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 네델란드

by 2mokpo 2023. 5. 2.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자 네덜란드와같은 조그만 나라의 미술에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벨기에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은 그 당시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이들 신교 상인들의 취향은 국경 너머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과 아주 달랐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즉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도시가 점차 안정된 기반을 확보해 가고 그들의 부가 축적됨에 따라 그들의 세계관도 성숙해갔다. 그러나 이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네덜란드의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17세기 중엽,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새로 탄생된 그들 국가의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시청사를 짓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크고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도판 268).

도판 268 야콥 반 캄펜 설계, <암스테르담의 궁전(전에는 시청)>, 1648, 17세기 네덜란드의 시청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런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주듯이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 했으며,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그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 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더욱이 네덜란드 도시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의 위원회 및 자치 단체의 임원들은 회의실이나 모든 장소에 그들의 집단 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고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의 양식이 유행에 뒤지게 되면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자유로운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인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0-1666)는 바로 그와 같은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할스는 루벤스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신교도였으므로 가톨릭 권인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을 떠나서 네덜란드의 부유한 도시인 하를렘(Harlem)에 정착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가 빵가게나 구둣방 주인에게 가끔 돈을 꾸어썼다는 식의 것 이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는 여든 살 이상을 살았는데 말년에 시립 양로원이 제공하는 조그마한 수입으로 살며 양로원 이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도판269 프란스 할스 <성 조지 시민 군단의 장교들의 연회>, 1616, 캔버스에 유채, 174 X 324cm, 하를렘 프린스 할스 미술관

도판 269는 거의 초창기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 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잘 보여준다. 자랑스럽게 독립한 네덜란드 여러 도시들의 시민들은 대개 가장 부유한 주민들의 지휘하에 차례로 군복무를 해야했다. 임무를 할당해 맡은 각 부대들의 장교들을 위해 호사스런 연회를 베푸는 것이 당시 하를렘 시의 관습이었고 이 행복한 순간을 거대한 그림으로 남겨 기념하는 것도 전통이 되었다. 미술가는 그토록 많은 인물들을 이전에도 항상 그랬듯이딱딱하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닮은 모습으로 하나의 틀 속에 그려 넣어야 했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할스는 처음부터 어떻게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 지와 그와 같이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을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이 없이 각각의 인물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마치 우리는 그들을 틀림없이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하게 된다. 잔을 들고 탁자 끝에 앉아 모임을 주재하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연대장으로부터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으나 마치 자신의 멋진 군복을 뽐내듯이 의기양양해 보이는 맞은편 끝의 젊은 기수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들이 모두 그렇다.

할스와 그의 가족에게는 조그마한 수입밖에 되지 못한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 중하나인 도판 270을 보면,

도판 270 프린스 할스, <피터 반 덴 부르케 초상>, 1633년경, 캔버스에 유채, 71.2 X 61cm, 런던 켄우드 유증

그의 능란한 솜씨를 더욱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면 이것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우리는 마치 이 피터 반 덴 브루케라는 17세기의 무역 상인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약 한 세기 전에 그린 홀바인의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라든가 같은 시기의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그려진 루벤스와 반다이크 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과 비교해보자. 그들이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화가들이 주문자의 자세에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이처럼 대답하고파격적인 그림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할스가 물감과 붓을 다루는 바로 그 방법을 보면 그가 순간적인 인상을 재빨리 포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초상화들은 눈에 뜨일 정도의 인내력을 가지고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가 세부를 하나하나씩 세심하게 그려나가는 동안에 그 초상화의 인물은 한참동안 모델로 앉아 있어야 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할스는 그의 모델들을 결코 지루하고 따분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몇 번 붓질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소매의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그의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을 보는 것 같다. 물론 할스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 즉 초상화의 주인공이 그다운 동작과 분위기 속에서 우연하게 취하는 듯한 순간적인 인상의 포착은 치밀하게 계산된 노력이 없이는 결코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도판271 지몬 데 블리헤르,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1640-45년경, 41.2 X 54.8cm, 런던 국립미술관

도판 271은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Vieger : 1601-53)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들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림을 흥미있게 만들기 위해 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그리고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향의 들판을 그렸다. 그러나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앞에서 클로드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를 숭배하게 된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실제 풍경을 변경시켜서 그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정경과 흡사하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영국인들은 클로드의 작품 세계를 연상하게 해주는 풍경이나 정원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뜻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불렀다. 그 이후 우리는 이 단어를 허물어진 성이나 석양뿐만 아니라 또한 돛단배나 풍차와 같은 소박한 사물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단순한 사물에 '픽처레스크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로드의 그림을 연상시켜서가 아니라 데 블리헤르나 반 호이엔과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처음으로 가식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든 이 겸허한 거장들 덕분에 누리는 희열인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그리고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t van Rin : 1606-69)을 들 수 있다.

