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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5 조화의 달성 :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by 2mokpo 2023. 3. 28.

15 조화의 달성 :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이탈리아 사람들은 15세기를 그 특유의 말솜씨로 '콰트로첸토' '400년대'라고 부른다.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미켈란제로 (Michelangelo), 라파엘로 (Raffaello), 티치아노 (Tiziano), 코레조 (Correggio)와 조르조네 (Giorgione), 북유럽의 뒤러 (Dürer)와 홀바인 (Holbein)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우리는 이런 거장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런 질문은 하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천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차라리 천재의 존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 이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의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이 위대한 시기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들이 이렇게 많은 천재들을 일시에 갑자기 개화시킬 수 있었는지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의 시작을 이미 조토의 시대에서 보아왔다. 당시 조토의 명성은 대단했으므로 피렌체 자치주에서는 그를 지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서로 이 유명한 대가에게 그 도시의 대성당들의 종탑 설계를 위촉하려고 애를썼다.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던 이들 도시가 가졌던 자부심은 거장들로 하여금 서로 남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이탈리아에 비해 도시들이 누렸던 자유도 제한되었고 지역적 자부심도 강하지 못했던 북유럽의 봉건 영주의 나라에서는 이런 자극이 이탈리아만큼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더 이상 그들은 신발이나 찬장이나 그림 등을 가리지 않고 주문만 받으면 즉각 수행할 차비를 갖추고 있는 그런 장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186 카라도소, <부라만테의 거대한 돔 건축 설계를 보여주는 신축 성 베드로 성당 건립을 위한 메달>, 1506. 브론즈, 직경 5.6cm,

187 도나토 브라만테, <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템피에토>, 1502. 로마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성당 내

 

알베르티는고대의 '기둥 양식'을 근대 도시의 궁전에 결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건축가들 중의 한 사람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무색케 할 당당한 건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전통과 편의성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유력한 후원자를 만났을 때 그것은 정말 기념할만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때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 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이 이 일을 맡긴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열렬한 옹호자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였다. 지금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그의 건축물 중의 하나인 도판 187을 보면 그가 독창성 없는 모방자가 되지 않고 얼마나 고전 시대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잘 소화해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가 '작은 신전으로 부르던 예배당인데 동일한 양식으로 된 회랑이 이 예배당을 둘러싸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짓지는 않았다. 이것은 작은 정자의 형태를취하고 있는데, 계단 위에 둥근 건물을 세운 뒤 둥근 지붕을 얹었고 주위에 도리아식 열주를 두르고 있다. 처마 장식띠(comice) 위에 이어진 난간은 이 건물 전체에 경쾌하고 우아한 맛을 더해주고 있으며 실제 예배당의 작은 건물과 장식적인 열주는 고대 신전들이 그러하듯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후 교황은 이 거장에게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겼는데 그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에서 정말 놀랄만한 업적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브라단테는 일천 년 동안 내려온 서유럽의 전통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서유럽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교회는 미사가 집전되는 주() 제단이 동쪽으로 향해 있는 장방형의 홀이 되어야 했다.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계획은 실행되지 못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건물이 돈을 너무 많이 삼켰기 때문에 충분한 기금을 모으려 애쓰다가교황은 종교 개혁을 유발시킬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독일의 루터로 하여금 최초의 공개 항의를 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금을받고 면죄부를 판매한 행위였다.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조차도 브라만테의 계획에대한 반대가 커지고 있었다. 교회 건물이 상당한 진척을 보일 무렵 사방이 대칭인교회를 짓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 거대한 규모를 제외하고는 원래의 계획과 일치되는 것이 거의 없다.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계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기상은 그토록 많은 위대한 거장들을 배출한 15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므로 분명히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낼 때가 있었다. 다시 한번 이 위대한 시대의 몇몇 대표적인 거장들을 배출한 곳은 바로 피렌체였다. 1300년경의 조토 시대와 1400년대 초의 마사초 시대 이래로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전통을 키워나갔으며 또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들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앞으로 우리는 위대한 미술가들이 거의 모두 이처럼 단단하게 확립된 전통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게 될 텐데 이러한 거장들 뒤에는 그 기술의 대부분을 습득할 수 있게 해준 군소 대가들의 공방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유명한 거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에서 화가이며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 1435-88)가 경영하는 유수한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베로키오의 명성은 당시 대단히 유명했으므로 베네치마 시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기념물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콜레오니는 베네치아 장군의 한 사람으로 그의 특별한 무공 때문이라기보다는 많은 자선기관을 세워준 것을 시민들이 감사하게 생각하여 기념물 제작하게 된 것이다. 베로키오가 만든 기마상(도판 188-9) 은 그가 도나텔로의 전통을 이어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말의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또 얼마나 명확하게 콜레오니의 얼굴과 목의 근육을 관찰했는가를 보게 된다.

