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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8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 유럽

by 2mokpo 2023. 4. 18.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그들에게는 소묘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며, 또 주제상의 어떠한 문제도 그들이 감당하기 벅찬 만큼 복잡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심지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들까지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p361

 

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것이 그들의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한 결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장면에 젊은 운동 선수들같은 우람한 체격의 나체 인물들이 가득 등장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놓으면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이 마침내 정지해버린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면에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해보았다. 터무니없이 기발한 착상으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상징적인 의미와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데, 사실 그러한 지식이란 굉장한 학식을 지닌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361

 

위대한 고전적인거장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이 새롭고 생소한 실험을 시작했고 또 고무되기도 했다. 바로 그들의 명성과 그들이 만년에 누린 명예가 그들로 하여금 구도나 채색에 있어서 새롭고 비정통적인 효과를 시험해봄으로써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모든 관례를 대담하게 무시할 때가 많았다. 대중으로 하여금 한 예술가의 기발한 착상창안을 찬양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 것도 미켈란젤로였으며 자신의 초기 걸작의 비할 데 없는 완벽성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표현의 새로운 수법과 양상을 탐구하는 천재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도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362

 

이러한 대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 미술가들이 그들의 독창적인 창안을 가지고 대중을 놀라게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소 재미있는 디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가이자 화기인 페테리코 추가리 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도판231)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231 페데리코 추카리, <로마의 추카리 궁의 창문>, 1592

도판232 안드레아 팔라디오, <바첸차 부근의 빌라 토론다>, 1550년, 이탈리아 16세기 별장

도판 232는 비첸차 근처에 있는 그의 유명한 별장인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이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기발한 창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면이 동일하며, 하나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각 면이 신전의 정면 형태를 한 현관을가지고 있어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구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기발함과 인상적인 효과에 대한 추구가 건축의 일반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71)였다. 첼리니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유명한 자서전에서 그 시대의 생활상에 관한 매우 다채롭고 생생한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거만하고 잔인하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마치 뒤마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재미있게 그의 모험담을 들려주기 때문에 그에게 화를 낼 수가 없다. 허영심과 자만,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한 궁전에서 다른 궁전으로 이동해 다니며 싸움도 하고 명성을 얻기도 한 첼리니는 정말로 그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받고 점잖은 공방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나 추기경들이 다투어서 그의 호의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의 '대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몇 안되는 그의 작품 중에 1543년에 프랑스의 왕을 위해 만든 금제 소금 그릇(도판 233)이 있다.

233 벤베누토 첼리니, <소금 그릇>, 1543, 흑단(黑檀) 바탕 위에 금과 칠보 세공, 길이 33.5cm, 빈 미술사 박물관

첼리니는 이 작품에 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를하고 있다. 그에게 감히 작품의 주제를 제시한 두 사람의 유명한 학자들을 그가 어떻게 꾸짖었으며, 땅과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고안해낸 것을 어떻게 피렌밀랍으로 모형을 만들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땅과 바다가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인물상의 다리가 서로 맞물리게 했으며 "남자로 표현된 해신(海神)은 소금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배를 잡고 있으며, 그 밑에 네 마리의 해마를 배치하고 그에게 삼지창을 쥐어주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한 대지의 여신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그 옆에 후춧가루를 담을 수 있는 풍부한 장식의 신전을 놓았다." 그러나 이 모든 교묘한 창안은 첼리니가 왕의 금고에서 금을 운반해오다가 네 명의 강도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혼자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보다는 재미가 덜하다. 철리니가 만든 매끈하고 우아한 인물 모습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장식적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지 못한 건강한 활기를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한가닥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정신을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Pamiganino; 1503-40)의 작품에서 찾아볼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성모상(도판 234)이 성경에 나오는 주제를 가식과 지나친 기교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작품에는 라파엘로가 이 테마를 다루었을 때 보여준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 전혀없다.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자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미술가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고 했다. 이러한 효과를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놓았다. 이 그림의 구도는 그가 종래의 그림에서 볼 수있는 조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인물들을 성모의 양쪽에 균등하게 배치하는 대신에 붐비는 천사들을 비좁은 왼쪽 구석에 몰아넣고, 오른쪽은 넓게 터놓아 키가 큰 예언자의 모습 전신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리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너무 작아져서 그 키가 성모의 무릎에도 채 못미치고 있다.

