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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2

by 2mokpo 2023. 7. 13.

변모하는 과거

역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새로 발견되어 과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새로운 사실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쓸 때에 근거로 삼은 작품들이 언제 우리들에게 알려졌는지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고미술품 애호가들이 고전 시대의 유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였다. 1506년에 라오콘 군상(도판 69)이 발견되고 같은 시기에 아폴론 벨베데레(도판 64)가 발견되어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도판 69 라오콘 군상

도판 64  아폴론 벨베데레

17세기에는 종교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서 종교적인 열정이 새롭게 고조되는 가운데 초기 기독교 시대의 카타콤(도판 84)이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발굴되었다.

도판84  초기 기독교 시대의 카타콤

그 후에 18세기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재 속에 묻혀 있던 헤르클라네움(1719)과 폼페이(1748)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수년에 걸쳐 많은 그림들이 발굴되었다.(도판 70,71).

도판 71 꽃을 꺾고있는 처녀
도판 70목신(牧神)의 머리

이상하게도 그리스 화병에 그려진 그림의 아름다움이 처음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 것도 18세기에 와서 였다. 이러한 화병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도판 48,49)

도판 48

도판 49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801)은 이집트를 고고학자들에게 개방하게 하여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학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기념물들의 의미와기능을 점차 이해하게 만들어 급기야는 각국의 학자들의 열렬한 연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도판 31, 32, 377.

19세기 초의 그리스는 그때까지도 터키 제국의 일부였으므로 일반 여행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영국의 엘긴 경(Lord Elgin)이 터키 주재 영국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에 부임했을 때는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회교 모스크가 세워져 있었고 고전 시대의 조각 작품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엘긴 경은 허락을 얻어서 조각품의 일부를 영국으로 가져왔으며(도판57)

도판 57

얼마 뒤 1820년에는 멜로스 섬에서 우연히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 상> <p. 105, 도판 65) 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즉각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외교관이자 고고학자인 오스텐 레이드 경(SirAusten Layard)은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을 발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도판 45)

도판 45

1870년에는 독일의 미술 애호가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ich Schliemann)이 호메로스의 시에서 찬양된 장소들을 찾아나서 미케네의 고분들(도판 41)을 발견했다.

도판&nbsp; 41

이쯤되자 고고학자들은 더 이상 비전문가들에게 발굴 작업을 일수 없었다. 각국의 정부와 국립 연구소 측은 유효한 유적지들을 분할해주고, 조직적인 발굴대를 조직하여 출토품은 찾은 사람이 주민이라는 원칙 하에 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발굴대는 올림피아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전에 프랑스 인들이 산발적으로 발굴하던 곳 (도판52) 이었다.

도판 52

이곳에서 독일은 1875년에 저 유명한 <헤르메스 상> (도판 62, 63)을 발견했다.

 도판 62

 도판  63

4년 뒤 또 다른 독일 팀이 페르가몬의 제단(도판 68)을 발굴해서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도판 68

1892년에는 프랑스 팀이 고대 델포이(도판 53)를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그 발굴을 하려면 그리스 마을 전체를 내쫓지 않으면 안될 정도가 되었다.

도판 53

더욱 흥미진진한 발굴의 역사는 19세기 말에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가 처음 발견된 때인데 알타미라(도판 19)의 동굴 벽화집이 최초로 출간된 1880년 당시에는 아주 소수의 학자들만이 미술의 역사가 그때로부터 수만 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도판&nbsp; 19

그 밖에도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도판 27, 29, 30),

도판 27

도판 29

도판 30

인도 북부(도판 80,81),

도판 80

도판 81

고대 중국( 도판 93.94)의 미술대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위대한 모험심과 학식을 겸비한 사람들의 답사 덕분이다.

도판 93

도판 94

1905년에 우서베르그에서 바이킹들의 고분(도판 101)을 발견한 것도 이런 사람들의 덕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도판 101

그 뒤 중동에서 잇따라 발견되어 이 책의 도판으로 사용된 출토품들 중에는1900년경 프랑스 발굴대에 의해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전승 기념비(도판 44)

도판&nbsp; 44

이집트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화들(도판 79),

영국과 독일 발굴대가 발견한 텔--아마르나 발굴 출토품들(도판 39,40),

도판 39,

도판 40

그리고 카나면경(Lond Camarvon)과 하워드 카터(Howand Carter)에 의해 1922년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묘소에서 출토되어 물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보물들(도판 42)을 들수 있다. 우르의 고대 수메르 왕국의 고분(p70, 도판43) 답사는 1926년부터 레너드울리에 의해서 행해졌다. 내가 이 책을 쓸 때 포함시킬 수 있었던 최근의 발견들은 1932-3년에 걸쳐서 행해진 두라 에우로스의 발굴에서 출토된유태교 회당의 벽화(도판 82)와

