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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4. 아름다움의 세계—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by 2mokpo 2023. 1. 23.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은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사이의 백 년 동안에 일어났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서 미술가들은 그들의 실력과 숙련됨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으며 일반인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어쩌면 속물 같은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미술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미술 유과 들의 업적을 비교했다. 말하자면 각 도시 국가들의 대가들에 따라 다른 다양한 방식과 양식 및 전통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러한 유파들 사이의 비교와 경쟁이 미술가들을 자극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만들었고 또 우리가 그리스 미술에서 찬양하는 그런 다양성을 창조해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건축에서는 여러 양식들이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파르테논 신전(도판 50)은 도리아 양식(Doric style)으로 건설되었으나 그 후의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건물들에는 소위 이오니아 양식(Ionic style)이 도입되었다.

이오니아 식 신전들의 기본형은 도리아 식과 같지만 전체적인 외관과 성격은 다르다. 이러한 점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건물이 에렉테움(Erechtheum) 신전(▼도판 60)이다. 이오니아 식 신전의 원주들은 도리아 식 신전의 원주들보다 견고하고 강한 느낌이 훨씬 덜하며 보다 날렵하고 가냘픈 기둥으로 보인다. 주두(柱頭, capital)는 더 이상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쿠션 형태가 아니라 양 옆이 나선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이 장식이 다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를 지탱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오니아 식 건물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세부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한없이 우아하고 아늑한 인상을 준다.

도판60 <이오니아식 신전 에렉테움>, 기원전 420-405년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이와 같이 우아하고 아늑한 특징은 이 시대의 조각과 회화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페이디아스 이후의 세대에서 시작된다. 이 시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필사적인 전쟁에 휘말려드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와 그리스의 번영은 종말을맞게 된다.

잠깐 동안의 평화가 지속되던 기원전 408 년에 조각 장식을 한 난간이 아크로폴리스에 승리의 여신상을 안치한 작은 신전에 보태졌는데 그 조각과 장식은 이오니아 양식에서 보여지는 섬세함과 우아함으로 그 취향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새겨진 인물상들의 손발은 무참히 절단되어졌지만 나는 그들 인물상 중의 하나(▼도판 61) 를 예시함으로써 머리나 손이 없는 파손된 상태의 이 작품이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승리의 여신들 중의 하나인 이 소녀상은 걸어가다가 느슨해진 샌들의 끈을 조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다. 갑자기 멈춰선 자태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아름다운 몸체 위를 흐르는 옷 주름은 얼마나 부드럽고 풍부한가!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에서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 표현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작이나 단축법의 묘사에 더 이상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기교의 완숙이 이 조각가를 다소 자의식을 갖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pp. 92-3, 도판 56-7)를 만든 조각가는 그의 예술이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필요 이상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는 그의 작업이 의식(儀式)의 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명확하게, 그리고 가장 잘 표현하려고 고심했다. 그는 자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화제의 대상이 되는 그런 거장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빅토리 신전(Victory Temple)의 프리즈는 아마도 이 같은 태도 변화의 시초를 보여주는것 같다. 이 조각가는 그의 훌륭한 능력을 자랑으로 생각했으며 사실 그럴만도 했.

이리하여 기원전 4세기 미술에 대한 접근방식이 점차 변해갔다. 페이디아스의 신상들은 그리스 전역에 걸쳐서 신의 표상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에 비해 기원전 4세기의 큰 신전의 조각상들은 미술 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더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제 교양 있는 그리스 인들은 시와 연극을 논의하던 것처럼 회화와 조각에 대해 토론했으며 섬세하고 우미한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그것들의 형태와 착상을 비판했다