188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 1479. 청동, 높이 395cm, 베네치아 산조반니에 파올로 광장

 

189 도판 188의 세부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단순히 재주가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의 강력한 정신력은 범인들에게 항상 경의와 감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천재였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과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보존해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과 노트북을 보면서 그의 정신의 활동 범위와 그 엄청난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그 속에는 그가 쓴 글과 소묘, 그가 읽은 책에서 발췌한 글들, 쓰려고했던 초고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한 인간이 각기 다른 연구 분야에서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으며 또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었는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그 이유의 하나는 레오나르도가 교육받은 학자가 아니라 피렌체의 한 미술가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은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는 거의 모르고 그리스어는 전혀 몰랐다. 대학의 학자들이 존경받는 고대 저술가들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을 때에 화가인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 (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레오나르도를 이상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면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군주들과 장군들은 이 놀라운 마술사를 성채와 운하의 건설, 새로운 무기와 장치를 만드는 군()의 기사로 등용하고자 했다. 평화시에 그는 자신이 발명한 작동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그리고 무대 공연과 구경거리를 위한 새로운 장치를 꾸며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위대한 미술가로 존경받았고, 훌륭한 음악가로 추앙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지식의 범위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레오나르도가 그의 저술을 한번도 출판한적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러한 그의 저작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그는 왼손잡이였으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서 그의 글은 거울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발견들을 남에게 밝히기를 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음직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훗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說)을 예견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그의 만족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연구와 실험을 해나갔으며, 일단 그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면 아직도 탐구해야 할 다른 많은 신비가 있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190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해부학 연구, 후두부와 다리>, 1510,. 종이에 펜과 갈색 잉크 및 검정 분필과 담채, 26 X 19.6cm, 

불행하게도 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원숙기에 완성시킨 몇 개의 작품들만이 보존 상태가 대단히 나쁜 채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벽화, <최후의 만찬도판 191-2)의 잔영을 볼 때는 수도사들을 위해서 그려진 이 그림이 당시에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 졌을지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는 어떠하였으며, 또 수도사들의 긴 식탁과 나란히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식탁이 벽 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눈앞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야기가 이처럼 가깝고 실감나게 그려진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또 하나의 홀이 수도사의 홀과 이어져 그 안에서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지고 손을 대면 만져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식탁 위에 떨어지는 빛은 얼마나 또렷했으며 또한 그 빛이 얼마나 인물들의 입체감을 살려주었을까? 아마도 수도승들은 식탁 위에 있는 접시나 의상의 주름 등의 모든 세부가 실감나게 묘사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일반인들은 미술작품을 그것이 실물을 어느 정도 닮았느냐에 따라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첫 반응에 불과했으리라 수도승들은 그림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환상에서 깨어 그 비범함을 충분히 감탄한 뒤에는 레오나르도가 어떤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끌고 갔는지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조도처럼 성경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하자 사도들이 너무 슬퍼서 모두가 예수께 주여, 나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마태오 복음 2621-22)이 과연 어떠했을까를 눈 앞에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요한 복음 에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323-24)라는 대목이 추가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운동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이 질문과 몸짓이었다. 예수는 방금 비극적인 말을 했고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계시를 듣고 공포에 놀라 뒤로 움츠리고 있다. 어떤 사도는 그들의 사랑과 죄없음을 호소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를 지칭했는지를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 다른 사도들은 예수가 방금 말한 것을 설명해달라고 예수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중에 성미가 급한 성 베드로가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성 요한에게 달려간다. 그가 무엇인지를 성 요한의 귓속에 속삭일 때 무심코 유다를 앞으로 떼밀어 유다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지는 않았으나 고립되어 보인다. 유다만이 몸짓도 하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는 몸을 젖히며 의심과 분노에 찬 모습으로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의 모습은 이 갑작스러운 소란 속에 조용히 체념한 듯 앉아있는 예수의 모습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 모든 극적인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는 완벽한 예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인 <모나리자>(도판 193)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와 같이 지나치게 유명한 명성은 그 예술 작품을 위해서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림엽서나 심지어 광고에서조차도 모나리자를 보아왔으므로 그것을 실제 화가가 살과 피를 가진 실존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참신한 눈을 가지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에관해서 아는 것이나 안다고 믿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도판으로도 그 이상한 효과를 경험할 수 있지만 파리의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원화 앞에 서서 보면 거의 불가사의하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아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 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상당히 신비스럽게 들리겠지만 위대한 예술 작품 중에는 그

