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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9.전투적인 교회 : 12세기

by 2mokpo 2023. 2. 7.

연대()는 역사라는 태피스트리를 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못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1006년이라는 연대(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한 해 -역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점으로 미술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영국에는 색슨 시대의 건물들 중에서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유럽에도 그 시기의 교회가 잔존하는 예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영국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제들과 귀족들은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건물들을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Noman)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년교회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시골의 몇몇 옛 마을에서 겨우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는 그 부근에서는 유일한 석조 건물이었으며 몇 마일에 걸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물이었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첨탑이 하나의 이정표였다. 일요일과 예배가 행해지는 기간에는 마을의 온 주민들이거기에서 만났을 것이고, 이 높은 건물과 주민들이 살았던 원시적이고 초라한 집들과의 대조는 가히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이 교회 건물에 관심을 가졌고 또 그 교회의 장식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경제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회 건물의 건축은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돌을 채석()해서 그것을 운반하는 일, 적당한 골조()를 세우는 일, 그리고 먼 고장의 소식을 전해주는 떠돌이 장인(匠人), 이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에는 큰 사건이었다.

암흑 시대 라고는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 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후진(apse)과 성가대석(choir)에 이르는 중앙의 신랑(身廊), 그리고 그 양쪽의 이중 또는 사중의 측랑(測廊)으로 이루어지는 평면 설계는 그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간단한 평면 설계를 몇및 부속물을 붙여서 화려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어떤 건축가들은 교회를 십자형으로 짓는다는 발상에서 성가대석과 신랑 사이에 수랑袖廊, transept)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첨가했다. p171

 

111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뮈르바크의 베네딕투스 교단 수도원 유적>, 1160년경, 알사스

일반적인 인상은 옛날 바실리카와는 대단히 달랐다. 초기의 바실리카에는 수평의'엔타블레이처' 를 받쳐주는 고전적인 원주(圓柱)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나 노르만 식 교회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육중한 각주(角柱, pier)가받쳐주는 둥근 아치들이다.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었다(도판 111). 이교도(異敎徒)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 전에 개종한 농민과 전사(戰士)들의 땅에 세워진이 강력하고 거의 도전적인 석조 건물들은 바로 '전투적인 교회' 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도판 112). 

 

112 <중세 도시 속의 교회; 투르네 대성당>, 1171-1213, 벨기에

바실리카 성당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목조 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이날 경우 쉽게 타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 궁륭(둥근지붕)을 올리는 로마의 기술은 이미 대부분 잊혀지고 만 대단히 엄청난 양의 기술적인 지식과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1세기와 12세기는 끊임없는 실험의 시기가 되었다. 주 신랑의 전체 폭을 궁륭으로 덮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강에 다리를 걸치는 것처럼 신랑의 양쪽 기둥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 다리의 아치를 떠받치게 될 엄청

나게 큰 기둥들이 양편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궁륭이 무너지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견고하게 접합을 시켜야 하고 또 거기에 필요한 돌의 무게가 엄청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처럼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려면 벽과 기둥들을더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 초기의 '터널(tunnel)' 식 궁륭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양의 석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르만 건축가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붕 전체를 그렇게 무겁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로지르는 몇개의 단단한 아치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 nib)' 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얼마 안 가서 건축 방법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이 발상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르만 양식의 더럼 (Durham) 대성당 (도판 114)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노르만 정복 직후 이 대성당의 호사스런 내부 공간을 덮는 최초의 '늑재 궁륭 (rib-vault)' (도판 113)을 고안해낸 건축가는 그것의 기술적인 가능성은 거의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p175

113 <더럼대성당의 신랑(nave)과 서쪽 정면>, 1093-1128(궁륭은 나중에 본래의 설계대로 완성>, 노르만 양식의 대성당

 

114 <더럼대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에 조각 작품들로 장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였다.

남 프랑스의 아를 (Arles)에 있는 12세기 말의 성 트로핌 (Trophime) 대성당의 현관 (도판 115)은 이 양식의 가장 완전한 예 중의 하나이다. 이 형태는 로마의 개선문의 원칙을 상기시켜준다. 팀파눔 (tympanum)이라고 불리 우는 현관의 상인방 (上引枋, lintel) 윗부분 (도판 116)에서 우리는 네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인 사자, 천사, 독수리, 황소에 둘러싸여 있는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이 네 개의 상징들, 즉 사자는 성 마르코, 천사는 성 마테오, 독수리는 성 요한, 황소는 성 루가로 이것은 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4-12)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에스겔은 인간과 사자와 황소와 독수리의 머리를 가진 네 가지 동물들이 운반하는 하느님의 왕좌를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네 사람의 복음서 저자를 의미하고 그러한 환상이교회의 입구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상인방에는 열두 제자들의 좌상(坐像)이새겨져 있고, 그리스도의 왼쪽 아래로 쇠사슬에 얽매인 벌거벗은 사람들이 줄지어서 있는데 이들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길잃은 영혼들임을 알 수 있으며 오른편 아래로는 영원한 기쁨 속에 얼굴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이 일렬로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성인들의 엄격한 모습들이 보이는데 각 상은 그의 독특한 상징으로 표시되어 있어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자 앞에섰을 때 중재해줄 수 있는 성인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지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의최종적인 목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이 교회의 현관에 새겨진 조각들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조각은 설교자의 설교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남았다. 중세 말의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çoisVillon)은 그의 어머니에게 바친 감동적인 시에서 이 효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p176

