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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관객을 울리지 못하는 드라마는 ‘괜찮지 않다’

by 2mokpo 2014. 5. 26.

이마에 붙인다. 볼에 붙인다. 턱에도 붙이고 코끝에도 붙인다. 얼굴 구석구석 센서를 붙이고 다양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웃고, 울고, 찡그리는 배우의 얼굴이 고스란히 컴퓨터에 옮겨진다. 이 놀라운 기술을 우리는 퍼포먼스 캡처라고 부른다.

그런데 센서를 붙이고 싶어도 붙일 수 없는 부위가 있다.

그래서 끝내 ‘캡처’할 수 없는 딱 한 곳. 눈동자. 가장 최신 기술로 완성한 디지털 캐릭터조차 여전히 어색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이유다.

인간의 그 생기 넘치는 ‘눈빛’만은 아직 컴퓨터가 흉내 낼 수 없다.
서기 2029년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1)에서 미래에서 날아온 T-101(아널드 슈워제네거)은 거의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로봇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종종 인간의 눈빛으로 바라볼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이란 말 앞에서 ‘거의’라는 부사를 결국 떼어내진 못했다.

그 이유를 마지막 장면이 말해준다.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 존 코너의 눈물을 닦으며 T-101이 하는 말. “눈물은 오직 인간만이 흘릴 수 있지.

” 인간의 눈빛을 갖고 있어도 인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한, 그는 끝내 인간일 수 없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좀 더 근사한 문장으로 말했다. “눈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각하’께서도 꼭 눈물을 흘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며칠 전 유가족 앞에서 살짝 눈물을 보였는데도 여전히 여론은 좋지 않았다. 눈물이 ‘살짝’ 보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며 측근들이 자꾸 채근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날, 언제나처럼 태엽인형 같은 걸음으로 입장하신 각하는 언제나처럼 자동응답기 같은 말투로 담화문을 낭독하셨다.

이윽고 클라이맥스가 도래했을 때 예상대로(?) 각하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런데 그 눈물을 흘리는 방식이 그만 예상을 벗어나고 말았다.

눈물을 흘렸다…기보다는 그냥 눈물을 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뭐랄까. 눈의 요실금을 보는 것 같았달까?
우리 눈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남 앞에서 흘리는 눈물의 본질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훔쳐내는 것이어야 한다.

나보다 더 아프고 슬픈 상대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내 눈물은 얼른 닦아내는 게 예의다.

닦아내지 않고 그냥 흘리고 싶을 때는 남몰래. 파바로티의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Una Furtiva Lagrima)가 아름다운 건

그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누군가 우연히(!) 알아챌 때 비로소 감동이란 게 생긴다.

일단 눈물을 훔쳐야 사람 마음도 훔칠 기회가 오는 것이다.
마치 ‘나도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혹은 ‘나도 눈물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격한 듯,

쏟아지는 눈물을 방치한 채 똑바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각하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안쓰러움과 함께 섬뜩함마저 느꼈다.

또 한번 ‘언캐니 밸리’에 빠져버렸다.
미학자 진중권은 책 <진중권의 이매진>에서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의 논문을 인용한다.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것을 ‘섬뜩함의 계곡’이라 부른다.

”친밀도를 그래프로 표현했을 때 꾸준히 상승하던 곡선이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하강하는 모양이 계곡과 비슷하게 생겨서 섬뜩함의 계곡,

즉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로봇이, 좀비가, 디지털 캐릭터가 ‘인간에 아주 가깝지만 인간과 완벽하게 같지는 않을’ 때,

 ‘인간을 닮아서 도리어 무서워 보일’ 때 쓰는 말이다.


각하께서 때때로 ‘인간에 아주 가깝지만 인간과 완벽하게 같지는 않을’ 때. ‘인간을 닮아서 도리어 무서워 보일’ 때. 많은 이들이 나처럼 섬뜩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건 굉장히 슬픈 일이다. 임수정이라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할 수 있지만, 각하께서 그러시면 곤란하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지금 이 나라엔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정치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배우가 우는 게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이 우는 게 진정한 드라마다.

”영화감독 프랭크 캐프라의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돈 한 주. 국민이 함께 울지 못하고 각하 혼자 울어버린 그날.

사라진 건 기자들과의 질의응답만이 아니었다.

지친 국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진정한 드라마’도 실종되었다. 몹시 ‘언캐니’한 방식으로.
김세윤 방송작가
2014.5.24 한겨레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