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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3. 전통과 혁신 I :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by 2mokpo 2023. 3. 11.

15세기 초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Flanders)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5세기의 미술을 사로잡았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절의 한 영향으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략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에 이시기의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양식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기억하고 있는 바이다. 물론 민족적인 차이는 중세 전반을 통해서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 우리는 13세기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상이성을 기억한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그들 사이에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자신이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일치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 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날의 노동 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p248

 

도판 162는 피렌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72)가 설계한 교회인데 그는 이교회의 정면을 로마 풍의 거대한 개선문(p. 119, 도관 74처럼 구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방침을 도시의 일반적인 주택에는 어떻게 적용시켜야 했을까? 재래의 주택과 궁전을 신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을 수는 없었다. 로마 시대로 부터 전해내려 오는 개인 주택은 하나도 없었으며 설사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생활상의 필요와 관습이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건축가들에게 사용하라고 권장한 고전적인 형식을 절충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알베르티인데, 그는 오늘날까지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루첼라이(Rucellai) 집안을 위해서 대저택(도판 163)을지었을 때 그는 통상적인 3층 건물을 설계했다. 이 건물의 정면과 고전 시대의 유적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에 따라서 정면을 장식하는 데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했다. 그는 원주나 반원주를 세우는 대신에 건물의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pilaster)과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 전체를 덮었다. 알베르티가 어디에서 이러한 원리를 배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 층마다 상이한 그리스의 기둥 양식을 사용했던 로마의 콜로세움(p. 118, 도판73)을 기억한다.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서도 제일 아래층에서는 도리아 식 기둥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벽기둥 사이에는 아치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형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옛 도시의 대저택에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서 알베르티가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 있는 창문들(p. 189, 도판 125)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알베르티의 이런 업적은 전형적인 것이다.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고안을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p250

162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르네상스 교회: 만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 1460년경

 

163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 1460년경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를 들 수 있다. 도판 164는 도나텔로가 만든 <헤롯 왕의잔치>(p. 232, 도판 152)가 있는 시에나 대성당의 동일한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도나텔로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새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베르티의 작품을 처음 보아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우리는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p. 179, 도판 118) 예수는 세례 요한과 구원의 천사들을 데리고 중앙에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비둘기는 하늘에 새겨져 있다. 세부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기베르티의 작품은 중세의 선구자들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그가 옷주름을 배치하는 데 쏟은 세심한 주의는 도판 139(p. 210)의 <성모>와 같은 14세기 금세공사의 작품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기베르티의 부조는 그런대로 도나텔로의 작품만큼 힘차고 실감나게 보인다. 도나텔로처럼 기베르티도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광야에서 해방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엄숙하고 힘찬 몸짓,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서로 조용히 얼굴을 마주보고있는 천사들. 도나텔로가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새롭고 극적인 방법이 그 전시대의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놓은 반면 기베르티는 보다 명료하고 절제있게 표현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했다.

164 로렌초 가베르티, <세례받는 그리스도>, 1427년, 청동에 금도금, 60 x 60 cm, 시에나 대성당의 세례반 부조

기베르티가 당대의 술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던피렌체 부근 피에솔레 (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 1387-1455)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그가 각 수도사들의 방과 복도 끝마다 그려 놓은 성화(聖畵)들을 감상하며 이 오래된 건물의 정적 속을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걸아가다 보면 이러한 작품들을 구상했던 그런 정신이 느껴지는 것 같다.

 