런 효과를 내는 것들이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 뒷벽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이는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192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마찬>, 1496~98. 회반죽에 템페라, 460 x 880cm,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수도원 식당 벽화

 

193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 리자>, 1520년경. 목판에 유채, 77 x 53cm, 파리 루브르

194 도판 193의 세부

16세기(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45년을 더 살았다. 그의 긴 생애동안에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정도는 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도 다른 장인들과 같은 훈련 기간을 지냈다. 그는 13살의 소년으로 콰트로첸토 말엽 피렌체의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 1449-94)의 분주한 공방에 들어가 3년 간 도제 생활을 했다. 기를란다요는 천재적인 작가의 위대함보다는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흥미있게 반영해주는 작품들을 남겨 우

리들을 즐겁게 해주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도판 195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으로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축하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서 15세기 말의 한 화려한 저택의 내부와 상류 사회숙녀들의 의례적인 방문 장면을 보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 눈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미술의 테마를 좋아했는데 실내의 배경에 고전 양식으로 춤추는 아이들의 부조를 그려놓은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바티칸 에는 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지은 시스티나 채플(Sistina Chapel, 도판 196)이라 불리는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이 예배당의 벽면은 화가들, 예를 들어 보티첼리, 기를란다요와 같은 전() 세대의 가장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궁륭형 천장은 아직 아무 그림이 없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천장에 그림을 그려넣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주문을 맡지 않으려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자신이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달갑지 않은 주문이 적들의 음모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교황이 완강하게 버티자 그는 할 수 없이 벽감들 속에다 12사도들을 그려 넣는 아주 간단한 설계에 착수해서 피렌체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도와줄 조수들을 불러 고용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예배당 안에 혼자 틀어박혀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을 혼자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청의 한 예배당 안의 받침대 위에서 4년 간의 고독한 작업 끝에 이룩해 놓은 것 도판 198)을 보면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한 개인이 그만한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예배당 천장에 이 거대한 프레스코를 그리기 위해 이 장면들의 세부를 준비하고 스케치한 뒤에 그것을 벽면에 전사하는 데 요구되는 육체적인 노력만도 상상을 초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천장화이므로 미켈란젤로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위를 쳐다보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실제로 그는 비좁은 공간에서의 자세에 익숙해져서 이 시기에는 편지를 받아도 그것을 머리 위에 쳐들고 몸을 뒤로 제치고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이처럼 거대한 공간을 그림으로 채운 한 사람의 육체적인 작업도 그의 지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업적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은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작품의 세부 도판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 전부를 제대로 알기에는 부족하다. 예배당 안에 들어섰을 때 그 전체가 주는 인상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진과는 대단히 상이하다. 예배당은 얕은 궁륭 천장을 가진 대단히크고 높은 강당처럼 생겼다. 벽 윗부분에는 미켈란젤로의 선배들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그린 모세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의 그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천장을 쳐다보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인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예배당 양쪽 벽의 5개 창문 사이에서 시작되는 궁륭 천장에 유태인들에게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는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과 그 사이사이에 이교도들에게 예수의 재림을 예언했다고 전해지는 무녀들의 거대한 그림을 그려넣었다. 그는 이들 예언자들과 무녀들을 깊은 사색에 잠겨 있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논쟁을 하거나 혹은 그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형상들을 하고 있는 초인간적인 남녀의 상으로 표현하였다. 등신대보다 더 큰이들 인물상들이 열지어 있는 사이의 천장 꼭대기에는 천지 창조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작업조차도 늘 새로운 형상들을창조하려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 또다시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넣었다. 이들 중에는 조각상 같은 사람도 있으며,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살아 있는 듯한 청년들도 보이는데, 그들은 장식을휘감고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는 커다란 원형 메달을 잡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그림의 중앙 부분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 이외에도 궁륭 천장의 바로 밑부분에 그는 무한히 다양한 남녀의 모습을 끝없이 이어놓았는데 그것은성경 속에 열거된 예수의 조상들을 그린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이처럼 많은 인물상들을 보면 천장 전체가 혼란스럽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리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스티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서그 천장화를 단순히 하나의 훌륭한 장식으로만 생각하고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화로운지 그리고 전체의 짜임새가 얼마나 명료한지를 발견하고는 대단히놀라게 될 것이다. 1980년대에 거기에 쌓인 그을음과 먼지의 두터운 층을 제거한 이래로 그 강렬하고 밝은 색채가 드러났는데, 그토록 좁고도 적은 수의 창문을 지닌 이러한 예배당에서 그 천장화가 보일 수 있게 하려면 당연히 밝게 채색해야 했을 것이다(이 점은 오늘날 그 천장화에 비추어지는 강력한 전기불빛 속에서 그림을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다.

