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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무엇 때문에 숲을 거닐어야 하는가

by 2mokpo 2014. 12. 18.

무엇 때문에 숲을 거닐어야 하는가

 글· 남효창 (이학박사, (사)숲연구소 대표)

본디 모든 생명체는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연의 건강이 우선 보장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에 종속된 하나의 생명체이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놀라운 진화는 넘치도록 많은 물질적 욕구를 채워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욕구의 끝을 채워 주지는 못하고 늘 빈곤을 느끼게 할 뿐이다. 물질만능주의가 결국은 인류의 건강성뿐 아니라 자연의 건강성마저도 해친다.

산업혁명이 낳은 대량소비의 시대가 가져다준 것은 결국 풍요로운 생활 뒷면에 인간성의 상실과 자연성의 상실이다.

과거, 천둥과 번개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지 그 원인을 몰랐던 때,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신앙’ 즉 ‘신’이란 곳에서 찾았다.

수 세기  동안 신앙은 인류를 지배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그 대가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과학적 사실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일이었기에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약 160년 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이 인류를 지배했다. 눈부신 과학의 진화는 마침내 ‘신’이란 존재를 해부하고 사라지게 했으며,

모든 인류를 경제 전쟁터로 내몰게 했고, 인간을 경제 전쟁터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에너지원에 불과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한편으로는 인간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은 에너지원으로만 보는 시대로 둔갑시켜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체적 생태계의 교란을 초래하게 했다.  

 

이 시대 우리의 삶을 두려움으로, 때로는 공포로 몰아가고 있는 원인은 이상기온과 환경오염 등의 주변 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혼란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 같은 각종 질병이 끝없이 인류를 엄습할 것이란 공포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과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향수와 고향 같은 느낌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고픈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성을 삼켜버렸다.

이미 100년 전에 셀린(Celine)과 하이데거(Heidegger)는 산업사회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일찍이 그들은 물질만능사회를 극도로 염려했던 사람들이었다.

셀린은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여행, 깜깜한 겨울날 밤에 한 줄기 빛도 없는 하늘 아래서 우리는 길을 찾아 헤맨다.

” 만일 현생인류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전하는 합리적 사고, 논리적 사고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과학은 생각이 없다”라고 했다.

그것은 오로지 논리적이지, 감성적인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인간은 산소 호흡을 잠시라도 멈추면 안 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감성을 배제하고서는 존재자로서의 기쁨을 누리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맹신하고 확신하는 ‘과학’은 생명체인 인간의 감성과 인성을 염두하지 않는 오로지 지식과 손익만을 강조할 뿐이다.

그래서 풍요롭지만 빈곤함을 느끼는 걸까?

 

인간의 잘못된 삶의 방식은 잘못된 경제관념이 문제였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는 것 또한 손익만을 염두에 둔 경제적 관점이 문제였다.

자고로 경제학(economy)과 생태학(ecology)은 분리되어진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코스(Oikos)란 경제와 생태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여 있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경제와 생태가 분리되면서 생태란 자연환경은 자원의 개념으로만 해석되었고,

경제는 생태를 오로지 착취의 대상인 자원으로 보게 된 잘못된 경제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물질만능주의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관점에는 인간성에 대한 계산은 완전히 사라지게 했으며, 인간의 본질까지도 상품화되어 시장에 내맡겨져 있는 형국이다.   

도토리를 맺는 나무가 있음으로 인해 무려 50여 종의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다.도토리를 맺는 나무가 있음으로 인해 무려 50여 종의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이 훌륭한 경영인으로 사회에서 추앙받는다. 그래서 한 그루의 나무는 남김없이 뿌리까지 모두 계산되어진다.

자연을 송두리째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자연이 나무에 투자한 비용은 계산하지 않은 채 말이다. 잘못된 경제관이다.

경제적 인간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오로지 경제적 이용가치만을 따지는 큰 오류에 빠졌다.

예를 들면 그러한 인간의 관점은 식물이란 생명체를 두고 잡초와 익초라는 이분법적 해석을 내놓는다.

인간이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잡초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자가 아닌 객체, 즉 관찰자 내지는 참여자의 입장에 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잡초와 익초로 분류하는 이분법적 생명관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인간이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 자연계는 소유주가 인간으로 되어 있지 않다. 자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 여타의 생명체들처럼 인간도 자연을 만끽하기 위해 잠시 찾아온, 언젠가 다시 떠나야 할 이 행성의 여행객

그 이상이 아니며, 다른 생명을 착취하기 위함도 아니며, 경쟁하기 위한 삶은 더더욱 아니다. 이 땅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휴가를 즐기는 시간일 뿐이다.

행성 지구에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개선이 이 시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먹고 먹히는 관계로 이어진 사슬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물망처럼 관계되어 있다. 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가 서로의 꽃을 피울 수 있게 하는 겸손의 관계요, 존중의 관계요,

배려의 관계다.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은 꿀을 훔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후손(=꽃=열매)을 남기기 위한 행위이며, 꽃이 나비에게 꿀을 제공하는 것은 나비의 행위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되어 새로운 꽃(=열매)을 피우게 되는 그런 관계,

서로의 꽃을 존재하게 하는 관계,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그 ‘관계’란 진정한 의미를 자연이란 숲에서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3억 5,000만 년을 서로가 서로의 꽃을 피워 주는 관계를 맺으며 지속시켜 온 숲.

그런 숲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시대 인류에게 건강한 인간성을 얘기하고 건강한 자연성을 얘기하는 나침반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감히 독자 여러분과 함께 숲을 거닐고 싶다.

산림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