도판 165는 그가 어느 수도사의 방에 그려놓은 <수태 고지> 그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원근법을 구사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즉각 알수 있다. 성처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회랑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벽에 구멍을 뚫는것'이 프라 안젤리코의 주된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14세기의 시모네 마르티니처럼 그는 단지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이 위대한 미술가의 겸손함이야말로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가 미술에 도입했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대적인 새로운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지닌 매력과 어려움은 또 한 사람의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의 작품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보존이 잘된 것은 영국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쟁의 한 장면도판 166)을 그린그림이다. 이 그림은 아마도 피렌체의 상인 중 가장 권력 있고 부유한 메디치 가(Medici家)의 대저택 실내 벽판(벽 아랫부분의 패널에 걸도록 제작된 것 같다. 이장면은 피렌체의 역사에 나오는 일화를 그린 것인데 그 이야기는 이 그림이 그려졌던 당시에도 화제에 올랐었다. 이것은 당시 피렌체 군대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벌였던 전투 중의 하나로 1432년 그들의 적을 통쾌하게 짓밟았던, 산 로마노의 대승(勝)을 그린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매우 중세풍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갑옷에 길고 무거운 창을 들고 마치 마상 경주에 출전하는 것 같은 기사들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 장면을 표현한 방법도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다. 말과 사람들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들처럼 보이고 쾌활한 분위기도 전쟁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말들이 왜 회전목마처럼 보이며 전체 장면도 인형극과 같은 것을 연상시켜 주는지 그 이유를 자문해본다면 매우 기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화가 자신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인물들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다. 우첼로는 원근법의 발견에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밤낮으로 사물을 단축법으로 그려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해보곤 하였다. 그의 동료화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런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부인이 자러가자고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근법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 우리는 이 그림에서 그런 심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첼로는 틀림없이 땅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가지 무기들을 정확한 단축법으로 그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가장 크게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땅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인물을 단축법으로 묘사하는 일(도판 167)은 가장 힘든 작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그려진 적이 없었다.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서 너무 작게 보이긴 하지만 이것이 불러일으켰을 파문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는 화면 전체에서 우첼로가 원근법에 대해 얼마나 흥미를 느꼈으며 그것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았는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전쟁이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인위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와 같은 정연한 수학적인배치 방법 때문이다. ~중략~ p256

메디치 궁에 있는 개인 예배당의 비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은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임에도 그와는 화풍이 대단히 다른 배노조 고졸리(Benozzo Gozzoli : 1421경-97)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이 예배당의 비만을 세 사람의 동방 박사가 말을 타고 가는 행도로 메꾸었는데, 그들을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쾌적한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으로 그렸다(도판 168) 고촐리에게는 이 성경의 일화가 단지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 매혹과 환락의 동화 같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서 우리는 메디치가와 밀접한 교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부르고뉴에서 귀족들의 유희 장면(p. 219, 도판 144)을 묘사하는 취향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

보았다. 고촐리는 이 새로운 수법들이 그 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이런 화려한 그림을 보다 생생하고 유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당시의 생활은 정말로 그림같이 화려한 것이었으므로 작품 속에 그러한 것들을 기록해서 보존해준 이들 군소(群小)미술가들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피렌체에 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당시의 축제 같은 생활의 멋과 취향이 아직도 어른거리는 듯한 이 작은 예배당을 찾아가는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편,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에 사는 화가들도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새로운미술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어쩌면 피렌체 미술가들보다 그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골몰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유명한 대학촌인 파도바(Padova)에서 작업하다가 그 후 만토바(Mantova)의 영주의 궁전에서 일했던 안드레아 만테나(AndreaMantegna : 1431-1506)가 있다. 파도바와 만토바는 모두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이다. 조토가 유명한 프레스코를 그렸던 예배당 근처에 있는 파도바의 한 교회에서 만테냐는 성 야고보의 전설을 설명하는 일련의 벽화들을 그렸다. 이 교회는 이차 대전 중의 폭격으로 심한 피해를 입어 만테냐의 벽화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것이 손실된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다. 그 그림들은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결에 속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도판 169)는 사형장으로 호송되는성 야고보를 묘사하고 있다. 조토나 도나텔로와 마찬가지로 만테냐도 그런 정경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보였을지 분명히 상상해보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인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만테나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 야고보가 로마 황제 시대에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려고 부심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고대의 기념물들도 특별히 연구했다. 야고보가 끌려들어온 성분은 로마의 개선문으로, 호흡하는 교인들도 모두 고전 시대회 기념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로마 군대의 복장에 동일한 부기를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고대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의상과 장신구의 세부 저리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 전체에서 입력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가진 로마 미술의 정신이 넘쳐흐르고 있다. p252

165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400년경, 프레스코, 187 x 157 cm, 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

166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의 대승>, 1450년경, 피렌체 메디치 궁의 실내 장식화로 추정, 목판에 유채, 181.6 x 320 cm, 런던 국립미술관

 

167 도판 166의 부분

168 베노초 고출리,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 박사들>, 1459-63년 사이, 프레스코 벽화 부분,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의 예배당

 

169 안드레아 만테냐, <처형장으로 끌려 가는 성 야고보>, 1455년경, 프레스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 벽화였으나 현재 소실

 

성 야고보를 호송하는 행렬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박해자들 중의 한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성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조용히 돌아서서 그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고 로마 군인들은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무감동하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도 감동을 받았다는 듯한 표현의 제스처로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아치의 원형이 이 장면을 구획하여 호송병들에 의해 뒤로 떠밀리고 있는 군중들의 소란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다.

