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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나무 이야기

밤나무와 예(禮)

by 2mokpo 2013. 11. 13.

밤나무와 예(禮)


1584년(선조 17) 음력 정월, 율곡 이이(1536~84)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법원리에 위치한 이이의 무덤은 보통 사람들의 묘와 달리

부모의 묘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이의 무덤은 부모의 묘보다 위에 위치한 이른바 역장(逆葬)이다.

 더욱이 이이의 무덤은 부모와 형들의 무덤이 부부 합장인 것과 달리 혼자이다.

아내인 노씨 묘는 이이의 묘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역장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풍수지리에 따른 것이라는 설을 비롯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이를 비롯한 그의 가족묘는 자운서원 경내에 있다. 율곡의 가족묘는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율곡 묘와 자운서원은 성리학자의 묘와 그를 모시는 서원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공간이다. 이이는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1501~61)와 사임당 신씨(1504~51)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셋째를 의미하는 ‘숙’(叔)을 따서 숙헌(叔獻)이다.

이이의 호는 흔히 율곡이라 부르지만, 그의 삶에 중요한 석담(石潭)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혈연적 뿌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석담은 이이의 선조들이 살았던 경기도 파주의 화석정(花石亭)에서 빌린 것이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뿌리가 있는 파주의 화석정도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화석정을 얼마나 가슴 깊이 생각했는지는 여덟 살 때 지은 시 <화석정>에서 알 수 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었으니(林亭秋已晩)   시인묵객의 회포 끝이 없구나(騷客意無窮).   길게 뻗은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른데(遠水連天碧)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에 붉도다(霜楓向日紅).   산등성이에 외로운 달이 떠오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리에서 오는 바람을 품는구나(江含萬里風).  

변두리에서 나는 기러기 어디로 가는지(塞鴻何處去) 울음소리 저문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聲斷暮雲中).

 

이이가 아버지의 고향인 서울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서 태어난 것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곳에서 계속 생활하는 풍속 때문이었다.

이러한 풍속에 따라 조선의 유명한 인물 중 외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주 많다. 이이는 어머니가 살던 오죽헌(보물 제165호)에서 태어나 여섯 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래서 지금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몽룡실(夢龍室)이 있다.

율곡은 13살 때에 진사 초시에 합격할 만큼 일찍부터 신동의 자질을 세상에 드러냈다. 율곡은 생원시·진사시를 포함해 아홉 차례의 과거에 응시하여 모두 장원으로 합격했다.

어릴 적부터 ‘구도장원공’이라 불릴 만큼 천재의 기질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상을 치른 뒤 열아홉 살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1년 동안 승려로 지내고, 절에서 나온 뒤 1555년에 ‘자경문’(自警文)을 통해 성리학자들에게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그의 짧은 승려생활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난 뒤에도 그를 괴롭히는 이력으로 남았다.

 

이이의 호 중 가장 유명한 율곡은 밤나무 골짜기를 의미한다. 율곡이란 호는 이원수가 결혼 후 신사임당과 약속한 10년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하룻밤 머문 강릉 인근 주막 안주인과의 인연에서 비롯했다.  이원수는 주막에서 안주인의 유혹을 물리친 뒤 강릉에서 아내와 달콤한 시간을 보냈고,

과거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갔다. 그는 서울 가는 길에 다시 주막을 찾아 안주인과 하룻밤 보내려 했지만, 이때는 안주인이 정색하면서 이원수에게

“당신 부인의 몸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날 시각이 인시이므로 일곱 살 정도에 호환(虎患)에 죽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원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자식을 살리는 방법을 묻고 그 안주인이 시키는 대로 밤나무를 고향 파주의 화석정 주위에 심었다.

그 주막 안주인의 말대로 밤나무 1000그루를 심는 날, 이이가 태어났다.
 
밤송이 가시는 씨방을 보호한다
밤나무는 종자의 껍질이
뿌리와 줄기의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랫동안 달려 있어
선조를 잊지 않는 존재로 여겼다
 오래 보존해야 하는 신주를
단단한 밤나무로 만든 것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태도다
 
율곡 이이는 아버지가 밤나무를 심어서인지 일곱 살을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  갈잎큰키 참나뭇과의 밤나무는 독특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 열매인 밤송이다.

