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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궁궐과 동굴에 갇힌 종교를 넘어서---3

by 2mokpo 2013. 6. 12.

종교의 본질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타자와 ‘전체 생명’을 살려내는 데 있다.

똥오줌통과 말씀 법문을 담은 가슴통과 머리통을 한 몸뚱이 안에 지니고 성직자는 설법 강단에 올라선다.

 배설물과 거룩한 말씀이 함께 있다.

“전체 생명은 하나의 유기체이다”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 정도만큼

사회의 난제와 남북관계도 풀려갈 것이다.


이 글에서 종교가 씨앗이며 생목이라고 비유하는 진짜 이유는

종교가 창조적 변화를 모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종교계 지도자들 눈에는 한국 사회가 종교 중흥기의 시운을 맞이한 듯한 생각도 들겠지만,

인류 문명사 흐름에서 종교는 어떤 종교이거나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쇠퇴하는 원인을 따져보면,

종교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이미 충분히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것은 변화하면서 자라는 법이다.

생물체만이 아니라 종교도 창조적 진화를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생명의 특징은 지속하면서도 새로움을 경험하고 질적 도약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이웃 종교들과 다양한 학문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우면서 변화하는 용기를 지닌 종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품위를 유지해갈 것이다.


인도 뉴델리 간디박물관 입구에 “진리가 하느님이다”라고 쓰인 문구를 읽고

새삼스럽게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홀로코스트’ 비극을 체험하고 난 이후 현대인들의 신심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 하느님이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오늘의 종교들이 굶주리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지구촌의 수많은 아이들을 돕는다고 쥐꼬리만큼의

 ‘적선’을 하고서 종단 중흥사업과 개별 교회 부흥에 더 많은 돈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결국 종교의 거룩한 위선이고 자기기만이며 큰 도둑질과 다름없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던 해,

삼선교 거리 어느 회색 건물벽에 검정 페인트로 쓴 불교 법문 한 구절을 보았는데 지금도 잊지 못한다.

유마거사가 말했다.

“중생(衆生)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

”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위의 두 말씀이 결국 우리 시대 모든 종교들과 신앙인들의 ‘불편한 화두’가 되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한겨레 특별기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