도판61. <승리의 여신>, 기원전 408. 아테네 빅토리 신전 주위의 난간 부분, 대리석, 높이 106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도판62. 프락시텔레스,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기원전 340년경. 대리석, 높이 213cm,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의 매력과 감미롭고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찬양했던 그의 가장 유명한 걸 작품은 사랑의 여신인 젊은 아프로디테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19세기에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한 작품(도판 62, 63)을 그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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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프락시텔레스와 그리스의 다른 미술가들은 지식을 통해서 이런 아름다움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처럼 이토록 균형 잡히고 잘 생기고 아름다운 살아 있는 육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많은 모델들을 관찰해서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점은 빼버리고, 실제 인물의 외모를 조심스럽게 모사하면서 완벽한 인체라는 이념에 일치하지 않는 불규칙성이나 특징들을 제거함으로써 인체를 미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미술가들은 수백 년을 통해서 고대미술의 껍데기에 보다 많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프락시텔레스의 시대에 와서 그들의 수법은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능숙한 조각가의 손길을 통해서 낡은 유형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이제 진짜 사람들처럼 우리 앞에 서 있으나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보다 나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같이 보인다.()

사실 그 조각상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는 그리스 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 당시 미술은 전형과 개성이 새롭고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도판66. <알렉산더 대왕의 두상>, 기원전 325-300년경. 리시포스의 알렉산더 초상을 본뜬 대리석 모조품. 높이 41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초상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그리스 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전의 시대에도 초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각상들은 아마도 실물과 그다지 많이 닮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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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시텔레스 다음 세대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와서 이러한 제약이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해 미술가들은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고도 얼굴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개개인의 영혼의 활동을 포착하는 방법과 인상의 개인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으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초상을 만드는 것도 터득했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새로운 초상화법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한 저술가는 아침꾼들과 알랑거리는 자들의 염증 나는 꼬락서니들을 풍자하는 글에서 그들은 항상 그들 후원자들의 초상이 놀라울 정도로 실물과 꼭 닮았다고 소리 높여 칭찬했다고 쓰고있다. 알렉산더 대왕 자신도 왕실 조각가인 리시포스(Lysippus)가 자신의 초상을 조

각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당시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던 리시포스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은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은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한 복제품(도판 6)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델포이의 <전차 경주자>(도판 53-4) 시대 이후로 미술이 얼마나 많이변했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리시포스보다 불과 한 세대 전인 프락시텔레스 시대이래의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물론 모든 고대 초상에 대한 골치아픈 문제는 우리가 그 초상들이 실물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단언할 수 없다는 점에 있으며, 오히려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첨꾼들의 말보다 훨씬 더 할 말이 적다는 데 있다. 만약에우리가 알렉산더 대왕의 실제 사진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그의 흉상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리시포스의 알렉산더 상()들은 아시아를 정복한 실제의 사람 모습이라기보다는 신()의 모습과 훨씬 더 닮았다고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알렉산더와 같이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천부의 재능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계속적인 성공에 의해서 약간 거만해진 사람의 모습은 지켜 올라간 눈썹과 활기찬 얼굴 표정을 가진 이 흉상처럼 보였을 것이라고,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변화가 그리스 미술의 성격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당연한일이다. 우리는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Helenistn)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했다. 건축에 있어서까지도 도리아 양식의 간결한 형태와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원주(圓柱)가 선호되었는데 그것은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것으로 코린트(Corinth)라는 부유한 상업 도시의 이름을 따서 코린트 양식(도판 67)이라고 불렀다.

도판67 판테온 신전의 <코린트식 주두>, 기원전 300년경

코린트 양식에서는 주두(柱頭)를 장식하기 위해서 이오니아 식의 소용돌이 장식에 잎사귀 모양을 첨가했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양식은 동방(東方)에 새로 건설된 도시에 거대한 규모로 설계된 호화로운 건물과 잘 어울렸다. 그 건물들 중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후기 시대에서 유래하는 유적들은 우리들에게 장대하고 화려한 인상을 준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들의 규모 및 전통과 융합되었다.