115 <아를의 성 트로핌 대성당의 정면>, 1180년경, 남프랑스

 

116 <영광의 예수>, 도판 115의 세부

교회 내부의 모든 부분들도 그 목적과 의미에 맞게끔 세심하게 고안되었다. 도관 117 1110년경에 글로스터(Gloucester) 대성당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촛대이다. 괴물과 용들의 서로 꼬인 모양은 우리에게 암흑시대의 작품들(p. 159,161, 도판 101, 103)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더 정확한 의미가 이 무시무시한 형상들에게 주어졌다. 촛대의 맨 윗부분에 새겨진라틴 어 명문은 대충 이러한 의미이다. “이 빛을 담는 그릇은 미덕의 산물로 빛을 발함으로써 그 빛이 인간으로 하여금 악에 눈이 멀지않도록 교리를 설교한다.” 실제로우리가 이 괴상한 동물들이 뒤엉켜있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서도 교리를 표시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들(불쑥 나온 중간 부분)뿐만 아니라 또한 벌거벗은 인간상들도 볼 수 있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p110, 도판 69)처럼 사람들은 뱀과 괴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나 그들의 싸움은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둠속을 비치는 빛이 그들로 하여금 악의세력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17 <글로스터 대성당의 촛대>, 1104-13년경, 도금 청동, 58.4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벨기에의 리에주 (Liege)에 있는 한 성당의 세례반 (洗禮盤, 1113년경)은 신학자들이 미술가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역할을 보여준 또 다른 예이다 (도판 118). 놋쇠로 만든 이 세례만 은 중앙 부분에 세레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주제인 그리스도의 세례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거기에는 모든 인물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라틴어 명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요단강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구원의 천사들 (Angels ministrantes)'이라는 명문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세부에 주어진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명문들 뿐만이 아니다. 세례반 전체에도 어떤 의미가 주어진다. 이 세례반을 떠받치고 있는 황소들조차도 단순한 장식만을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역대기하 24) 솔로몬 왕이 어떻게 해서 놋쇠 주조 전문가인 노련한 일꾼을 페니키아의 티레에서 데려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위해서 만든 것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전한다. p178~p179p

 

118 라이네르 반 후이, <놋쇠 세례반>, 1107-18, 87cm,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 벨기에 리에주

 

예를 들면 ▼도판 119는 성모의 수태 고지(체를 묘사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부조처럼 딱딱하고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모는 정면을 향해 놀란 듯이 두 손을 들고 있으며 성령(聖靈)의 표상인 비둘기 한 마리가 높은 데서 날아와 성모 위에 내려앉는다. 천사는 반쯤 옆모습으로 보이며 오른손을 위로 뻗고 있는데 중세 미술에서는 이 자세가 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페이지를 보면서 실제 장면의 생생한 묘사를 기대한다면 아마도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 화가가 자연 형태의 모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태 고지의 신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즉 전통적인 성스러운 상징들의 배치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결핍감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이 사물을 본대로 그리려는 야심을 버리게 되면서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판 120은 독일의 한수도원에서 사용했던 달력의 한 페이지이다. 이 달력은 10월달에 기념하게 될 성인들의 주요 축일들을 표시하였는데 우리의 달력과는 달리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표시하였다. 중앙의 두 개의 아치아래에 성 빌리마루스(Willimarus) 신부와 주교의 장()을 든 성 갈(Gall)과 유랑 전도사의 보따리를 메고 있는 그의 동료가 그려져 있다. 맨 위와 아래에 있는 이상한 그림들은 10월 달에 기념하는 두 순교자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뒷날 미술이 자연의 상세한 재현으로 복귀되자 이처럼 잔인한 장면들은 소름끼치는 풍부한 세부 묘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었다. 머리가 잘려 우물 속에 던져진 성 게레온(Gereon)과 그의 동료들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이 화가는 머리가 없는 몸체들을 중앙의 우물 주위에 가지런히 배치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를 따르던 일만 일천 명의 처녀예를 들면 도판 119는 성모의 수태 고지 (受胎告知)를 묘사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부조처럼 딱딱하고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모는 정면을 향햐 놀란 듯이 두 손을 들고 있으며 성령의 표상인 비둘기 한 마리가 높은 데서 날아와 성모 위에 내려앉는다. 천사는 반쯤 옆모습으로 보이며 오른손을 위로 뻗고 있는데 중세 미술에서는 이 자세가 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p181

119 <수태 고지>, <스바비아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1150년경,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지방 도서관

120 <성 게레온 빌리마루스, 갈 및 성 우르슐라와 일만 일천 명의 처녀들의 순교>, 1137-4, 필사본 달력에서,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지방 도서관

 

색채 또한 형태와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가들은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의 농담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금세공 작품들의 빛나는 황금색과 맑은 푸른색, 필사본의 삽화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색깔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도판 121)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과 짙은 초록색들은 이 대가들이 자연으로부터의 독립을 잘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계를 모방할 필요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p183

121 <수태 고지>, 12세기 중반,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필사본과 패널화를 제작하는 미술가들>, 1200년경. 로인 수도원의 패턴 견본팩에서, 빈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