도판 82

1940년 우연하게 발견된 라스코 동글(도판 20.21),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 출토된 청동 두상들 중의 하나(도판 23) 등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유물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도판20 -말 기원전 15,000-10,000년경, 동굴 벽화, 프랑스 라스코 동굴
도판21 프랑스 라스코 동굴 천장에 그려진 동물들, 기원전 15,000-10,000년경
도판23 흑인 청동 두상, 나이지리아 이페에서 출토, 족장의 상(像)으로 추정, 12-14세기, 청동, 높이 36cm, 런던 인류박물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발견의 시대를 논하는 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주의를 주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의 거장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유명한 청동 조각 작품들을 알기 위해서 대부분 후세의 모조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를들면 미론의 작품도 로마 시대의 미술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대리석으로 만든 모조품(도판 55)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며

도판 55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그리스 미술의 영상은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다. 이런 연유로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는 독자들의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 대신에 눈에 상감을 한 델포이의 <청동 전차 경주자> 도판 53,54)을 선택했었다.

도판53

도판54

그 사이 19728월에 이탈리아 남단의 리아체 마을 근해에서 분명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 쌍의 조상이 바다에서 인양되었다. 이 두 개의 상(도판 408) 통해 우리는 그리스 조상의 미에대한 선입견이 잘못됐음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등신상인 이 청동상들은 영웅이거나 경기자의 상으로 보이며 로마 인들이 배에 싣고 가다가 아마도 폭풍을 만나 내버린 물건일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이 상들의 제작 연대와 장소에 관해서 아직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그 모습만 보아도 이 작품의 미적인 가치와인상적인 활력을 확산시키기에 충분하다. 근육이 강건한 육체와 남자답게 덥수룩한 수염이 달린 머리를 모델링하는 데 보인 솜씨는 탓할 데가 하나도 없다. 눈과입술과 심지어 이빨까지도 다른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소위 '이상적'인 것만을 찾는 그리스 미술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위대한 미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새로 발견된 이 두 개의상은 비평가들의 독단적 견해를 일축하고 미술에 관해서 일반론을 펴면 필수록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사실을 엄연하게 보여준다.

도판408

우리들이 그리스 회화라고 알고 있는 것은 화병에 그려진 것 전부이며, 로마나 이집트 땅에서 발견된 모작이나 개작들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알렉산더대왕의 고향인 마케도니아, 즉 지금의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베르기나의 왕릉이 발견됨으로써 극적으로 달라졌다. 사실 왕릉의 주실에서 발견된 유해는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 즉 기원전 336년에 암살된 필리포스 2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970년대에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Manolis Andronikos) 교수에 의해서 발굴된 귀중한 출토품 중에는 세간 설비와 보석류, 심지어 직물까지 있었으며 탁월한 화가들이 그렸을 법한 벽화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벽화 중의 하나가 주실보다 약간 작은측실의 외벽에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신화인 <페르세포네(로마 신화의 프로세르피나에 해당한다)의 겁탈>을 표현하고 있다. 그 신화의 이야기는 이렇다. 지하 세계의 통치자인 플루톤(하데스)은 이승을 오랫만에 방문했다가 한 소녀가 친구들과 함께 꽃밭에서 꽃을 꺾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반해 그녀를 지하세계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의 왕비로서 지하 세계를 다스리며 살았는데 슬퍼하는 그녀의 어머니 데메테르(또는 케레스)에게 봄과 여름에만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분명 무덤을 장식하기에 적당한 이 테마는 벽화의 중앙 부분을 보여주는 도판410 의 주제이다.

도판 410

이 벽화에 관해서는 197911월에 안드로니코스 교수가 영국 아카데미에서 '베르기나의 왕릉'이란 주제로 발표한 강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전체 그림은 길이 3.5미터 높이 1.01미터의 하나의 표면 위에 전개되는데 구도가 대단히 자유롭고 대답하며 안정되어 있다. 왼쪽 상단 구석에 뇌문(제우스의 번개) 같은 것이 보인다. 헤르메스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마차 앞을 달려간다.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플루톤은 오른손에 홀과 고삐를 잡고 왼손으로는 페르세포네의 허리를 껴안고 있다. 그녀는 절망하며 두 팔을 높이 쳐들고 몸을 뒤로 젖히고 있다. 지하 세계의 신은 오른발을 마차 안에 들여놓고 왼발은 땅을 딛고 있다. 땅에서는 페르세포네와 그녀의 친구 키아네가 꺾은 꽃을 볼 수 있다. 키아네는 겁에 질려 마차 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여기에 있는 부분도를 가지고는 얼핏 보아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아름답게 그려진 플루톤의 머리, 단축법으로 그려진 전차 바퀴와 페르세포네의 옷자락이 나부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플루톤이 왼손으로 껴안은 페르세포네의 반라의 육체와 그녀가 절망적인 몸짓으로 두 팔을 위로 뻗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벽화에 그려진 군상은 적어도 기원전 4세기의 대가들이 표현할 수 있었던 힘과정열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다.

