia plena)"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그의 입 주위에 그 말을 직접 써놓았다. 그의 왼손에는 평화의 상징인올리브가지가 들려있고 오른손은 마치 말을 시작하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다. 성모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천사의 출현으로 매우 놀라고 있다. 그녀는 두려움과 한 몸짓으로 유리면서 하늘에서 온 사자 돌아다보고 있다. 둘 사이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흰 백합이 꽂힌 꽃병이 놓여 있고, 중앙의 뾰족한 아치 밑에는 성신의 상징인 비둘기가 네 날개를 가진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거장들도 도판 139 140을 남긴 프랑스와 영국의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섬세한 청국과 서정적인 감정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흘러내리는 의상의 부드러운 선과 가느다란 몸매의 미묘한 우아함을 즐겨 그렸다. 사실 이 그림은 인물들이 황금색 배경을 바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도록 기교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금세공사의 값비싼 작품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인물들을 패널의 복잡한 형태 속에 알맞게 배치한 방식에, 즉 천사의 날개가 왼쪽 아치에 들어맞게 그려졌다든가 뒤로 움츠린 마리아가 오른쪽 아치 속에그려지고 이 두 인물 사이의 공간을 꽃병과 그 위의 비둘기로 채운 방법 등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두 화가들은 인물 모습을 패턴 속에 조화롭게 배치하는기술을 증세의 전통에서 습득했다. 우리는 앞에서 중세 미술가들이 만족스러운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상징들을 배열한 방법을 보고 감탄한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효과는 사물의 실제 형상과 비례를 무시하고 공간을 전최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능했다. 이 시에나 미술가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수업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우리는 그들의 인물상에서 비스듬하게 째진 눈과곡선을 이루는 일 등 약간 어색한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조토의 업적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부적인 요지만 검토해 보다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가령 꽃병을 보면 그것은 돌로 된 바닥 위대 함께 있는 진짜 젖병이며, 우리는 그것이 천사와 성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다. 배경 속으로 파묻힌 성모가 앉아 있는 의자도 실제의 의자이고 그녀가 듣고 있는 책도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페이지 사이에 명암이 들어간 실제의 기도서이다. 아마 화가는 그의 공방에서 진짜 기도서를 놓고 세심한 관찰을 했을 것이다.

141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 <수태고지>, 1333,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 부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중세에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그런 의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의 미술가들은 판에 박힌 남자나 여자의 상을 그리고 그 밑에다 초상 인물의 이름을 써넣곤 했다. 유감스럽게도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렸다는 라우라의 초상화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초상화가 얼마나 실물과 유사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14세기 미술의 거장들이 자연을 주제로 실물과 유사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으며 또 초상 미술이 이 시기에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시모네 마르티니가 자연을바라보고 그 세부를 관찰한 방법도 이 초상화의 발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미술가들은 그가 이룩한 업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기

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시모네 마르티니도 교황청에서수년 간 생활했는데 당시 교황청은 로마가 아닌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의 중심이었고 프랑스적인 관념과 양식은 유럽 각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일은 프라하에 거주하는 룩셈부르크 출신의 한 일가에 의해통치되고 있었다. 프라하의 대성당에는 이 시기(1379-1386)에 제작된 일련의 놀라운 흉상들이 있다. 이 흉상들은 그 교회를 후원한 사람들의 조상(彫像)으로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설립자 군상>과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