도관 197 은 천장을 가로지르는 궁에 그려진 그림의 일부로 미켈란젤로가 천지 창조 장면의 양쪽에 있는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해 놓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쪽에는 어린아이가 받쳐주고 있는 커다란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방금 읽은 것을 기록하려고 몸을 돌리는 예언자 다니엘이 있다. 그의 옆으로는 책을 뚫어지게보고 있는 쿠마이의 무녀가 있다. 반대편에는 오리엔트 풍의 의상을 입은 늙은 여자인 '페르시아' 무녀가 성경을 눈 가까이 갖다 대고 성경의 구절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논쟁을 벌이는 듯 격렬하게 몸을 왜 돌리고 있는 구약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그려져 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대리석 의자에는 장난치는 아이들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며 그 위 양쪽에는 커다란 메달을 천장에 화려하게 달아매려고 하는 나체 인물상들이 둘씩 짝지어져 있다. 또 삼각 소간에는 경에서 전해지는 예수의 조상들이 구부린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이들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이 젊은 운동 선수들은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몸을 들어 돌리고 있으나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장에는 자그만치 20여 명의 이런 인물상이 있는데 하나하나가 그 이전 것보다 더우리는 그가 탁월한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가 가장 선훌륭해 보인다. 카라라의 대리석으로부터 그가 소생시키려 했던 많은 이미지들이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연출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모든 세부를 얼마나 세심하게 연구하였으며 소묘를 통해각 인물상들을 얼마나 주의깊게 준비했는지 잘 알고 있다. 도판 199는 그의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인데 그는 무녀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거장들 이래로 아무도 관찰하지 못했고묘사하지도 못했던 꿈틀거리는 근육의 작용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된다. 이들 유명'나체화들'을 통해서도 그가 비길 데 없는 거장임을 보여주었겠지만 그보다는성서의 테마들을 묘사한 천장화의 중앙 부분들을 통해서 그는 더욱 상상할 수조차

없는 위대한 거장임이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힘찬 몸짓으로 초목들과, 해와 달과 같은 천체들과 동물들과 인간들을 불러내는 조물주의 모습을본다.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천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수십 세대를 통해서 각인되어 떠오르는 하느님 아버지의모습은 미켈란젤로가 그의 천지 창조에서 그려보인 그 위대한 비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하여도 절대로 그것은 과언이 아니다. 가 그린 창세기의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것은 그 커다란 구획들 중 하

나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도판 200)이다. 미켈란젤로 이전의 미술가들도 땅 위에 누워 있는 아담을 하느님이 손을 대기만함으로써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그림들을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린 바 있지만 아무도 이처럼 간단하고 힘차게 위대한 창조의 신비를 표현하지는 못했다. 이 그림에는 우리의 시선을 주제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답게 힘차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땅 위에 누워 있다. 반대편에서는 아버지 하느님이 천사들의 부축을받으며 다가오고 있다. 돛과 같이 바람에 나부끼는 넓고 장엄한 망토를 입고 있는모습은 허공을 빠르고 쉽게 날아다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이 손을 뻗치자아담의 손가락에 채 닿기도 전에 이 최초의 사람은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듯 그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느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의 손길을 이 그림의 중심에 두어 초점으로 만들고 의연하고 힘찬 창조의 모습을 통해서 신의 전지전능함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법은 미술의 가장 위대한 기적 중의 하나이다.