234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마돈나>, 1534-40, 화가의 죽음으로 미완성, 목판에 유채, 216 X 132cm, 피렌체 우피치

 

전시대 거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이 기묘한 시대의 기타 다른 미술가들은 선배들을 능가하려고 그처럼 절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수준의 기량과 솜씨에 만족했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노력 가운데몇몇 가지는 충분히 놀랄만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전형적인 예는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조반니 다 볼로냐(Giovanni da Bologna) 혹은 잠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 : 1529-1608)가 제작한 신들의 사자(使者)<머큐리 상>(도판 235)이다. 그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른속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그의 유명한 <머큐리 상>은 발 끝으로만 땅을 디디고 있다. 아니 사실은 땅이라기보다 남풍(南風)을 상징하는 가면의 입에서 분출되는 바람을 디디고 있다

235 잠볼로냐, <머큐리 상>, 1580, 청동, 높이 187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야코포 로부스터(Jacopo Robusti : 1518-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였다. 그도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만은 예외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는 단순한 욕망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티치아노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화가로서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그림들은 감동적이기보다는 쾌감을 주는 경향이 더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즉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경의 엄숙한 이야기와 성자들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옳았건 틀렸건 간에 그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236 틴토레토,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년경, 캔버스에 유채, 405 X 405cm,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도판 236은 그가 그의그림을 비범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이그림은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처럼 화면 위에 질서있게 배치된 인물상들이 아니라 이상하게 뚫려 있는 궁릉이다. 왼쪽 구석에는 후광이 빛나는 키가 큰 사람이 서 있는데, 그는 지금벌어지고 있는 일을 멈추게 하려는 듯이 팔을 쳐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오른쪽의 궁륭 천장 바로 아래에서 막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묘소에서 시신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관의 뚜껑을 열었고 터번을 쓴 또 한 사람이 그들을 돕고 있다. 뒤에 서 있는 귀족은 횃불을 들고다른 묘소의 비(碑銘)을 읽으려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히 지하 묘굴을 파헤치고있는 중이다. 시체 하나가 양탄자 위에 널부러져 누워 있는데, 그 모습이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시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놀란 표정으로 성인 - 후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틀림없이 성인일 것이다-을 보면서 커다란 몸짓을 하고 있는 남녀한 무리가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책을 한 권 들고 서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는 바로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인 복음서 저자 성 마르코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이교도인 회교도들의 도시인)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네치아에는 그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서 성 마르코(산 마르코) 대성당에 유명한 감실이 건립되었다.

 

 

그림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237)는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극적인 사건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들을 향해 달려나올 것같이 보인다. 한편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그 당시 피렌체의 위대한 비평가이자 전기 작가(조르조 바사리家)인(Giorgio Vasari : 1511-74)는 틴토레토를 이렇게 평가했다. "만약 그가 정통적인 방법을 버리지 않고 선배들의 아름다운 양식을 따랐다면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바사리는 용의주도하지 못한 제작방법과 괴상한 취향이 그의 작품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바사리는 틴토레토가그의 작품에 '마무리 손질' 을 하지 않은 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또 "그의 스케치는 아주 거칠어서 그의 연필 획선은 정확한 묘사보다는 힘을 보여주며 또 우연하게 그려진 것같이 보인다" 라고 했다. 그러한 비난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시대의 미술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의 위대한 혁신자들은 본질적인것에만 집중을 하고 통상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기법적인 완성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틴토레토와 같은 시대에는 기법적인 탁월함이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약간의 기계적인 소질만 있으면 누구나 그 기법상의트럭에 숙달될 수 있었다.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이.

237 틴토레토,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1555-8년경, 캔버스에 유채, 157.5 X 100.3cm, 런던 국립미술관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그리스의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15412-1614)로 보통 그는 간략하게 '그리스인' 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불렸다. 그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라고는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세상의 고립된 지역에서 베네치아로 건너왔다.

238 엘 그레코, <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0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224.5 X 192.8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판 238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은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한 구석에서 환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쳐다보며 예언자의 몸짓으로 두 팔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 요한이다.

다음은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성 요한을 불러 일곱 개의 봉인(封印)을 떼는 것을 와서 보라'는 대목 중의 한 부분(69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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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그는 그 후 유럽의 외진 곳인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비평가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를 설명해준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고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이런 것이 교리상 허용된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 프레스코 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은 뒤러보다는 스물여섯 살 아래이고 첼리니보다는 불과 세 살 위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긴밀한 교역 관계에 있었던 부유한 상업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곧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였던 바젤(Basle)로 갔다.

이렇게 해서 홀바인은 뒤러가 평생 동안 그처럼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좀더 손쉽게 습득했다. 홀바인은 화가 집안(아버지도 유명한 화가였다) 출신인 데다가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마 안가서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을 모두 다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서른 살쯤 되었을 때 바젤의 시장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성모상>(도판240)을 그렸다.

 

240 () 한스 홀바인,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1528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5 X 102cm, 다름슈타트 성()미술관

