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신이 아니무니다

by 2mokpo 2012. 8. 21.

신문 : 한겨레

2012년8월21일자

글쓴이 : 이명수

 

결국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게 실형이 선고되고 법정구속까지 이뤄졌다.

김 회장은 몰랐고 직원들이 한 일이라는 변호인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가 그런 판단을 하기까지 한화그룹 본부에서 작성한 한 내부 문서가 결정적 구실을 했단다.


그 문서에는 김 회장이 ‘신의 경지에 있고 절대적이고 유일한 충성의 대상’이라는 따위의 노골적이고 생생한 표현이 담겨 있다.

아득하고 착잡하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아득하고,

그런 문서를 작성하고 복무지침으로 회람해야 하는 이들의 처지가 안쓰러워서 착잡하다.

그런 이들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수많은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는 또 어떤가.


한 인간을 ‘신의 경지에 있고

절대적이고 유일한 충성의 대상’으로 규정하거나 섬김을 강요하는 집단은 어떤 경우에도 틀려먹었다.

정상적이지 않다.

남을 뭉개거나 들러리로 취급하면서까지 신처럼 숭앙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란 단언컨대,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집단에선 그런 일들이 일종의 의전이나 관행이 된다.

사이비 교주나 조폭 두목을 떠받드는 태도와 김 한 장 차이도 없이 똑같다.

그런 상황에선 구조를 제아무리 뜯어고쳐야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신의 경지로 떠받들어야 하는 틀 안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간의 존엄이 전제되지 못하는 모든 논의와 시도는 헛되고 삿되다.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은 총수 이름을 감히 못 부른단다.

한 재벌 기업은 자기네 회장을 알파벳 첫 글자인 ‘A’라고 부른다 들었다.

직계가족들도 감히 실명을 못 부르니 이니셜로 호칭하고,

결혼한 딸들의 손을 잡고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자상한 회장님 곁에 사위들 모습이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의 경지에 이른 순수 직계 혈통만 중시해서 그런가 보다 추측만 할밖에.


직원들의 따귀를 때리고 재떨이를 던지고 임원들을 도열시킨 채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구타하는 자본의 우두머리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더구나 그런 이들을 존경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서

무슨 경제민주화 타령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고위 임원을 불시에 자주 해고하는 것으로 유명한 재벌 회장을

한 신문은 ‘살기 위해 몸부림칠 때 나오는 인간 능력의 극한을 직원들로부터 이끌어내는 공포경영’의 달인으로 미화한다.

연쇄살인범은 뭐하러 잡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회 구성원들의 능력이 극한으로 치달아서 역동성 있는 사회가 되도록 그냥 놔두지.


밥벌이 때문이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합리화이든 누군가를 신의 경지로,

절대복종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한

우리나라 대기업 집단의 전근대적인 행태는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건 단지 경제영역의 문제, 재벌 회장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집단의 우두머리를 신으로 섬기라는 어이없는 상황에

자신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짝퉁 신들의 엽기적 행태를 미담으로 둔갑시키는 언론인은 모두 자신에 대한 예의가 없는 이들이다.

자신을 그렇게 초라하고 비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개인의 섬세한 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런 복잡미묘한 사안에선 개그콘서트 갸루상의 무심한 말투를 빌리는 게 효과적일 듯하다.

 ‘자본의 우두머리는 신이 아니므니다.

신의 경지를 강요하며 다른 이에게 함부로 한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므니다.’
진짜 사람이 되려는 날선 자각만으로도 경제민주화의 많은 부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