미켈란젤로는 1512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곧 올라온2세의 영묘 건립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대리석 조각에 착수했다. 그는 그 영하였다. 그는 이 군상들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계획하였던 것 같다. 이들중의 하나가 도판 201에 보이는 <죽어가는 노예>이다.

 

197 메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 일부

 

199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정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 1510년경. 황갈색 종이에 빨강 분필, 28.9 x 21.4cm, 

200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도판 198의 부분

 

시스티나 천장화에서의 엄청난 작업 끝에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이 고갈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로 작업할 수 있게 되자그의 능력은 더욱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력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201 미켈란젤로, <죽어가는 노예>, 1513년경. 대리석 높이 229cm, 파리 루브르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Urbino)

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바로 라파엘(Raphael)로 알려져 있는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1483-1520)였다.

는 소위 '움브리아 파 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Perugino : 1446-1523)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미켈

란젤로의 스승 기를란다요나 레오나르도의 스승 베로키오와같이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도 주문 받은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줄 솜씨 좋은 많은 도제들을 필요로 했던 대단히 성공한 미술가들의 대열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일반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런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도판 202는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봉헌된 제단화이다. 성자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성모를 보기 위해 책을 보던 것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성이 그토록 단순한 데도 거의 완벽한 좌우 대칭의 구도에는 딱딱하거나 무리가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 인물들은 조화로운 구도를 이루는 가운데 적절히 배치되어 각자가 조용하고 편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페루지노가 이 아름다운 조화를 얻기 위해서 희생시킨 것이 있다. 즉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이 그처럼 정열적인 애착을 가지고 추구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루지노의 천사들을 잘 살펴보면 그 천사들이 다소 동일한 유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페루지노가 창안해서 항상 새롭게 변화시켜가며 그의 그림에 이용했던 아름다움의 한 전형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너무 많이 보게 되면 그의 창안에 식상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미술관에 나란히 진열하기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작품 하나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의 작품들 중 뛰어난 몇몇 그림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계보다 더 평화롭고 조화로운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스승의 화풍을 재빨리 익히고 흡수한 젊은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와서 가슴 설레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자기보다 서른한살 위인 레오나르도와 여덟 살 위인 미켈란젤로가 그 이전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미술의 새로운 차원을 확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젊은 미술가라면 이거장들의 명성에 압도되어 기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배우기로 결심을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는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을 갖지 못했고 또 미켈란젤로와 같은 정력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려웠고, 그들에게 또한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이 선배 거장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훌륭한 그림들은 조금도 힘이 들어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그것이 힘들고 혹독한 작업을 거쳤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단지 감미로운 성모상을 그리는 화가로 인식되어 있으며 그 성모상은 너무나 잘 알려져서 더 이상 하나의 그림으로 평가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조물주가 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만인에게 각인되었듯이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상도 후대들에게 성모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리는 성모상의 값싼 복제품들이 초라한 집안에도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처럼 일반적인 호소력을 지닌 그림들은 반드시 어딘가 '알기 쉬운'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다. 사실상 이 그림들에서 보이는 외견상의 단순함은 깊은 생각과 세심한 계획, 엄청난 예술적인 지혜의 결과로나타난 것들이다. 라파엘노의 <대공(大公)의 성모(도판 203)와 같은 그림은 수세대에 걸쳐서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완전함의 기준으로간주되어 왔다는 점에서 진실로 '고전적' 이다. 그것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그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그림을동일한 테마를 다룬 그 이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그이전 작품들도 모두 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에서 획득한 그런 단순성을 추구하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인물 유형의 조용한 아름다움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의 어딘가 공허한 듯한 규칙성과 제자의 그림에서 보이는 충만한 생명력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체감 있게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확고하고 애정어린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약간만변경해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같이보인다.