나 이 작품들에서는 어떤 의구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들은 실물을 충실하게 표현한 실제 인물의 초상 조각이다. 왜냐하면 이 연작에는 당시 제작을 일임했던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 페터 파를러(아들)를 포함하는 등대 인물들의 흉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전혀내려오는 첫 번째 진짜 미술가의 자화상일 것이다(도판 142),보헤미아 지방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의 영향력이 전파되는 중심지들 중의하나가 되었다. 그 영향력은 멀리 보헤미아의 앤 공주와 결혼한 리처드 2세의 영국까지 미치게 되었다. 영국은 부르고뉴와 무역을 했다. 적어도 라틴 교회의 지배를받는 유럽은 아직도 하나의 큰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미술가들과 사상가들은 한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로 옮겨 다녔으며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업적이 배척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14세기 말에 이처럼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서생겨난 양식을 역사가들은 '국제적 양식' 이라고 불렀다. 영국에 있는 이런 작품들의 한 경의적인 예로 프랑스의 대가가 영국 왕을 위해 그린 소위 <윌튼 두폭화(도관 143)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이유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 대상이 다름아닌 보헤미아의 앤 공주의 불행한 남편 리처드 2세라는 것이다. 리처드 2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세례 요한과두 명의 왕실 수호 성인들이 그를 성모에게 천거하는 것같이 보인다. 성모는 천국의 꽃으로 덮인 초원에 서서 왕의 표시인 황금뿔을 가진 하얀 숫 사슴을 가슴에 단 아름다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기 예수는 왕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환영하듯이 그리고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을 확약하듯이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다. 형상에 대한 고대의 주술적인 태도가 이러한 '헌납자들의 초상'의 관습 속에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때 우리는 미술의 초창기에 볼 수 있었던 이러한 신념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언제나 성인 같은 생활만 할 수 없는 거칠고 혼란한생활 속에서 미술가의 기교를 빌어 만든 자신의 초상을 조용한 교회나 예배당에걸어 성자나 천사들과 친숙하게 지내며 늘 기도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소의 위안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윌튼 두폭화>가 앞에서 논의한 작품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아름답게 흐르는 선과 우아하고 섬세한 주제를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쉽게 알 수 있다. 성모가 아기 예수의 발을 만지는 포즈나 길고 가느다란 손을 가전사들의 몸짓은 앞에서 본 인물들의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 화가가 패널의 오른쪽에 보이는 무릎을 굽고 있는 천사의 자세에서 어떻게 단축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 상상의 천국을 장식하는 수많은 곳에서 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연구의 결과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국제적 양식의 미술가들은 이와 같은 관찰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취향을 그들 주변 세계를 묘사하는 데 착용했다. 중세의 달력에는 달마다 바뀌는 일, 즉 씨를 뿌리고 사냥을 하고 추수를 하는 작업 광경을 그리는 것이 관례였다.

142 페터 파를러(아들), <자화상>, 1379-86, 프라하 대성당

143 <리처드 2세를 아기 예수에게 천거하는 세례자 요한, 참회왕 에드워드 및 성 에드먼드>(월튼 두폭화), 1395년경, 목판에 템페라, 각각 47.5 x 29.2cm, 런던 국립미술관

 

부르고뉴의 한 부유한 대공이 랭부르(Limbourg) 형제의 공방에 주문해서 기도서에 붙은 달력(도관 144)은 도관 140에 나오는 메리 여왕의 기도서)이래로 실생활의 사생에서 얻은 이러한 그림들이 생명감과 관찰력을 어느 정도로까지 발전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세밀화는 귀족들의 연례행사인 봄 축제를 보고고 있다. 이들은 꽃과 나뭇잎을 휘감은 채 화려한 옷차림으로 말을 타고 숲을 지나고 있다. 우리는 이 화가가 당시에 유행하던 옷을 입은 귀여운 아가씨들의 광경을 얼마나 즐겁게 그렸는지, 그리고 전체의 화려한 광경을 한 페이지에 담는 데 대해

얼마나 즐거움을 느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초서와 그의 순례자들을 상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화가 또한 상이한 유형의 인간들을 구별하여 그리기 위해서 어찌나 세심하게 애를 썼던지 마치 그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는 것은 착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그림은 확대경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만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달력을 그린 화가가 이 페이지에 담아 놓은 세부 묘사들은 이 그림이 현실 생활에서 따온 장면의 하나처럼 보이도록 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벽한 실제의 광경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화가가 나무를 커튼처럼 이용해 배경을 차단했으며 또한 그 너머로보이는 거대한 성의 지붕 꼭대기로 미루어 이 화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이자연 그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법은 이전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상징적인 방법을 통한 이야기 전달에서 멀리 벗어난 것처럼 보이므로 이 화가 조차도 인물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표현할 수 없었고 주로 주의 깊은 세부 묘사를 통해서 현실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가 그린 나무도 자연에서 보고 그런 진짜 나무들이 아니라 나란히 서 있는 상징적인 나무일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도 하나의 매력적인 인물상의 공식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주변생활의 화려함과 유쾌함에 대한 그의 관심은 회화의 목적에 대한 그의 경해가 중세 초기의 미술가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관심은 가능한 한 가장 명료하고도 인상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 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점차 변해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반드시 상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롭게 얻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14세기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후의 다른 대가들이 해왔던 것처럼 종교 미술에 적동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임무는 변했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훈련은 충분해 했다.

~중략~

144 랭부르 형제<폴과 장>, <베리 공작의 기도서>에 붙은 달력, 1410년경, 상타이 콩데 미술관

145 안토니오 피사넬로 <원숭이 습작>, 1430년경, 스케치북 중에서, 종이에 연필, 20.6 x 21.7cm, 파리 루브르

그러나 미술가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의 세부 묘사에 숙달되는 새로운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그리스와로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 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