 

아들 알렉산더 대왕에게 거대한 제국을 세울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마케도니아의 강력한 왕의 무덤에 관해서 배우고 있을 동안 고고학자들은 중국 북부의서안시 근처에서 그보다 더 강력한 통치자의 고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왕릉의 주인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로 현재 중국에서는 진 시황제라고 부른다. 기원전 21년부터 210 년까지(알렉산더 대왕보다 약 100년 뒤) 통치한 이 무시무시한 전쟁의 왕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서쪽으로부터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만리 장성을 쌓은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우리는 '그가 만리장성을 쌓았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가 신하들을 시켜서 이 성을 쌓게 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새로운 출토품들은 만리 장성보다 훨씬 더 비범한 사업을 실현시키기 위한 충분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므로 이 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병사와 병마 도용이라고 알려진 이 유물들은 진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으로 등산상의 군인들이 무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아직도 다 발굴되지 못했다 (도판 411).

도판 411

이 책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관해 쓸 때 나는 독자들에게이런 매장 방식은 민중들에게 엄청난 노동력을 강요했으며 또 이처럼 믿을 수 없이 큰 사업을 하게 만든 종교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조각가를 의미하는 이집트 단어 중의 하나는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 이며 또한 무덤 안에있는 조각상들은 아마도 권세 있는 주인을 위해 죽음의 나라에 제물로 바쳐질 하인들과 노예들의 대용품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나는 중국의 한나라 시대(진 시황제의 통치에 뒤이은)의 분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어느 정도 이집트 인들의 매장 풍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자기의 매장을 위해서 7,000구 이상의 말과 무기와 제복과 장신구를 갖추고 있는 병사들을 그의 장인들에게 만들라고 명령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감탄한 바 있는 나한 상(p.151, 도판 96)에서와 같은 생생한 묘사가 그것보다 12백년 전에 이처럼 놀라운 규모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새롭게 발견된 그리스의 조각상들과 같이 이들 병사의 상들에도 채색을 하여 더 더욱 생생하게 보인다. 그 색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도판 412).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술이 우리들의 감탄을 자아내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쳐부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적을 용납하지 않았던 자칭 초인간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조각상들이 대부분 이런 종류의 증오의 희생물(도판 413)이 되었다.

도판 413

이 성당의 정면 도판(도판 125)을 보면 세 개의 입구 위에 수평으로 열을 짓고 서 있는 조상들을 볼 수 있다. 이 조각상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왕들을 표현한 것이었으므로 모두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은 이것들이 프랑스 왕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분노한 혁명가들은 그들의 목을 루이 16세의 목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성당에서 보는 것은 19세기의 비올레 르 뒤크(Viollet-le-Duc)가 보수한 것이다. 그는 그의 생애와 그의온 힘을 프랑스 중세 건물들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데 바쳤다. 아마도 그 동기는 크노소스의 벽화를 복원한 아서 에반스 경과 같았을 것이다.

도판 125

1230년경 파리의 대성당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들 조각상들의 손실은 분명히 우리의 지식에 중대한 공백을 만들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래서 19774월에 파리의 한 중심부에서 은행의 기초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땅을 파던 중에 캐낸 유물들을 보고 미술사가들이 기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분명히 18세기에 파손된 거기에 버려진 것으로 364개가 넘는 파편들이었다(도판 413). 이두상 들은 비록 무참하게 손상을 입었지만 그것보다 앞선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각상들(도판 127)이나 동시대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조각상들(도판 129)을 연상시키는 위엄 있고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며 조각가의 솜씨를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도판127

도판129

야릇하게도 이렇게 파손된것으로 말미암아 앞에서의 두 사례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색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각상들 또한 발견 당시에 채색과 도금을 한 흔적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런 흔적들은 그 유물의 광선에 계속 노출되었다면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중세 건축물(p. 188, 도판 124) 못지 않게 기념비적인 중세 조각들도 처음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견과 마찬가지로 중세 작품의 외양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도 당연히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끊임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 설레이는 기쁨 중의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