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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읽다가·서평 모음

미술관 옆 인문학

by 2mokpo 2023. 12. 22.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집시

과학기술 문명은 기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유전자조작 식품(GMO)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유전자조작식품이 인간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 현재 인간은 일종의 실험 도구로 전락한 셈이다. 언제 생길지 모를 이상 증상, 다른 종으로의 유전자 변종 확산, 농업과 식품 산업에서 몇몇 다국적 기업의 헤게모니 장악, 나아가서는 농산물의 다양성이 감소함으로써 초래될 병충해에 의한 재앙 가능성 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과학기술의 능력만을 믿고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정말 지구라는 땅덩어리가 부족해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가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대체로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 기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원인이라는 반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인구에 비해 식량은 과잉 생산 상태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GMO는 거대한 기술적 사기일 수 있다는 반론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중략)

일체의 불편과 위험, 불안과 불안정성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합리성과 과학기술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처방전을 강제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저항이다. 남자는 초콜릿 복근, 여자는 24인치 허리를 가져야 정상적인 건강상태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를 시대정신쯤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경종이다.

전기청소기도 부족해 로봇청소기까지 개발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집안을 청소하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 듯 벌레를 박멸하는 전문 기업을 동원해 집 안에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모두 멸종시키려는 듯 달려들고, 흙이 드러나는 한 뼘의 공간도 지저분하다는 듯 길이란 길은 온통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으로 덮어 버린 도시에서 오히려 면역력이 약화되어 온갖 피부병이 생겨나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조롱이다. 이미 10대부터 안정적인 직장 마련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문학, 놀이, 여행 등은 한가한 불장난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구시대의 단어쯤으로 치부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에 대한 탄식이다. 그리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 불안을 동반하는 내적 고뇌를 인간에게 되돌리려는 절규이다. 24~25

(중략)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이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이 세계에서 점점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작가는 규격화, 표준화된 현대인의 삶에서 탈출하는 것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 대신하였다.

즉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오직 새로워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새로워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새로운 시선과 발상만이 늪처럼 발목을 끌어내리는 일상의 틀에서, 안개처럼 에워싸고 있는 관성의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떠나야 한다. 머무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유목민, 21세기 집시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을 버리자거나 노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통념과 관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끊임없이 혁신하는 정신적인 유목민과 집시를 의미한다. 날마다 새로워지고자 할 때 우리의 삶은 무기력에서 활력으로, 필연에서 자유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28

출처 : 미술관옆 인문학 지은이 박흥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