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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4 전통과 혁신 II 15세기 : 북유럽

by 2mokpo 2023. 3. 21.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15세기는 미술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 세대가 이룩한 발견과 혁신이 이탈리아의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분리되는 미술의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북유럽의 미술가들이 목적으로 했던 바가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그것과 아마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는 대단히 달랐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물에 고전적인 모티브를 사용하는 르네상스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피렌체에서의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 미술가들이 그의 예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나 뒤의일이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15세기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건물들의 형태는 뾰족한 아치나 공중 부벽과 같은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시대적인 취향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도관 174의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타오르는 불꽃 모양)양식' 이라고도 불리워 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설계자가 장식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변화 무쌍한 장식물로 건물 전체를 뒤덮어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무한히 풍요롭고 새로운 창안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계와 같은 요소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건축물들에서 설계자들이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특히 영국에서 소위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 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직 양식이란 명칭은 장식에 있어서 그 이전 시대의 장식적인 트레이서리의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더 빈번하게 사용한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양식으로 가장 유명한 예는 1446년 착공된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라지 예배당(도판 175)이다.

 

174 <루앙의 법원성의 안뜰(전에는 재무성이었음)>, 1482년,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회화와 조각의 발전은 이러한 건축의 발전과 어느 정도까지는 나란히 나아갔다. 다른 말로 하면, 르네상스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둔 반면, 15세기의 북유럽은 아직 고딕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 에이크 형제의 위대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생각되었다.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들에 대한 연구 등등은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 상태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알프스 산맥 이남에 사는 그들의 동료 미술가들이 이미 '근대'에 속하는 반면 그들은 아직도 '중세 미술가들'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이남이나 이북의 미술가가 당면한 문제는 놀랄 만큼 비슷한 것이었다.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꼼꼼한 관찰로 꽉찰 때까지 조심스럽게 세부를 하나씩 첨가함으로써 그림을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프라 안젤리코와 베노초 고촐리가 마사초의 혁신들을 14세기 정신을 지키면서 구사하였던 것처럼 북유럽에서도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에 활용한 미술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15세기 중엽에 쾰른에서 작업을 했던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8-51)는 어느 정도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말할 수 있다. 도판 176에서 보듯이 장미 나무 아래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거나 아기 예수에게 과일을 건네는 작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모를 그린 매력적인 작품은 마치 프라 안젤리코가 마사초의새로운 발견들을 알고 있었듯이 이 거장 또한 반 에이크의 새로운 방법들을 알고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그 정신으로 보면 반 에이크에 가깝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딕 양식에 가깝다.

 

이 옛날작품으로 되돌아가서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당장에 두폭화를 그린 화가에게는 상당히 어려웠던 문제점을 로흐너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두폭화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다. 로흐녀의 성모도 여전히 황금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앞에는 현실적인 무대가 펼쳐져 있다. 게다가 로흐너는 마치 액자에 걸려 있는 것같이 보이는 커튼을 치켜들고 있는 예쁘장한 두 천사를 그려 넣었다.

러스킨(Ruskin)과 같은 19세기 낭만주의 비평가들과 라파엘 전파의 상상력을 맨 처음 사로잡았던 그림들은 로흐너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그림에서 순박한 신앙심과 어린이와 같은 꾸밈없는 마음씨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이 작품들은 아마도 아주 매혹적으로 보여질텐데, 그림에 있어서 현실적인 공간과 정확한소묘에 다소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그 작품들이 중세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중세 거장들의 작품보다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175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 1446년 착공, '수직' 양식

176 슈테판 로흐너,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 1440년경, 목판에 유채, 51 x 40cm, 쾰른 발라프 리아르츠 박물관

 

1세기 전에는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그렇게 그릴 수가 없었다. 일상생활을 이처럼 충실하게 그린 예를 찾아보려면 우리는 고대 이집트 미술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서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 데 관심을 적게 가졌던 북유럽의 미술은 이런 종류의 표현법을 점점 더 선호하게 돠었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에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의 사람인 장 푸케(Jean Fouquet : 1420880)가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447년에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도판 178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몇 년 뒤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기증자의 초상이다. 기증자의 이름이 에티엔(스티븐의 프랑스 고어)이므로 그 옆에 서 있는 수호 성인은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로서 부제의 의관을 갖추고 있는 성 스테파누스이다. 그가 들고 있는 책 위에는 큰 돌이 하나 얹혀져있는데 성경에는 그가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다. <윌튼 두폭화>를 돌이켜보면 불과 반세기 동안에 자연을 묘사하는데 미술이 얼마나 많은 발전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윌튼 두폭화>의 성인들과 기증자는 마치 종이에서 오려내어 그림에 붙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장 푸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조각처럼다듬어진 것같이 보인다. <윌튼 두폭화>에서는 명암을 찾아볼 수 없었다. 푸케는 거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했던 것처럼(p. 261, 도판 170) 빛을 사용하고 있다.

