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침몰과 조작의 이중나선

by 2mokpo 2014. 4. 24.

 

침몰과 조작의 이중나선 / 박용현
역대 최악의 해난 참사들과 그 무렵 우리 사회의 풍경을 되짚다 보면 기막힌 역사의 우연과 마주치게 된다.
1970년 12월15일 여객선 남영호가 과적과 항해 부주의로 침몰해 32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10월14일과 17일 수학여행길 버스가 잇따라 열차와 충돌해 59명이 숨진 뒤였다.

앞서 7월3일에는 간첩 혐의를 쓴 박노수 교수와 김규남 의원의 사형이 확정됐다(이들은 2년 뒤 형이 집행됐고 그로부터 41년 뒤 무죄임이 확인됐다).

23년이 흐른 1993년 10월10일 서해훼리호가 정원 초과와 무리한 운항으로 침몰해 292명이 희생됐다.

그해 9월13일 남매 간첩이란 이름으로 시민운동가 김삼석씨와 여동생이 구속됐다(이듬해 안기부 공작원이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듬해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로 여중고생 9명이 청춘을 묻었다.
다시 21년이 지난 올해 4월16일 수학여행에 들뜬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했다.

2월17일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로 새내기 대학생 등 10명을 잃은 뒤였다.

앞서 2월13일에는 중국대사관의 공문을 통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 조작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섬뜩하다. 어이없는 침몰 참사와 꽃다운 젊음의 희생, 그리고 조작의 냄새 짙은 간첩사건이 기괴한 짝을 이뤄 되풀이되는 이중나선.

44년 동안 세대를 거듭하며 똑같은 역사가 씌어지고 있다.

그동안 이룬 대한민국의 ‘발전’을 배경 삼으면 이 악무한의 반복은 더욱 놀랍다. 1970년 254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93년 8177달러가 됐고,

올해 2만6000달러를 돌파했다. 1970년 당시의 대통령 딸이 2014년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민주주의의 포장도 그럴듯해졌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더욱 눈부시다. 전화기도 드물던 1970년대에는 상상조차 못한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손에도 쥐여 있다.
그런 오늘날, 1970년의 흑백 필름 속에서 잃어버린 피붙이인 양 보퉁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여인의 슬픔은

2014년 진도 앞바다를 향해 통곡하는 어머니들 가슴으로 그대로 옮겨와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랑해”라는 절망의 작별인사를 받아보는

이 첨단의 시대가 더 가슴 아프고, 해난 구조체계의 지체된 원시성이 더 분노스러울 뿐이다.

박노수 교수와 김규남 의원에 대한 재심 무죄판결이 나던 지난해 10월, 국정원은 또다른 간첩사건 증거 조작에 여념이 없었다.

과거사 반성은 한갓 유행이었던가.

결국 우리는 지난 40여년 동안 덩치만 키웠지 한 치도 성숙하지 못했다. 저 이중나선 속에 도사린 병적인 유전자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정부나 기업이나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은 ‘자칫 사람이 상할 수도 있지만

당장 시급한 목표(효율·속도·이윤 따위)를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뼛속 깊이 간직해왔다.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아무리 재발 방지를 외쳐도 소용이 없었던 것은, 온갖 제도로 생색을 내면서도 이 근본 태도만큼은 절대 바꾸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가치를 위해 사람을 뒷전으로 밀어도 된다는 이런 인간관은, 정치적 목적이나 기관의 필요에 따라 한 개인을 철저히 파괴시키는 간첩 조작에서 꽃을 피워왔다. 참사가 빈발하는 나라에서 인권을 꿈꿀 수도, 간첩이 조작되는 나라에서 안전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저 유전자의 정체가 말해준다.
참사 이후에도 사람은 뒷전인 풍경이 여전하다. 대형 사고 때마다 늘 그렇듯 체육관 바닥을 집 삼은 실종자 가족들은 제대로 보살핌 받고 있는 건가.

홀로 구조된 5살 어린이는 최선의 보호를 받았나. 해상크레인 출항이 비용 문제로 지연되고, 불안한 마음에 수학여행을 취소하고 싶어도 위약금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숫제 제도가 사람을 삼켜도 두고만 보는 꼴이다.
‘1호 매뉴얼’ 헌법에 새겨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제대로 예행연습 한번 안 해본 첨단·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언제 나와 내 아이에게 닥칠지 모를 또다른 침몰과 조작을 걱정하며 항해해야 한다. 그 참담함 속에서 마지막 희망을 모아 구조 소식을 기다린다.
박용현 탐사기획에디터 pi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