 

 도관 170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된 꿈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그린것이다. 적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 표지 밑에서 당신은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꿈을 꾼다. 피에로의프레스코는 전투하기 전날 밤의 황제의 막사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열려진 천막만을 들여다보면 황제는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호위병 한 사람이 침상 끝에 앉아 있고 두 사람의 군인이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이 조용한 밤의 정경은높은 하늘에서 팔을 뻗쳐 십자가의 상징을 들고 아래로 내려오는 천사의 모습으로마치 섬광을 비춘 것처럼 갑자기 밝아진다. 만테나의 작품에서처럼 이 작품도 어딘가 연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 여기에는 아주 명확하게 표시된 무대가 있고 우리의 주의를 본질적인 동작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피에로는 안테나와 마찬가지로 로마 군대의 군복을 묘사하는 데 애썼으며 즐겁고 화려한 색채의 세부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고촐리의 방식도 피했다.피에로는 또한 원근법에 완전히 숙달해서 그가 단축법으로 그린 천사의 모습은 어찌나 대담했던지, 특히 이 책에서와 같은 작은 복제판 에서는 거의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는 무대의 공간을 암시하는 이런 기하학적인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중요한 새로운 방법, 즉 빛의 처리를 더해주고 있다. 중세 미술가들은 거의 빛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앞에 서 있는 군인은 밝게비추어진 천막 입구를 배경으로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이 군인들과 천사로부터 발산되는 빛을 받고 앉아 있는 호위병과의 거리를 침작할 수 있다. 천막의 둥근 형태와 그 내부의 텅빈 공간은 단축법과 원근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빛을 수단으로 해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피에로는 빛과 그림자로 하여금 앞의 다른 기법들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행하도록 만들었다.이러한 빛과 그림자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계시를 받고 있는 깊은 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조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사초의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피에로를 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상적인 단순성과 고요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도판 171은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가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재치나 본능을 통해서가 아니라정확한 규칙을 써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시도가 전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또 그림 자체도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그 무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중하게 덤벼들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그림은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이다. 성인은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고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이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인들은 뾰족한 삼각형 구도 속에 매우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각 맞은편에 비슷한 모습으로 대비되어 있다.

배치는 지나치게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분명하고 좌우 대칭적이다. 화가는 그러한 결합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변화를 주려고 노려했다. 즉 활을 조정하고 있는 집행인 중의 한 사람은 정면에서 그리고 그와 대칭을 이루는 사람은 뒤에서 본 모습으로 그렸다. 활을 쏘고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방식으로 처리했다. 화가는 이처럼 단순한 방법으로 구성의 생경한 대칭을 완화시키고, 마치 음악 작품에서처럼 운동과 반운동(動)의 느낌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상당히 의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그 구성이 어딘가 연습같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동일한 모델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보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근육과 운동감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그림의 진짜 주제를 잊어버리게 한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더군다나 폴라이우올로는 그가 성취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거의 성공시키지못하고 있다. 배경에 있는 토스카나의 풍경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있기는 하지만, 그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순교가 집행되고 있는 전경의 언덕과 배경의 풍경을 연결시키는 길은 하나도 없다. 만약 폴라이우올로가 중간 색조나 황금색 배경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성했더라면 그가 더 잘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편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icelli : 1446-1510)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도판 172>을 묘사하고있는 그림이다.

170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1460년경, 프레스코의 부분, 아레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

171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47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291.5 x 202.6 cm, 런던 국립미술관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쳐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 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즉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p264

172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 x 278.5 cm, 피렌체 우피치

173 게라르도 디 조반니, <수태고지와 단테의 "신곡"의 장면들>, 1474-6년 사이, 미사 전례서의 한 페이지,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삶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보다 풍부하게 해주는 미술의 이와 같은 기능이 전적으로 잊혀졌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도래하면 그 기능은 점점 더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프레스코를 제작하는 화가와 안료를 빻는 도제'를 포함한 도판의 전체>, 1465년경, 수성좌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의 직업을 설명하는 피렌체의 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