도판242 () 한스 홀바인, <리처드 사우스웰 경>, 1536, 목판에 유채, 47.5 X 38cm, 피렌체 우피치

도판 242는 헨리8세의 신하로 수도원의 해체에 참가했던 관리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 이다. (``)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우리는 거장의빈틈없는 솜씨를 발견할수 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의도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술도 그와 비슷한꼴이 되었다. 사실상 영국의 회화 중에서 종교 개혁의 회오리를 견디어낸 유일한 분야는 홀바인이 그처럼 확고하게 다져놓은 초상화뿐이었다. 이 분야에서조차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에 귀족적인 세련과 우아함이 이상시 되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도판 244)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이것은 필립 시드니 경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 이었던 유명한 영국의 화가 니콜라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 : 1547-1619)가 그린 '세밀화이다. 가시가 많은 들장미 넝쿨에 둘러싸여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맥없이 나무에기대 서 있는 이 우아한 청년을 보면 정말 시드니 경의 전원시(田園詩)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연상하게 된다. 대충 고귀한 사랑이 괴로움을 가져온다(Datpoenas -laudata fides)' 라는 의미의 라틴어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그 괴로움이라는 것이 여기에 그려져 있는 가시들보다 더 절실한 것인지는 마음쓸 일이 아니다. 이 시대의 젊은 멋쟁이라면 사랑의 슬픔과 짝사랑을 과장해서 표시하게 되어있었다. 이러한 한숨과 소네트들은 모두 우아하고 멋진 장난으로 아무도 심각하게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모두들 색다르게 변형시키거나 세련되게 만들어 자신을 뽐내고 싶어 했다.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16세기 프랑드르 최대의 풍속 화가는 피터 브뢰헬(1525?-69)이었다.

그도 당대의 많은 북유럽 미술가들처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안트웨르펜과 브뤼셀에서 살면서 작업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일상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두 도시에서 그는 1560년대에 그의 그림의 대부분을 그렸는데 그 때에 냉혹한 알바 공(Duke of Alva: 네덜란드의 신교도를 탄압했던 스페인 귀족-역주)이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뒤러나 첼리니에게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이 중요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소묘 작품에서 의연한 화가의 어깨 너머로 어리숙해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이 그림을 보면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의 대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도판 245).

245 피터 브뢰헬(), <화가와 고객>, 1565년경, 갈색 종이에 펜과 검정 잉크, 25 X 21.6cm, 빈 알베르티나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플랑드르의 농부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가들에 대해서 범하기 쉬운 공통적인 실수의 하나다. 우리는 흔히 작품과 작가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디킨스(Dickens)를 픽크윅 씨의 유쾌한 패거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쥘 베른(Jules Vene)을 대단한 발명가이자 모험가로 생각한다. 만약 브뢰헬 자신이 농부였다면 그는 농부들을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도시 사람이었고 농촌의 순박한 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세익스피어와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에 있어서 목수 퀸스와 직조공 보텀은 일종의 '어릿광대'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시골뜨기를 우스갯거리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세익스피어나 브뢰헬이 속물 근성에서 이러한 관행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박한 시골 생활은 힐리어드가 그린 신사들의 생활과 예의 범절보다 덜 위장되어 있고 인간 본성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인위적이고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지지 않는다.

 

브뢰헬이 그린 인간 희극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이 있다

246 피터 브뢰헬(), <시골의 결혼 잔치>, 1568년경, 목판에 유채, 114 X 164cm, 빈 미술사 박물관

(도판 246. 대부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도판으로는그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모든 세부가 더 더욱 작게 축소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잔치는 배경에 짚을 높이 쌓아올린 헛간에서벌어지고 있다. 신부는 푸른 휘장 앞에 앉아 있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일종의 관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좀 모자란 듯이 보이는 얼굴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조용히 앉아 있다(도판 247)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그 옆에 있는 부인은 아마도 신부의 부모인 것 같다. 그보다 뒤쪽에 앉아서 숟가락으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남자가 아마 신랑일 것이다. 식탁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데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잔치가 막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구석에는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가 있고 바구니 속에는 아직 빈 조끼(jug)들이 많이 남아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두 남자가 들것 같은 것에 열 그릇이 넘는 파이 혹은 죽으로 보이는 것을 나르고 있다. 손님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식탁 위로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배경에는 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고 악사들도 있다. 악사중의 한 사람은 서글프고 허기진 눈빛으로 운반되어 들어오는 음식을 바라다 보고있다. 식탁 한 구석에는 수도사와 촌장이 앉아 그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잔치에서는 어딘가 아웃사이더와 같은 존재이다. 전경에는 접시를 든채 커다란 모자를 덮어쓴 아이가 하나 앉아 있는데 음식을 핥아먹느라고 정신이없다. 꾸밈없는 탐식의 정경이다. 그러나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물들의 움직임은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나갔다.프랑스 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나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장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48).

248 장 구종, <님프>,<순진무구힌 자들의 샘>의 부분, 1547-9, 대리석, 각각 240 X 63cm, 파리 국립 기념품 박물관

이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께 엿볼 수 있다.구종보다 한 세대 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들의 기발한 발상을 피터브뢰헬의 정신으로 동판화에 표현한 로랭 출신의 화가 자크 칼로 1592-1635)가 등장했다.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그는 키가 크고 삐쩍 마른 인물들과 넓고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도판 249)을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칼로가 그의 동판화에서 이러한 광상적(狂想的)인 작품을 그려 인기를 얻고 있을 무렵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로마, 안트웨르펜, 마드리드 작업실에서 쉴 새 없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새로운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249 자크 칼로, <두 이탈리아 광대>, 1622년경, 동판화 연작 <스페사니아의 춤>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