나는 앞에서 그리스 미술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에 변화를 겪게 된다고 언급한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대략 기원전 160년경에 세워진 페르가몬(Pengamon) 시에서 발견된 제단(도판 68)이다. 여기에 표현된 군상들은 신들과 거인들과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거대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조각가는 분명히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노렸음이 분명하다. 싸움은 대단히 격렬하게 전개된다. 못생긴 거인들은 의기양양한 신들에게 압도되어 고통과 광란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모든 형상마다 격렬한 몸짓과 나부끼는 옷주름이 충만하다. 이러한 효과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이 부조는 평평한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환조의 형태로 되어 그들이 속해 있어야 할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싸움을 하면서제단의 계단 위로 넘쳐나올 것같이 보인다. 헬레니즘 미술은 이와 같이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도판69. 로데스의 하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및 폴리도로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기원전 175-50년경. 대리석 군상, 높이 242cm,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후세에 최대의 명성을 날린 고전 조각 작품들 중에는 헬레니즘 세대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1506년에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군상(▲도판 69)이 발견되었을 때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은 이 비극적인 군상의 효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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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 종교적연관성을 거의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그러한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라오콘의 비참한 운명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이 조각가에게 전혀 관심 밖 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들이 미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원작품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면 그 유명한 작품들을 복제하게 하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이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저술가들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미술가들의 생애를 글로 썼으며 그들의 기이한 행동에 관한 일화들을 수집하여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 책자들을 만들었다.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 중에는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많았으나 우리는 전해내려오는 고전 시대의미술 서적에서 발췌된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 외에는 그들의 작품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이 화가들 역시 그들의 작품이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데보다는그들의 기술에 관한 특수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가 고대 회화의 성격에 관하여 약간의 어떤 개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폼페이(Pompeii)를 비롯한 기타 장소에서 발굴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길밖에 없다. 폼페이는 부유한 전원 도시였는데 기원후 79년에 베수비오(Vesuvio)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 밑에 매몰되었다. 이 도시의 거의 모든 집과 별장에는 벽이나 원주, 전망대에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들에 끼워진 복제 그림이나 무대를 모방한 장치가 있었다.

물론 이 그림들이 다 걸 작품은 아니지만 이처럼 작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에그런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우리 시대의 해변가 피서지 하나가 매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발굴되었을 때도 이처럼 훌륭한 작품들을 그렇게 많이 보일 수 있을까?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나 스타비아이 같은인접한 도시들의 화가들과 실내 장식가들은 위대한 헬레니즘 미술가들이 이룩해놓은 업적을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그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평범한 그림들 중에서도 우리는 가끔 도관 70과 같이 대단히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그림은 마치 춤을 추듯이 꽃을 꺾고 있는 4(四季)의 여신인 아우어스(Hours) 중의 한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그림에서 목축의 신인 <▼목신(牧神)의 머리도관 71)와 같은 부분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이들 미술가들이 표정의 묘사를 다루면서 습득한 숙련과 자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71 <목신의 머리>, 기원전 2세기,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벽화의 일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폼페이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물잔 옆에 두 개의 레몬을 놓고 그린 정물화나 동물의 그림들, 심지어는 풍경화도 있다. 이것이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었을 것이다.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서는 풍경이 인간 생활이나 군사적인 원정의 배경 장면으로밖에는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이 미술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테오크리토스(Theocritos) 같은 시인들이 목동들의 소박한 삶의 매력을 발견했던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가들 또한 복잡한 도시 거주자를 위해서 전원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72 <풍경>, 1세기경. 벽화, 로마 알바니 별장

(▲도판 72). 이 그림에는 모든 것들이 매력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림의 모든 장면들은 그 자체로서 최상의 훌륭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정말 평화스러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은 우리가 얼핏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사실적이다. 만약에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난처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이 풍경의 지형적인 위치를 그려보려고 한다면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당과 별장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혹은 사당으로부터 다리는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원근법 이라고 부르는 법칙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곤 하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져가는 저 유명한 포플러가 늘어서 있는 길의 원근법이 당시 화가들의 기본적인 과제는 아니었다. 미술가들은 먼 곳에 있는 물건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데 있거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렸다. 그러나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서 대상의 크기를 일정하게 줄여가는 방법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조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도의 틀을 고전 시대 사람들은 채택하지 못했다. (--)

그리스 인들은 초기 오리엔트 미술의 엄격한 제약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관찰을 통해서 종래의 전통적인 이미지에다가 점점 더 많은 특성들을 첨가하는 발견의 항해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자연의 말초적인 세부까지 낱낱이 반영하는 그런 거울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들을 만들어냈던 지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