그는 프란스 할스나 루벤스보다는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이고 반 다이크나 벨라스케스보다는 일곱 살 아래였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그가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지도적인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던 루벤스처럼 달필의 외교 사절단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거장들 중의 누구보다도 렘브란트를 더 친숙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산()의 비애와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 일련의 자화상들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자화상들이 일종의 독특한 자서전인 셈이다.

렘브란트는 1606년에 대학 도시 레이덴(Leiden)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해서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포기했다. 그 당시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레이덴을 떠나 상업의 중심지인 번잡한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해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수집하면서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1642년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여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그의 수집품들을 경매에 부쳐서 처분해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형식적으로 그를 그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드는 협정을 만들었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의 위대한 걸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충실한 반려자들은 그보다 먼저 죽었다. 1669년에 결국 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판273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5-8년경, 목판에 유채, 49.2 X 41cm, 빈 미술사 박물관

도판 273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용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심오한 이해가 없었다면 렘브란트는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이며 후에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된 안 지크스(도판 274) 의 초상화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274 렘브란트 반 레인, <얀 지크스>, 1654년경, 캔버스에 유채, 112 X 102cm, 암스테르담 지크스 컬렉션

이 작품을 프란스 할스의 생생한 초상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할스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스냅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에 렘브란트는 인물의 전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할스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도 그의 예술적인 기량, 즉 금실로 짠 끈의 광택이나 주름깃에 아롱거리는 광선 등을 표현하는 기량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는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한 완성은 화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했으며 그래서 그는 얀 지크스의 장갑낀 왼손을 단순한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은 오히려 이 인물상에서 느껴지는 생명감을 고양시켜주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인물들알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인물의 성격과 지위 등을 요약해서 묘사한 방법으로 인해 기억에 남아 있는 역대 거장들의 다른 많은 초상화들을 익히 보아왔다

275 렘브란트 반 레인,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 1655년경, 종이에 갈대펜과 갈색 잉크, 17.3 X 21.8cm, 파리 루브르

도판 275는 성경에 나오는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마태오 복음1821-35)를 묘사한 소묘다. 이 소묘는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그림 자체가 설명이다. 셈을 청산하는 날 커다란 장부를 살펴보는 남자와 함께 주인이 앉아 있다. 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 속을 뒤지는 것 같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빚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분주한 회계사와 위엄 있는 주인과 죄송스러워하는 하인의 상호 관계가 몇 개 안되는 선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의 내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제스처나 동작을 거의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연극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도판276 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1642, 목판에 유채, 73 X 61.5cm,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도판 276도 역시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 유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것은 다윗 왕이 그의 사악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해주는 장면인데, 이전에는 다루어진 적이 없는 주제이다. 렘브란트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성지(聖地)의 왕들과 족장들을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며 번화한 암스테르담의 항구에서 본 동방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윗 왕에게 큰 터번을 쓴 터어키 사람 같은 옷을 입혔고 압살롬에게는 오리엔트의 환도를 차게 하였다. 그의 화가다운 눈은 이러한 동방 사람들의 화려한 의상에 매료되었다. 오리엔트의 의상은 그에게 값비싼 천위에서 어른거리는 빛과 금은보석의 광채를 묘사할 기회를 부여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못지않게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는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렘브란트는 이들보다 밝은색을 훨씬 더 적게 사용했다. 그의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첫인상은 어둠침침한 갈색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색조들은 몇 안되는 밝고 현란한 색채와의 대조를 보다 강하고 힘차게 돋보이게 만든다. 그 결과 그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빛은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그러나 그는 명암의 마술적인 효과를 그 자체를 위해서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한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으리으리한 옷차림을 한왕자가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비는 자세나 그것을 조용하고 슬픈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다윗 왕의 모습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압살롬의 얼굴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전에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도판277 렘브란트 반 레인, 설교하는 그리스도>, 1652년경, 에칭, 15.5 X 20.7cm, 빈 미술사 박물관

