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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by 2mokpo 2023. 4. 12.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위대한 업적들과 창안들은 알프스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문의 부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혜와 보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이탈리아를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의 진보를 말할 때 학문에서의 진보와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고딕 양식의 미술 작품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럽의 걸작들을 접하게 된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미술이 갑자기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이라고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이 세 가지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이었다.

이 새로운 지식의 충격에 대해서 유럽의 여러 미술가들과 미술 전통이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들 나름의 개성의 힘과 상상력의 폭에 따라 어떻게 자기를 내세웠는지, 혹은 흔히 있었듯이 어떻게 굴복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아마도 건축가들이 가장 어려운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고딕 양식과 새로이 부활한 고대 건축 양식은 모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것이지만, 그 목적과 정신에 있어서는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스 이북의 건축에서 이 새로운 유행을 채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새로운 유행은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들과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프랑스나 영국, 독일에는 궁륭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주두(柱頭)를 달아서 외면상으로는 원주로 변형시키거나, 트레이서리로 완성된 고딕 식 창문의 뾰족한 아치를 둥근 형태의 아치로 바꾼 교회들이 있다(도판 218).

도판218 피에르 소이에 <캉의 성 피에르 성당 성가대석>, 1518-45, 변형된 고딕양식

 

또한 환상적인 병() 모양의 원주들을 지닌 수도원들도 있고 소탑(小塔)과 부벽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지만 고전적인 디테일로 장식된성()들도 있으며 고전적인 프리즈들과 흉상들로 박공 구조를 이룬 도시의 주택들도 있다(도판 219) 고전적인 규칙이 완벽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은 이런 북방 건축물들을 본다면 혐오감으로 등을 돌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건물들을 현학적인 아카데믹한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이 조화롭지 못한 양식에 포함된 창의력과 기지를 보고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판219 안 발로트와 크리스티안 지크스데니에르스, <브뤼즈의 구 관청(재판소 사기과>, 1535-7. 북유럽의 르네상스 건물

그러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는 원주나 아치와 같은 어떤 분명한 형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군소 화가들만이 그들이 입수한 이탈리아의 판화에서인물의 형태나 제스처를 빌려오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그러나 진정한 미술가라면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위대한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 1471-1528) 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평생 동안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 이 새로운 원칙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창하는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던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소년 시절의 작품 몇 점은 지금도 남아 있다-제단화와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는 가장 큰 공방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 이 공방은 뉘른베르크의 거장 미하엘 볼게무트(Michel Wolgenut)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수습을 마친 뒤에 그는 중세의 모든 젊은 장인들의 관례에 따라 장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고 정착할 곳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동판화가인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pp. 283-4)의 공방을 방문하는 것이 그의 오랜 생각이었으나 그가 콜마르에 도착했을 때는 그 거장이 사망한 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뒤러와 그의 작품을 보는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이 요한 계시록의 무시무시한 환영들이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언들이 그들의 생전에 현실로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도판 220은 요한 계시록 127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발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검사나 궁사로서 악귀와 같은 괴물과 싸우고 있는데 이 괴물의 끔찍스러운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이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 되어 있다.

도판220 알브레히트 뒤러,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 1498. 목판화 39.2 X 28.3cm

 

뒤러는 환상적이며 환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며 또한 대성당들의 현관을창조했던 고딕 미술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증명해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업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북유럽의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뒤러의 이런 습작 중에는 유명해진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그의 토끼 그림(p, 24, 도판 9)이나 풀밭의 일부분을 그린 수채화(도판 221)와 같은 것들이다.

도판221 알브레히트 뒤러, <풀밭>, 1503. 목판화 수채화 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및 연필과 담채, 40.3 X 31.1cm, 빈 알베르티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 이라기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스케치를 그리게 했던 그러한 인내력은 또한 그를 타고난 동판화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동판화 속에 하나의 진정한 소우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부에 세부를 더해나가는 치밀한 작업에 한 번도 진력을 내는 일이 없었다. 1504년에 완성된 <예수 탄생>(도판222)에서 뒤러는 숀가우어(p. 284, 도판 185)가 그의 예쁜 동판화에 표현했던 것과 동일한 테마를 선택했다.