 밤송이는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엄청난 가시를 지녔다. 밤송이에 가시가 있는 것은 밤 알맹이 자체가 씨방이기 때문이다.

밤송이 가시는 씨방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밤송이는 유교를 믿었던 중국과 한국의 문화에 아주 특별하다. 제사 때 반드시 올리는 물품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밤을 제사에 사용할까?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내면서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지만, 밤나무는 그 반대로 종자의 껍질이

뿌리와 줄기의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랫동안 달려 있다. 그래서 밤나무의 이러한 특징을 자신의 근본, 곧 선조를 잊지 않는 존재로 여겼다.

또한 밤은 자식과 부귀를 상징한다. 혼례에 밤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갑골문에 등장하는 율(栗)은 나무 위에 밤송이가 달린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가시가 달린 밤송이를 율자(栗刺)라 부른다. 율은 가시 때문에 ‘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밤송이의 특징 때문에 생긴 한자가 바로 전율(戰栗=戰慄)이다.

전율은 두려워서 떠는 모습을 말한다. 밤송이의 이러한 특징이 밤나무로 신주를 만든 가장 큰 이유이다. 밤나무로 신주를 만든 근거는 <춘추공양전>과 <논어>다.

밤나무로 만든 신주를 ‘율주’(栗主)라 한다. 조선시대 왕가의 제사 때도 밤나무로 만든 신주와 신주를 모시는 궤를 사용했다. 제사를 모실 때는 신주 궤 속의 신주를 모시고

온 후 진행한다.  신주와 신주 궤를 밤나무로 만드는 것은 많은 가시를 지닌 밤송이를 통해 경건한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밤나무 재질이 아주 단단하기 때문이다. 신주에는 제사를 모시는 분의 이력을 모두 적어야 하고, 오랫동안 보관해야 한다.

그러려면 글씨를 적을 만큼 결이 고와야 하고, 갈라지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단단해야 한다. 조선 세종 6년(1424)에 만든 신주의 재질에 대한 제도,

곧 신위판 제도는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신주의 재료인 밤나무의 길이는 한 자 두 치, 너비는 네 치, 두께는 팔 푼이다. 위쪽은 반달 모양이고, 나무의 면은

희게 해서 먹으로 글씨를 썼다. 자는 예기(禮器)를 만드는 자를 사용하고, 글씨를 쓴 다음에는 옻을 두 번 칠했다.

예는 성리학자들에게 삶의 나침반이었다.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하고, 안연이 다시 구체적인 방법을 묻자,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예는 성리학자들의 삶의 나침반으로 결정되었다.

공자의 후계자인 증자는 “살아서도 예로 섬기고, 장례도 예로 하고, 제사도 예로 하는 것이 효”라고 강조했으며, 맹자는 “사양하는 마음이 예의 단서”,

“예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라 주장했다. 예(禮)는 중국의 은나라 갑골문에 등장한다. 이 글자는 ‘단 술’을 의미한다.

곧 예는 좋은 술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다. ‘신’(神)은 ‘번개 불’을 뜻하고, 번개 불은 신의 뜻이다.  그래서 예는 공자와 맹자 등이 늘 강조했듯이, 공경한 자세가 필수이다.

후손들이 조상의 신주를 밤나무로 만든 것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태도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공자와 그 후계자들의 뜻을 받들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예에 맞췄다.

중국과 한국의 성리학자들에게는 예야말로 질서의 핵심이었다. 예는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벼리(綱)였다.

<주례> <예기> <의례> 등은 중국의 주나라부터 이후 왕조는 물론 조선시대의 국가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알립니다=위 글에서 율곡이라는 이이의 호가 그의 아버지 이원수가 주막 안주인을 만나 조언을 듣고 밤나무 1000그루를 심은 데서 유래했다는 내용은 해당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며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출처 : 한겨레 2013년 11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