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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 사조 명화/신고전주의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by 2mokpo 2023. 1. 27.

유먕한 화가이기때문에 혹, 이름은 몰라도 작품은 한번쯤 보았을 것 같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의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를 화폭에 옮긴 화가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 화가이자,

고대의 모든 기법, 극적인 표현 효과와 사실주의적 양식을 하나로 결합시켰다고 평가받으면서

후대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 호라티우스의 맹세, 마라의 죽음,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고전적 주제를 다룬 작품과,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대관식등이 꼽힌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8 #유화 522x385cm #루브르미술관 #파리

로마의 건국신화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두 쌍동이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국이 되었다.

로마는 건국 초기 여자가 모자랐다. 인구도 늘지 않았다. 이들은 여자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웃의 사비니 사람들을 초대하여 술을 거나하게 먹여놓고, 이들의 딸과 누이들을 약탈했다. 창졸지간에 여자들을 빼앗긴 사비니는 몇년을 준비하여 자신들의 딸들과 누이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애들을 데리고 와, 이들을 막고 나선 것이 사비니의 여인들... 약탈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었건, 어찌 되었건, 지금의 로마 남자들은 자기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자기 친정 식구들과 전쟁을 하고 서로 죽이는 것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중재로 문제는 봉합이 되고, 이후의 로마는 큰 발전을 하게 된다.

그림은 사비니의 군대가 타티우스의 주도하에 카피톨리노 언덕을 포위하고 로마군과 대치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타티우스와 로물루스가 서로 대치하는 모습이 화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오른편에 선 로물루스의 방패에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우스 형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두 팔을 벌리고 싸움을 말리는 여인은 헤르실리아이다. 다른 사비니 여인들도 아이들을 안은 채 평화 수호를 외치고 있다. 역동적이면서도 불필요한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여 엄격하고 영웅적인 분위기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바라의 죽음, 1794 #유화 157x120cm #칼베미술관

바라는 제1차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군에 참여한 14살짜리 소년으로 북치는 소년으로 혁명전쟁에 참여를 했다가 Vendeen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이야기는 발굴되어 혁명군의 선전전에 최대한 혁명의 순교자로 부각되었다. "마라의 죽음"과 함께 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다비드의 열성적인 선전활동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배경이 전부 그려지지 않아 미완성 작품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마라의 죽음, 마라의 암살, 1793, #유화 128x162cm #벨기에왕립미술관 #브뤼셀

장 폴 마라는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 혁명기 인물이었습니다. 혁명에는 영웅, 과 테러리스트가 있듯

 당시 급진적 혁명가였던 장 폴 마라는 다비드와도 절친한 친구 사이로 자코뱅 당원이었는데  그의 이런 지나친 행동에 분개한 지롱드파 젊은 귀족 여성 샤를로트 코르테가 피부병 때문에 , 자주 목욕통에서 일을 보곤 했었다고 알려진 마라가 욕조에 들어갔을 때 칼로 죽입니다.

마라의 동지로 산악당 사람들과 함께 열렬히 혁명에 참여하고 있던 다비드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그림을 남겼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 머리에는 터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대표적 역사화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5-07 #유화 979x621cm #루브르미술관 #파리

 1804122일 있었던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을 묘사한 그림이다. 대관식에서와 같이 나폴레옹은 스스로 월계관을 쓴 후,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세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교황이 참석했지만, 그는 왕관을 씌워주지 못하고, 대관을 축성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참고로 위 관중석에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유화 196x130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그림이다. 제자들에 둘러싸여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며 독당근즙을 먹고 죽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전한 이야기이다.

레카미에 부인 1800년경 유화 캔버스에 유채(Huile sur toile),크기174 x 244 cm,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그림에서 당시 유행한 고대풍의 흰 옷을 입은 레카미에 부인은 휴식용 긴 의자에 누워 관람객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있다. 그녀가 있는 방은 소파와 발 받침, 고대 폼페이에서 영감을 받은 긴 촛대를 제외하고는 장식 없이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형태도 주목할 만한데 보통 가로로 긴 캔버스는 역사화에 사용되지만, 초상화에 이례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다비드가 그린 이 그림은 특정인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여성적 우아함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가구와 몸의 곡선이 통합되어 인물 주위로는 신체의 우아한 곡선을 강조하는 공간이 형성되었다.

레카미에 부인의 고전적인 포즈, 간결한 옷과 실내는 다비드가 추구한 신고전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 1800년에 다비드는 초상화를 주문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완성되지 못했다. 다비드는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시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레카미에 부인은 다비드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고,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이에 분개한 다비드는 이 그림을 아틀리에에 보관했다. 모델의 머리 부분만 완성되고, 나머지 부분은 흰색 밑바탕이 부분적으로 보일 정도로 미완성 상태다. 하지만 이는 그림에 신비롭고 시적인 면을 부여하고 있으며, 다비드의 기법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 유화 275 x 20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유화 429x330cm,루브르미술관

기원전 7세기 두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 롱가는 전쟁을 하는 대신 세 사람씩의 용사를 뽑아 결투를 통해 승패를 겨루기로 한다. 로마쪽에서는 호라티우스 3형제가, 알바쪽에서는 큐리아티우스 형제가 선수로 나선다. 비극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 카밀리아가 큐라티우스 가문의 아들과 정혼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림 오른쪽에 비탄에 빠진 여자이다. 결투에 결과 호라티우스 형제 하나가 살아남아 승리를 하게 되지만, 자신의 정혼자를 죽인 오빠를 원망하는 여동생을 죽이고 만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행동을 칭찬한다.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교황 비오 7세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화 (178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시
니오베의 아이들을 공격하는 아폴로와 다이애나(1772)
큐피드와 프시케 (1817)
파리스와 헬레네 (1788), 루브르 박물관, 파리
백의를 입은 젊은 여인의 초상(c. 1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