도판222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 탄생>, 인그레이빙, 18.5 X 12cm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은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p. 237, 도판 156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조해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곧 깨닫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 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뒤러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를 지도해줄 확고한 전통이나 확실한 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는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의 표현과 비례 측정은 다소 모호했으나 뒤러는 그러한 난제 때문에 단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선배들(미술의 규칙에 관한 분명한 지식 없이도 활력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선배들의 모호한 관행에 가르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부여하려고 의도했다. 여러 가지 비례의 법칙에 대한 뒤러의 실험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일부러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번째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한 그의 모든 생각들을 구현하고 자랑스럽게 그의 라틴어 이름으로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1504년 그림 (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1504) 이라고 서명했다.

도판223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 인그레이빙, 24.8 X 19.2cm

 

이 동판화에 담겨 있는 업적을 당장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화가는 앞에서 예를 든 그의 작품에서보다 그에게 친숙하지 않은 조형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컴퍼스와 자를 가지고 그렇게 부지런히 재고 균형을 맞추어서 도달한 조화로운 형태들은 이탈리아나 고전 작품의 모델만큼 신빙성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들의 형태와 자세뿐만 아니라 또한 대칭적인구도에 있어서도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맨 처음 느낀 이러한 어색함은 뒤러가 다른 미술가들과는 달리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의 안내를받아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생쥐가 고양이 옆에 조용히 누워 있고, 엘크 사슴과 암소와 토끼와 앵무새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이 숲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지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뱀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주고 있을 때 아담은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또한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의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뒤러 자신은 그렇게 쉽게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동판화를 제작한 다음해에 그는 견문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비밀에 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p350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의 화가가우리에게는 그 이름까지도 확실히 전해지지 않을 만큼 잊혀져 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고 수수께끼 같다. 17세기의 한 저술가는 아샤펜부르크 의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inewald)라는 화가에 관해서 상당히 혼란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화가를 '독일의 코레조' 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들 중의 몇 점을 대단히 칭찬했는데 그로부터 이 작품들과 동일한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다른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 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나 문서에는 그뤼네발트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가 언급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저자가 사실을 혼동해서 기술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거장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그림들의 일부에는 M.G.N이라는 이름의첫글자가 쓰여 있는 점과 마티스 고트하르트 니트하르트 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가 알브레히트 뒤러와 거의 같은 시대에 독일의 아샤펜부르크 근처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제는 이 거장의 진짜 이름이 그뤼네발트가 아니라 마티스 고트하르트 니트하르트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도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티스라는 거장에 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뒤러는 그의 습관, 신념, 취향과 표현의 매너리즘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인 양 우리들 앞에 서 있지만 그뤼네발트는 우리에게 셰익스피어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것같다. 우리가 뒤러를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을 자기 나라의미술을 개혁하고 쇄신한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것을 했는지를 깊이 생각했으며, 여행과 연구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그의 세대를 가르치기 위해서 책을 저술했다. 반면에, '그뤼네발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걸작품들을 그린 화가는 그 자신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들은 크고 작은 지방의 교회에 있는 전통적인 형식의 제단화이며 그중에는 알사스의 한 마을인 이젠하임에 있는 대형 제단화(소위 이젠하임제단)와 거기에 딸린 많은 날개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뒤러처럼 단순한 장인과는 다른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거나, 또는 고딕 시대 말기에 이룩된 종교 예술의 고정된 전통으로 인해 그의 미술 활동이 제한 받았음을 시사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회의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해주고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도판 224)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의 설교자 처럼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수의 죽어가는 신체는 십자가의 고문으로 뒤틀려 있으며, 천형의 가시들은 은 몸을 덮고 있는 곪아터진 상처를 찌르고 있다. 검붉은 피는 병적인 파리한 살빛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표정과 인상적인 손모양으로 고뇌의 예수는 그가 못박힌 갈보리 언덕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고통은 전통적으로 십자가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데 과부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주님이 그녀를 돌보라고 부탁한 복음서 저자 성요한의 팔에 안겨 기절해서 쓰러지고 있고 향유 단지를 가지고 있는 좀 작은 인물로 그려진 성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을 못이긴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다. 십자가의 다른 쪽에는 구세주를 상징하는 양이 십자가를 메고 피를 성찬배 속에 쏟고 있으며 성 세례 요한이 건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는 준엄하고 당당한 몸짓으로 구세주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의 머리 옆에는 그가 한 말이 써 있다. "그 분은 더욱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330)."

