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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궁궐과 동굴에 갇힌 종교를 넘어서---2

by 2mokpo 2013. 6. 11.

요지는 종교란 자라는 생목(生木)을 닮은 실재이지 원형대로 보존할 궁궐 같은 실재가 아니란 말이다.

생목은 이른 봄 새싹이 돋아난 뒤, 꽃 피고 열매 맺을 때까지 날마다 그리고 계절마다

 ‘형태변화’라고 부르는 기적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의 눈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흔히 말한다.

하나는 기적이란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생명세계 모든 현실이 기적이라고 보는 눈이다.

 

일상의 삶과 주위 생명들 안에서 기적을 보도록 사람들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종교의 본래 사명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위대한 전통과 조직체를 가진 세계적인 종교일수록, 자신의 종교를 생목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석함을 간직한 궁궐이라고 생각하려 든다.

 

큰 가람과 성전을 짓기 시작하는 종교는 뽕잎을 잔뜩 먹은 뒤 자기 몸에서 실을 빼내 고치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는 누에와 같다고 입바른 함석헌이 말했다.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순위 20위 안에 드는 교회 절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고 한다.

큰 것은 무조건 좋고 선한 것이라고 맹신하는 시대인지라 자랑할 일 같지만,

종교란 심층을 문제 삼기 때문에 달리 보면 큰 누에고치 짓기에 불과할 수 있다.

 

시대정신에 해당하는 신선한 공기와 햇볕이 드나들지 않으면

누에고치는 누에나방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번데기와 명주실감 신세로 귀착되고 만다.

 

우리 시대 종교들은 겉치레와 자기과시 경쟁에 자못 소란스럽다.

 비록 벌 나비가 앉기에는 너무 작은 싸락눈 같은 흰 꽃을 피우지만,

최선을 다해 앙증맞은 자기 꽃을 피워내는 풀꽃들의 그 당당함과 행복함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종교라야 한다.

그 작은 꽃 안에 전체 우주가 숨 쉬고 있음을 증언함이 종교의 몫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수만명 신도를 동원하는 교세 과시형 신앙집회, 세계 최대 순교자 성지 조성사업,

석탄일의 떠들썩한 종로거리 연등 행렬이 꼭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놀라게는 하지만 감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종교의 사회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이지만,

20세기 위대한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홀로 있음의 고독’이라고 갈파한다.

그리고 사람이 홀로 있음의 고독을 회피하거나 모른다면 결코 종교적일 수 없다고 충고한다.

현대 종교의 위기는 철저한 고독과 내면적 신실성을 대신해주는 구원보장 보험회사가 되려는 유혹에서도 연유한다.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어 찾는 자가 많은 종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복음서는 경고한다.


종교인은 예술적 감성과 과학적 지성을 더불어 갖추어,

경직된 ‘종교성’과 실증적 ‘과학주의’라는 동굴에 갇히지 않는 영성을 함양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종교를 모르는 과학과 과학을 무시하는 종교는 둘 다 플라톤이 비유하는 ‘동굴에 갇힌 노예들’이다.

요즘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라고 알려진 예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을 이끌어 왔던 중요한 힘들 중 하나로서 위대한 종교이지만,

‘진리 자체’가 역사적 기독교보다 더 크고 근원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복음주의적 정통보수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부류는 성경과 교리 안에 하느님을 유폐시키거나 독점하고

자신들도 ‘기독교 동굴’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띠를 두르고 확성기를 가지고 명동거리, 공공장소, 전철 등 가릴 것 없이

안하무인 격인 전도행위라는 것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