라파엘로는 수년간 피렌체에 머문 뒤 로마로 갔다. 그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아마도 1508년인 것 같은데 이 때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착수했을 무렵이다. 율리우스 2세는 곧 이 젊고 귀염성 있는 미술가에게도 일감을 찾아주었다.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궁 안의 스탄차(stanza,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들의 벽면을 장식하는 일을 맡겼다. 라파엘로는 이 방들의 벽과 천장에 있는 일

련의 프레스코에서 완전한 디자인과 균형 잡힌 구성의 탁월한 솜씨를 증명해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감상하려면 그 방 안에 한참 머물러 서서 하나의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에 대응하고,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에대응하는 전체적인 짜임새의 조화와 다양성을 느껴보아야 한다. 이 그림들을 이방 밖으로 끌어내어 축소된 도관을 통해 보면 딱딱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프레스코를 직접 볼 때는 등신대로 서 있던 개별적인 인물들이 축소된도관에서는 여러 인물 군상들 속에 흡수되어 잘 분간하지 못하게 되기가 쉽기 때

문이다. 그와 반대로 전체에서 '세부' 만을 따로 찍은 도판에서는 인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중요한 역할, 즉 전체적인 구성의 우아한 선율의 일부를 형성하는 역할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부유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 (지금은 빌라 파르네지나라고 불린다)에 그린 보다 작은 규모의 프레스코(도판 204)에는 앞의 경우가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는 피렌체의 시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에서 주제를 따왔는데, 그 시는 또한 보티첼리에게 영감을 주어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게했던 시이기도 하다. 그 시는 못생긴 거인 폴리페모스가 아름다운 바다의 요정 갈라태아에게 사랑의 노래를 바치지만 그녀는 그의 거친 노래 솜씨를 조롱하며 두마리의 돌고래가 끄는 수레를 타고 파도 위를 달려가고, 바다의 다른 신들과 요정들은 즐거운 무리를 이루어 그녀의 주위로 모여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는 즐거운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갈라테아를 그리고 있다. 인의 그림은 이 홀의 다른 곳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아름답고 유쾌한 그림을아무리 오래 보아도 우리는 이 그림의 풍요롭고 복잡한 구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각 인물상은 서로 다른 인물상과 대응하며 또다른 움직임은 제각기 그와 상반되는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이러한 방법을 폴라이우올로의 걸작(p. 263, 도판 171)에서 보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의 해결 방법은 오히려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큐피드의활과 화살을 들고 요정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작은 소년들부터 살펴보자. 하늘 위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큐피드 둘은 서로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되고 있으며또한 수레 옆에서 헤엄치고 있는 큐피드와 그림 맨 위를 날고 있는 큐피드가 서로대응을 이룬다. 갈라테아 주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신들의 무리도 마찬가지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조개 껍질을 불고 있는 해신이 둘 있고 그 앞쪽과 뒤쪽으로 각각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해신들이 두 쌍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감탄할 점은 이 모든 다양한 움직임들이 갈라테아의 모습에 반영되어 있고 그 속에 흡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타고 있는 수레는 그녀의 베일을 뒤로 날리며 그녀를 싣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고 있으나 괴이한 사랑의 노래를 듣자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미소를 짓는다. 큐피드의 화살에서부터 그녀가 잡고 있는고삐의 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들은 바로 화면 중앙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로 모인다. 이러한 또 하나의 미술적인 수단에 의해서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

의 숙련된 솜씨로 인해 후대의 미술가들이 라파엘로를 그처럼 찬양했던 것이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 <요정갈라테아>를 완성했을 때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도대체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

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어떤 특정한 모델을 모사한 것이아니라 그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202 페루지노, <성 베르나스두르에게 나타난 성모>, 1490~4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73 x 170cm, 뮌헨 아테 피나코텍

 

203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1505년경, 목판에 유채, 84 x 55cm, 피렌체 피터 궁

 

204 라파엘로, <요정 갈라테아>, 1512-14년경. 프레스코, 295 x 225cm, 로마 비라 파르네지나의 벽화

 

205 도판 204의 세부

 

206 라파엘로,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1518. 목판에 유채, 154 x 119cm, 피렌체 우피치 미술

 

[출처] [미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Story of Art)> 15 조화의 달성 (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작성자 다이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