도관 277은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중의 하나인데 이것 역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설교를 하고 있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의 주위에 모여 있다. 이번에는 렘브란트 자신이 살고 있던 도시 주변에서 모델을 택했다. 렘브란트는 오랫동안 암스테르담의 유태인 거리에서 살았고 성경을 설명한 그림에 도입하기 위해서 유태인들의 용모와 의상을 연구했다. 이 그림에서 유태인들은 옹기종기 서 있거나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혹은 매혹되기도 하고 혹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예수의 뒤에 서 있는 뚱뚱한 사람은 바리새파 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격으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탈리아 미술의 아름다운 인물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처음 볼 때 때때로 충격을 받곤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으며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추한 것까지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당대의 다른 미술가들처럼 렘브란트도 카라바조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제작 태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인물군을 배치하는데 얼마나 많은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했는지 잊게 만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군중들만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예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을 겉보기에는 우연한 듯이 그리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군상들로 배치하는 기술을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에서 배웠다. 그는 결코 이탈리아 미술을 경멸하지 않았다. 이 거장을 당시의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한 외로운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렘브란트라는 존재는 네덜란드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당시의 어떤 화가도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교의 나라 네덜란드에 그들 나름의 업적으로 해서 연구하고 감상할 가치가 있는 화가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완성시킨 17세기의 화가는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Jan Steen: 1626-79)이었다. 그 당시의 다른 많은 미술가들처럼 스텐도 그림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여관을 경영하여 돈을 벌었다.

278 얀 스텐, <세례 잔치>, 1664, 캔버스에 유채, 88.9 X 108.6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도판 278은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인 세례를 축하하는 장면이다. 편안한 방 한 구석에 아기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가 있고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여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다. 유쾌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유형과 형상들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

. 그러나 모든 세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화가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혼합시킨 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인물만으로도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 되고 있다. 원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작품의 화려한 색채들이 주는 따사로움과 부드러움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이라고 하면 얀 스텐의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유쾌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보다 렘브란트의 정신에 가까운 분위기를 표현한 다른 화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풍경화가 야콥 반 로이스탈 이었다. 로이스달은 얀 스텐과 동년배로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의 제2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가 성장하고 있을 때 얀 반 호이엔은 물론 렘브란트의 작품들까지도 이미 유명해 있었기 때문에 분명 그의 취향이나 테마의 선택은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생애의 전반기를 하를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냈는데 그 도시는 숲이 우거진 모래 둔덕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는 이 넓은 둔덕에 생겨나는 명암의 효과를 즐겨 관찰했으며 점점 '한 폭의 그림 같은 숲의 풍경(도판 279)을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279 야곱 반 로이스달,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1665-70, 캔버스에 유채, 107.5 X 143cm, 런던 국립미술관

로이스달은 검고 어두컴컴한 구름, 어두워져가는 저녁 햇살, 폐허가 된 성과 콸콸 흐르는 개울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클로드 로랭이 이탈리아 풍경의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였듯이 그는 북유럽 풍경의 시정을 발견해낸 화가였다. 그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자연 속에 반영되는 자기 자신의 정서와 기분을 로이스달만큼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Jan Venmeer van Delft : 1632-75)였다. 베르메르는 조심스럽고세심하게 일을 하는 화가였던 것 같다. 그는 평생 동안 그렇게 많은 수의 작품 남기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작품은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자처럼(도판 281) 단순한일을 하고 있는 단 한 사람만을 보여준다. 베르메르와 함께 유머러스한 요소는 풍속화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의 그림은 사실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281 얀 베르메르, <부엌의 하녀>,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5 X 41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화를 볼 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라면 그것이일종의 기적과 같은 것이라는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그 기적적인 특징들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특징 중의 하나는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밝고 정확한 화면 속에는 고심하거나 힘들여 제작한 흔적이 없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 않고도 사진의 거친 대조를 교묘히 부드럽게 수정하는 사진사처럼 베르메르는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처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드러움과 정확성을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시킨 데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감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피터 블로트, <다락방에서 떨고 있는 가난한 화가>, 1640년경, 양피지에 검정 분필로 그린 소묘, 17.7 X 15.5cm, 런던 대영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