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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8.숲,영혼의 행굼터

by 2mokpo 2009. 7. 7.

오늘 하루도 계수나무 아래를 거닐며, 그 나무가 떨켜를 만들며 품어내는 그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기로 긴장과 미움과 억울함이 가득했던 내 영혼을 달랬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었다. 아직 달력은 8월을 넘기지 못했는데 북쪽이 고향인 계수나무는 사는 곳을 옮겨 왔어도 본성을 버리지 못하여 벌써 귀엽고 동글한 잎들을 저 먼 가지 끝에서부터 하나 둘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넓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향기가 아니라, 한 해의 가장 두려운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잎을 떨구어 몸을 간추리며 그런 향기를 보내는 존재가 또 어디에 있을까.

삶이란, 결코 만만치 않음을, 그 속에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 싸움에서 우리의 영혼들은 지치고 병들어, 더욱 험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명이 기원하였고, 이를 품어 안은 정결한 숲을 더욱 동경하게 되는 듯하다.

우리의 영혼을 맑게 헹구어줄 풍광들이 어찌 오늘의 계수나무뿐일까. 이제 곧 다가올 산국 향기 풀풀한 가을이면, 숲은 그 숲을 구성하는 나무들이 저마다 가진 곱디 고운 단풍빛깔들로 물들어 갈 것이다. 가장 화려한 빛깔로 치장한 단풍든 잎새들은 장렬한 낙화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들의 그 비장한 순간에, 우리는 감동하고 감탄하며 어느새 맑게 헹구어져 맑은 마음으로 다시금 회색의 도시생활을 견디어 간다.

이내 겨울이 오고, 숲에는 빼곡히 눈이 쌓인다. 내리는 순간 이미 대기의 먼지와 함께 엉클어져 추하게 변하는 도시의 눈과는 달리 숲에 내린 눈은 태초의 그 순결한 눈빛을 가진 채 차곡차곡 쌓인다. 그 눈은 마치 이불처럼 땅을 덮어 매서운 겨울바람의 건조와 추위를 막아낸다. 이는 물이 되어 이듬해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씨앗에 혹은 새싹에 생명의 물이 될 것이며, 겨울 속에 정화되어 다시금 숲이 생명을 얻듯 우리도 새로이 거듭나 돌아오곤 한다.

지난 겨울이 아무리 모질어도 시간은 흐르고 봄은 올 것이다. 언 땅이 녹고, 한결 부드러운 흙 사이로 혹은 굳어 있던 나뭇가지 사이에서 눈이 터 올라 새순들이 삐죽삐죽 돋아난다. 숲은 약동하는 온갖 생명들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우리의 영혼들은 다시금 그 숲에서 살아 있다는 자체의 환희를 느끼고, 생명의 경이로움에 가슴 벅차며 마치 새살이 돋듯, 새순이 나듯 기운을 얻어 새로이 거듭날 것이다.

초록은 곧 생명이다. 생명이 기원한 이 곳 숲에서, 아침에 입은 흰 셔츠가 저녁이면 까맣게 내려앉은 먼지로 더럽혀지듯 도시의 삶에서 누추해진 우리들의 영혼은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무릇 나는, 아니 나를 잉태한 먼먼 조상들은 숲에서 잉태되었다. 불모의 지구를 아름다운 초록별로 만든 그 녹색의 생명들은 이내 숲이 되고, 숲에 인류는 삶의 모든 것을 의탁하여 살아 왔으니 숲은 곧 어머니이며, 종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그 숲에서 지친 영혼을 쉬고, 기대며 다시 충만하게 채워 일어나는가 보다. 숲은 치열하게 경쟁하되 공존하는 순간을 알아 더불어 살아가고, 그 공간을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펼쳐내니 우리들의 영혼은 그 기운이 감싸는 곳에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숲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주는 것은 그 태생적인 생명 때문만도, 계절을 타고 넘나드는 절대적인 풍광 때문만도 아니며 그 숲과 그 숲을 구성하는 유형 무형의 소소한 존재 하나 하나가 의미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느꼈던 그 계수나무의 달콤함이 아니더라도, 밤공기에 강렬하게 침투한 정향나무의 꽃향기에 넋을 놓기도 하며, 솔숲에 은은히 퍼지는 그 맑은 솔향만으로도 새로운 집중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숲을 타고 건너오는 초록빛 바람이 콧가를 간지럽히고 다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 온 몸으로 흐르고, 이는 다시 정신으로 타고 올라 철학으로, 노래로, 문학으로 풀려 나오기도 한다. 낙엽이 쌓이고 쌓여 그 중에 더러는 진한 흙으로 돌아간 깊은 숲길을 걷노라면 그 푹신한 발바닥의 촉감들은 잃었던 감각들을 세세히 되살려 영혼에 쌓인 짐들마저 스르르 내려놓게 만든다. 그래서 어린아이 발걸음처럼 우리를 가볍게 한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은 주름이 깊어가는 눈가에 머물며 어느새, 사물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모두 시원하게 바꾸어 준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의 지친 영혼은 초록의 숲에서 헹구어져 충만해지고 다시 내 일상은 시작된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자료제공 : 2004년 8월30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