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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한국화가)

이상좌(송하보월도)

by 2mokpo 2009. 6. 22.

이상좌(李上佐)에 대하여

조선 초기의 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學圃).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에 의하면, 본래 어느 선비의 가노(家奴)였으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나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되었다 한다.

 

아들 흥효(興孝)도 화원이었으며 수문장을 지냈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그와 이배련(李陪連)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인물로 보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와 이배련이 같은 인물이라면 화가였던 숭효(崇孝)도 그의 아들이 되며, 조선 중기 화단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이정(李楨)은 그의 손자가 된다.

 

그는 인물화에 특히 뛰어나서 1545년 중종어진(中宗御眞)을 석경(石璟)과 함께 추사(追寫)하였으며,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543년 예조에서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녀전 烈女傳〉을 국역할 때 그 삽화를 그렸으며,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에는 기녀 상림춘(上林春)의 요청으로 산수인물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진필(眞筆)로 확인되는 작품은 한 점도 없으며, 현존하는 국내외의 유작들은 모두 전칭품(傳稱品)들이다. 이들 작품은대부분 인물중심으로 구성된 산수화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로서, 남송(南宋)에서 명대(明代) 절파(浙派)로 이어지는 화풍과 관계가 있음을 보인다.

 

특히,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는 지금 남아 전하는 조선 초기 작품들 중에서 남송 마원(馬遠)의 화풍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보이는 것으로서, 당시 화단의 경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서

 

  송하보월도(소나무 아래에서 달 구경)

“할아버지, 이 아저씨는 저기 서서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응, 절벽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를 감상 하고 있는 거란다.”

“그런데 저 소나무가 왜 저리 심하게 굽어 있어요? 화가 났나?

“응 그건 말이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절벽에서 자라다 보니 바람에 꺽여서 그런 거야.

바의 틈에서 뿌리 내리고 사는 것도 힘든데 바람까지 만만치 않게 부는 곳이구나.

저런 곳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 이겠지.“

“어? 할아버지 울어요? 에이, 할아버지는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우네? 에이 바보---

:어허허허.내가 울었던가? 그래, 그래. 할아버지는 바보다. 할아버지가 되어 우리 손주만도 못하구나. 허허허.“

어린 손자 이정이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이것저것 묻자 할아버지인 이상좌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모진 바람을 맞으며 굽어지고 휘어지면서도 죽지 않고 자란 소나무가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기 때문입니다.

노비로 태어나 화원 화가가 되기까지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람은 사람이되 말 한 마리 값만도 못 했던 노비---

짐승만도 못했던 노비가 당당하게 사람이 될수 있었던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상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