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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2.숲보전 철학

by 2mokpo 2009. 6. 21.

“인간의 행위가 생명 공동체의 순결과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전하는 경향을 띠게 될 때 옳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릇된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 중반 무렵 ‘땅의 윤리’를 제창함으로써 미국 자연보전 운동의 이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를 받는 알도 레오폴드의 유명한 경구다.

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가 들어설 수 있었던 곳으로, 애초에는 대부분 숲이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일부 숲을 베어내고 그곳에 논과 밭, 주거지를 만들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숲을 베어 경작지로 일구다’(agricultura)라는 라틴어에서 ‘문화’(cultura)라는 말이 생겨났다. 따라서 숲은 자연 가운데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 문화의 터전이었다.

초기 문화인에게 숲은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성지였다.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작이 용이한 땅은 개발해서 사용했지만, 울창한 숲은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 건축물 없이 야외의 숲 그 자체를 신전으로 삼아 신을 경배하는 의례를 거행하다가, 후일 신전을 지었고 성스러운 숲에서는 사냥도 금지했다.

로마제국이 출현하면서 숲은 본격적으로 명암을 달리하는 운명을 겪게 된다. 한편으로 숲의 여신인 다이아나와 샘의 신 유트르나를 통해 신령한 숲은 보호되었지만, 로마인 특유의 실용주의 사고로 인해 상당수 숲은 절단나기 시작했다. 돼지와 같은 재물을 숲 속 신에게 바친 뒤, 가차없이 엄청난 양의 나무를 잘라 로마선단을 구성하는 배의 목재로 사용했다.

중세의 유산을 근거로 근대과학의 이상을 제시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출현은 숲이 고난을 겪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마녀란 고문기구를 사용해서라도 자백을 받아야 하듯이 자연도 기계장치를 들이밀고 낱낱의 비밀을 캐냄으로써 인간 제국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는 것이(자연을 지배할) 힘”이라고 역설했다.

숲이 구조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베이컨의 이상을 좇는 후예로 인해서다. 자연과 숲을 인간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만 보는 산업사회가 출현했고, 과학기술은 개발의 엔진 역할을 담당했다. 문화가 탄생하던 시절 신령한 숲은 최정점에서 존중되다가 점차 내리막길을 걷고, 마침내 근대 들어서서 개발의 도구로 간주되면서 실험실의 수술대에 올려진 채 날카로운 메스로 해부를 받게 될 개구리와 같은 운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숲의 보전 모형이 정복 모형으로 바뀌면서 그 뒤끝은 오늘의 인류가 직면한 환경위기로 나타났다.

숲 개발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존 로크는 인간 각자가 머리와 신체를 사용하여 지천으로 널려 있는 무소유의 자연을 개척하면, 그것은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사유재산제의 정당화 논거를 제시했다. 이후 사람들은 땅과 숲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을 확보하여 저마다 돈벌이에 나섰다. 정작 커다란 이익을 얻는 것은 극소수였다. 숲을 효율적으로 갈취하려면 거대한 기계장비를 갖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벌목업자와 광산업자, 석유채굴업자는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됐고, 숲의 새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식물 종은 멸종되었으며, 그 아름다운 경관은 흉물스런 모습으로 바뀌었다.

산업사회가 무분별하게 개발을 진행하던 19세기말 미국에서 숲에 대한 반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보호에 대한 이념이 부활하기 시작했는데 두가지로 조성되었다. 하나는 산림 보존으로 1905년 산림청의 태동을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국립공원 지정 및 자연보전 운동으로 1892년 환경 NGO인 시에라클럽 탄생과 1916년 국립공원관리청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숲 보존의 물꼬를 튼 사람은 기포드 핀쇼였다. 그는 공리주의에 의거하여 숲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숲을 그대로 둘 경우 오직 숲 이용에 눈을 뜬 소수 자본가에게만 이익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한 행위가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즐거움과 행복, 이익을 가져다줄 때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광활한 숲은 최장 시간에 걸쳐서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과 혜택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향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주장에 당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공감했고, 그는 초대 산림청장에 취임하여 숲 보존의 이념과 기틀을 잡게 된다.

또 다른 한편 천혜의 경관과 생물 종의 다양성이 구현된 국립공원 지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1872년에 최초로 옐로스톤국립공원이 지정되고, 뜸하다가 존 뮈어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1890년에 서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요세미티국립공원과 세콰이어국립공원이 설정된다. 뮈어는 시에라클럽의 창시자로서 이후 국립공원체계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게 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3년 요세미티에 있는 뮈어를 방문하고, 이어서 마운트 라이니어와 그랜드캐니언, 글래시어 등 일련의 울창한 숲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가운데 국립공원관리청이 들어선다. 이런 흐름은 유럽에서도 나타나는데, 영국에서는 1895년 내셔널트러스트가 탄생하여 자연보호에 앞장을 서게 되고, 구소련에서도 한반도보다 더 큰 광활한 지역이 나무 채취나 새알 취득조차 금하는 광범위한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

다만 인간을 위한 숲 보호와 자연 자체를 위한 보전 이념이 충돌을 빚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요세미티국립공원 안의 댐 건설 사례를 들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확장되면서 물 부족에 시달리고, 그에 따라 헤츠헤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식수원으로 사용하자는 안이 의회에 제출된다. 공리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자연 보존주의자(conservationist)는 자연 보호의 목적이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서인데, 댐 건설이 그것에 적극 부응할 수 있다면 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보전주의자(preservationist) 집단인 시에라클럽은 댐 건설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그 계곡이 뮈어에 의해 요세미티 자체라고 칭송될 정도로 미적으로 수려하고 장엄한 곳이므로 인간의 감성을 풍부하게 자극하고 영적으로도 감흥을 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곳을 서식처로 삼는 수많은 생물 종을 위해 보전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논쟁 끝에 의회는 1914년 댐 건설을 승인함으로써 결국 댐이 들어서고 말았다.

이후 유사한 사건에서 주로 승리는 인간의 몫이었고, 숲과 자연은 거의 패자였다. 그것이 누적된 결과 인간은 마침내 자연의 역습을 당하고 있다. 자만심에 가득 찬 인간이 자초한 필연적 결과였다. 다만 최근 들어서서 레오폴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 항상성을 보전토록 노력할 때에만 우리의 미래세대가 자연의 숱한 생물 종과 더불어 지구촌 구성원의 하나로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lantlove@eco.or.kr

〈한면희/녹색대학교 교수〉

경향신문 2004. 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