이 조용하고 조각과 같은 인물들이 현실적인 공간에 서 있는 방식은 푸케가 이탈리아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 방식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방식과는 다르다. 모피, 돌, 옷감, 대리석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이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를 방문한(1450년의 순례 여행)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북유럽의 화가는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64) 이었다. 이 거장에 관해서는 그가 얀 반 에이크가 작업했던 남 네덜란드에서 큰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도판 179는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리는 장면을 그린대형 제단화이다. 우리는 로지에르가 반 에이크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바느질솔기 하나하나 등 모든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 색조의 배경을등진 일종의 얕은 무대 위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폴라이우올로가 직면했던 문제들(p. 263, 도판 171)을 되새겨보면 우리는 로지에르가 내린 결정이 현명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15세기 후반에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 1482년 사망)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 가운데 개인적인 일화들이 전해져오는 몇 안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만년에 자진해서 어떤 수도원에 은거하여 죄책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사실 그의 미술에는 얀 반 에이크의 평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 긴장되고 진지한 것이 있다. 도판 180은 그의작품인 〈성모의 임종〉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을 묘사한 그 훌륭한 솜씨이다. 조용하게 생각에잠겨 있는 사람, 격렬하게 슬퍼하는 사람과 경솔하게 하품을 하는 사람의 표정에이르기까지 많은 표정들을 매우 탁월한 솜씨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을 인쇄하는 이 간단한 기술을 목판화술(木版術, woodcut)이라고 한다. 그것은 대단히 싼 방법이었으므로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목판화를 여러장 함께 사용하여 일련의 그림들을 인쇄하여 책으로 묶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전부 목판화로 찍어 낸 책을 목판인쇄본(block-books)이라고 불렀다. 목판화와 목판인쇄본 들이 곧 일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트럼프와 같은 놀이 카드도 이같이 제작되었고 신앙 수련들 위해서 유머러스한 그림과 판화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도판 184는 교회에서 그림 설교책으로 사용했던 초기 목판인쇄본들 중의 한 페이지이다. 이 그림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죽음의 시간을 상기시켜주고 또 그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자들에게 '잘 죽는 법'을 가르쳐주는 데 있었다. 이 목판화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임종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데 옆에 서 있는 수도승이 그의 손에 촛불을 쥐여주고 있다.

 

구텐베르크 (Gutenberg)가 목판화 대신에 틀 속에 활자를 모아 인쇄하는 방법을 발명해내자 그러한 목판 인쇄본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쇄된 본문과 목판화 삽화를 결합하는 방법이 뒤이어 발견되어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많은 책들에서는 목판화로 삽화가 곁들여지게 되었다. 

177 장 르 타베르니에 <'샤를마뉴 대제의 정복' 중 헌정 페이지>, 1460년경, 브뤼셀 왕립 도서관

178 장 푸케, <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 1450년경, 제단화 부분, 목판에 유채, 96 x 88cm, 

179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5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220 x 262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180 후고 반 데르 후스, <성모의 임종>, 1480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7 x 121.1cm, 브뤼주 박물관

181 도판 180의 세부

182 바이트 슈토스 <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 1477-89년. 크라쿠프, 채색 목조, 높이 13.1 m.

 

183 바이트 슈토스, <사도의 머리 부분>, 도판 182의 부분

184 <착한 사람의 임종>, 1440년경, 목판화, 22.5 x 16.5cm, <잘 죽는 법>의 삽화, 올름에서 인쇄

 

목판화에서는 선을 두드러지게 남겨두어서 만드는데 동판화에서는 선을 판에 새겨 넣어서 만든다. 뷰린(burin)으로 선의 깊이와 강도를 조절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지만 일단 이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목판에 의해서 보다는 동판화에서 훨씬 풍부한 세부 묘사와 미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5세기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동판화가는 오늘날 알사스 지방인 라인강 상류의 콜마르 (Colmar)에 살았던 마르틴 숀가우어 (Martin Schongauer : 1453? - 91)였다. 도판 185는 숀가우어의 동판화 <거룩한 밤>이다. 이 장면은 네덜란드 대가들의 기풍을 대변해주고 있다.

 

185 마르틴 숀가우어, <거룩한 밤>, 1470-3년경, 동판, 25.8 x 17cm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만테냐 와 보티첼리 풍의 동판화가 제작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는 다른 유파의 동판화들이 제작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미술가로부터 아이디어와 구성을 베껴오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군소 대가들은 동판화를 그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빌려오는 견본책으로 이용했다. 마치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였으며 오직 위대한 거장들만이 극복할 수 있을 미술의 위기를 이들 나라에 초래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석공들과 왕>, 1464년경, 장 콜롱브가 채색 장식한 필사본 <트로이 이야기>의 삽화 중 하나, 베를린 국립박물관 동판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