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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14.문명과 숲

by 2mokpo 2009. 11. 5.

사람이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인류의 삶을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낫게 만드는 모든 것을 가리켜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그런데 몇 천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시작된 이른바 고대 문명조차도 생태적으로 닫힌 공간인 지구 안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면서 벌어진 현상들이어서 애초부터 안타까운 태생적 한계를 지닌 것이었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숲은 자연 속에서 가장 폭넓고 다양하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기에 문명과 자리를 바꾸는 첫번째 대상으로 뽑히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샤토브리앙이란 프랑스 작가이자 외교관은 “문명 앞에 숲이 있었고, 그 뒤에는 사막이 남았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처음부터 인류가 숲을 그 뿌리부터 망가뜨리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더라도 집안에 심어 가꾸면서 자급자족하려 했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인종 23년(1145)과 명종 16년(1186)에 종이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자 집에서 닥나무를 기를 것을 국가에서 명령하기도 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닥나무 관련 기록이 스물네번이나 나오는데 태종 때는 집집마다 몇 그루씩 닥나무를 심을 것을 정해주었고, 이를 어기면 벌까지 내린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프랑스인 루이 로베르가 펄프 종이를 대량으로 만드는 기계를 발명하면서부터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들은 문명의 상징인 종이를 만들기 위해 캐나다나 스웨덴처럼 펄프 원료가 되는 나무 숲을 따로 만들어야만 했고, 심지어 스페인의 유칼립투스나무처럼 대량 재배로 일어난 지하수 고갈이라는 새로운 생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펄프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숲을 없애간 흔적이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 보기는 인류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의 무대로 유명한 독일 자바부르크 숲에서는 지난 시절 도토리를 많이 다는 키 작은 참나무를 줄을 맞추어 심고 그 아래서 돼지를 길러 귀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숲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려 했고, 자연이 지닌 능력 이상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문명 선진국이 앞장서서 단지 먹을거리를 위해 숲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있다.

예컨대 맥도널드 상표를 앞세운 거대 자본은 기껏해야 몇 년밖에 쓸 수 없는 풀밭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열대 숲을 해마다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자연의 보고라고 일컫는 열대우림이 해마다 우리 남한만한 면적만큼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 이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질 좋은 금광이나 은광을 많이 차지한 왕이 주변 국가와 견주어 힘을 자랑할 수 있었던 시절, 오늘날 임업선진국이라 하는 독일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요즘처럼 성능 좋은 착암기가 없던 그 시절엔 금은광맥을 캐기 위해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법을 썼다. 먼저 광산 주변 숲을 모조리 베어 광맥 위에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며칠을 두고 불을 지피면 바위산은 온통 불바다가 된다. 불기운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갑자기 물을 부으면 서로 다른 팽창계수를 가진 금은광맥과 다른 바위들은 서로 갈라지고 그 틈을 쪼개고 들어가 손쉽게 금이나 은을 캘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숲들이 문명의 이름으로 치장한 인간의 사치와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되었는가를.

오늘날 네덜란드라 부르는 홀란드는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막강 함대를 지녔기에 세계 구석구석에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다. 곧고 커다란 돛대를 비롯한 선체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전나무는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 슈바르츠발트에서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까지고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지금처럼 나무를 베어 실어 나르는 장비가 신통치 않았던 시절인지라, 숲 속 라인강으로 연결된 계곡에 거대한 수문을 만들고 나무를 베어낼 동안 그 위쪽에 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가 갑자기 문을 열면 그 아래쪽에 수북이 쌓아놓은 목재는 한꺼번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고, 독일에서 홀란드까지 때론 길이가 수백미터에 이르는 뗏목을 만들어 옮겼다. 이 시절 홀란드 사람들의 목재 수요는 엄청났고, 알토란 같은 숲의 속살인 목재를 아무런 생각 없이 써버린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문명국임을 자처하며 식민지까지 만들어 눈부신 서양 문명을 퍼뜨리던 그들 앞마당에선 정작 산에 나무가 없어 해마다 홍수가 났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생태적 부끄러움은 숲을 문명과 맞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져 독일에 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서양 문명의 지평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인간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숲은 말없이 그러나 호된 질책을 남기면서 쓰러져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 세기부터 사람들은 지구 문명을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에너지원으로 지질시대를 통해 만들어진 화석연료를 마냥 태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서양의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석탄을 본격적으로 쓰기까지 숲은 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유일한 에너지원이었다. 지름 1m, 키 30m를 넘는 커다란 나무고사리나 속새 등으로 이루어진 원시숲이 지질시대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했을 정도로 7천만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놓은 화석연료를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지난 200여년 동안 우리는 마구 써버린 것이다. 그 결과 1850년대에 290PPM이던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이제 340ppm을 넘나들게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무와 숲들은 문명의 이름으로 걸러내고 남은 찌꺼기인 이산화탄소를 다시금 제 살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한편, 이른바 온실효과라는 전지구적 재앙의 주문을 소리 없이 외우면서 어느덧 우리 인류가 아닌 다른 외계인이나 생명체를 위한 다음 문명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료출처 경향닷컴 : 2004.10,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