도판 224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1515.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 X 307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

 

 

도판225 통칭 '그뤼네발트' <그리스도의 부활>, 1515.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 X 143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

 

(도판 225). 위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이 색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수의는 후광의 여러 색의광선을 반사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위로 날아 올라가는 부활한 예수와 이 갑작스러운 빛의 환영에 압도되어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무기력한 몸짓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있다. 군인들이 갑옷을 입은 채 몸부림치는 광경은 아주 충격적이다. 전경과 배경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는 없으나 무덤 뒤에 있는 군인은 꼬꾸라진 인형들처럼 보이며 그들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예수의 변용된 신체의 조용하고 장엄하고 평온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뒤러 세대에 세번째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가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는 처음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였다. 그는 수년 동안을 남부 독일과오스트리아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알프스 남쪽 산기슭 태생인 조르조네가 산악의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에 (p. 328, 도판 209) 이 젊은 화가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의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뒤러가 그의 동판화(도판 222, 223)를 세상에 내놓았던 1504년에 크라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 가족을 그렸다(도판 226). 이 그림에서 성가족은 숲이 우거진 산악 지대의 한 샘물 근처에서 쉬고 있다. 그 곳은 덤불이 많은 나무들과 아래쪽으로 아름다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들판이다. 성모의 주위에는 작은 천사들의 무리가 모여 있는데 한 천사는 아기 예수에게 딸기를 주고 있고, 다른 천사는 조개 껍질에 물을 길어오고 있으며 나머지 천사들은 자리에 앉아서 플루트와 피리를 불며 피로에 지친 피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다.

도판 226 통칭 '그뤼네발트' <그리스도의 부활>, 1515.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 X 143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프스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눈을 뜨이게 할 수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자연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스 인들조차도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을 그렸다(p. 114, 도관 72).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화가의 묘사력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비로소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겁게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도판227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풍경>, 1526-8년경, 목판에 붙인 양피지에 유채, 30 X 22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도판228 통칭 '마뷰즈', <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 1515년경. 목판에 유채, 230 X 205cm, 프라하 국립미술관

 

도판 228은 화가 얀호사르트(Jan Gossaert), 흔히 마뮤즈(Mabuse : 14782-1532) 라고 불리우는 작가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를 쓴 성 루가는 직업이 화가였다고 한다. 여기에 성 루가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뷰즈가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배경을 그린 방식은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에 관한 그의 지식과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방법 등을 과시하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는 결여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 데 겉보기는 호화롭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의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미술가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헤르토렌보스라는 네덜란드의 도시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라고 불리우는 화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화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516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몇 살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미 1488년에 기성화가로 알려졌으므로 상당 기간 활동을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16세기 말 스페인의 음울한 왕 펠리페 2세가 인간의 간악함에 대해서 그처럼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이 미술가를 특별히 좋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도판 229 230은 펠리페 2세가 사들인 후 아직도 스페인에 남아 있는 보스의 몇몇 세목화들(triptych) 중 하나의 양날개 그림을 보여준다. 왼쪽에서 우리는 악이 세상을 침범하는 것을 본다. 이브의 창조에 뒤이어 아담을 유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하늘에서는 하느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이 떼를 지어 역겨운 곤충의 모습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날개 그림에서 지옥의 모습을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름끼치는 공포와 화염과 고문을 보게 되는데, 반신은 짐승이고 반신은 인간이나 또는 기계로 되어있는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온갖 수법을 동원해 죄 많은 영혼들을 영원히 괴롭히고 벌을 주고 있다.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 이고실감 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도 그가 그린 지옥도의 한 부분에 얀 반 에이크가 아르놀피니의 평화로운 약혼식 장면에 써넣었던 것과 같은 말을 써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기 있었노라

229-30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국과 지옥>, 1510년경, 세폭화의 양날개 패널화, 목판에 유채, 135 X 45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알브레히트 뒤러, <단축법을 연구하는 화가>, 1525, 목판화, 13.6 X 18.2cm, 원근법과 비례에 관한 그의 저서 <컴퍼스와 수준 장치가 달린 긴 자를 이용한 측정 지침>의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