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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서론

by 2mokpo 2023. 1. 16.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동굴 벽에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도깨비나 영험이 있다고 숭배를 받는 그런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미술가에게 그가 방금 완성한 것이 그 나름대로는 대단히 훌륭한 것일지 몰라도그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말해줌으로써 그의 기를 꺽어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가 그 그림 속에서 좋아하는 것이 미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일러주어서 그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그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간직해준 미술가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미술가들 자신도 우리들의 이런 취향을 퇴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플랑드르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그의 어린 아들을 그렸을 때(아래그림 참조) 그는 분명히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들이 그의 아들을 귀엽게 보아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주제에 관해서 이런 편견을 갖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매력이 덜한 주제를 다룬 그림을 거부하게 만든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도 루벤스가 자기의 포동포동한 아들에게 가졌던 것만큼의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그의 어머니(아래그림 참조)를 그렸을 게 틀림없다.

1.루벤스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1620년경 검정과 빨강 분필 소묘 25.2 *20.3 

2.뒤러 <어머니의 초상> 1514년 검정 분필 소묘 42.1 * 30.3 베를린 국립 박물관

고생에 찌들린 늙은 어머니를 진실되게 그린 습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줄 만큼 충격적이다. 그러나 뒤러의 이 그림은 위대한 진실성을 담고 있는 명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느낀 반감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무리요, <부랑아들>, 1670-5년경, 유화, 146 x 108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우리는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18

 

스페인 화가 무리요 Murillo(위 그림)가 즐겨 그렸던 부랑아들이 엄격하게 말해서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가 그 어린아이들을 그린 후에는 그들은 분명히 대단한 매력를 지니게 된다. 그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의 화려한 네덜란드 실내 모습에 나오는 아이의 그림(아래 그림)이 매우 평범하다고 하겠지만 이것 역시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그처럼 다르다는 데 있다.

3.피터 데 호흐, <사과 껍질을 벗기는 여인이 있는 실내>, 1633년, 유화, 70.5 x 54.3 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아래 그림은 둘 다 15세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기타와 비슷한 악기인 류트를 켜고있는 천사의 그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유럽의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의 작품보다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화가인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의 그림을 더 좋아할 것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두 그림을 다 좋아한다. 멤링의 천사가 지니고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그 천사가 어딘가 힘 없고 어색하다는 인상을 떨쳐버린다면 우리는 그 천사가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Melozzo da Forly,[천사]

▲멤링Hans Memling, [천사]

아름다움의 진실은 또한 표현의 진실과 같다. 사실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의 표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을 좋아하게 만들거나 싫어하게 만들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좋아하며 그 때문에 깊이 감동받기도 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는 십자가에 못박힌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아래그림)를 그렸을 때 분명히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에서 수난의 고통과 영광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세주의 표현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곤 했다 이 작품이 표현하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하고 분명했던가 하는 것은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예배당이나 외딴 농가에 이 작품의 복제판을 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강렬한 감정의 표현에 쉽게 마음이 끌린다하더라도 그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표현된 그림에서 등을 돌리거나 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또 다른 예수상(아래그림)을 그린 중세의 한 이탈리아 화가도 레니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진지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작업방식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이처럼 상이한 표현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레니의 작품보다 표현이 덜 분명한 작품들을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말과 몸짓을 적게 사용하면서 많은 것을 상대방이 추측하도록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추측하고 곰곰히 생각할 여지를 주는 그런 회화나 조각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가들이 지금과 같이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표현하는 데 숙련되지 않았던 문예부흥기 이전의 작품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는가를 알고 나서 더 큰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귀도 레니,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1639-40년경, 유화의 부분, 62 x 48cm, 파리 루브르

토스카나의 한 미술가, <그리스도의 얼굴>,

1175-1225년경, 십자가 상의 부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뒤러Albrecht Durer.[산토끼] A Young Hare. 1502.... (도판10)렘브란트 드로잉

 

그러나 여기에서 미술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는 화가의 솜씨를 칭찬하고자 한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실물과 꼭 같이" 닮아 보이도록 그린 그림이다. 물론 이같이 실물처럼 표현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쏟아부은 그들의 끈기와 솜씨는 정말 찬양할 만하다. 과거의 위대한 미술가들은 세밀한 데까지 조심스럽게 기록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뒤러의 산토끼를 그린 수채화 습작(도판 9)은 이처럼 가상스러운 끈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가 그린 코끼리의 소묘(아레 그림)를 세부 묘사가 덜 되었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의 작품을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렘브란트는 목탄으로 그린 몇 개의 선만으로도 코끼리의 주름진 피부의 느낌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런 요술을 부리고 있다.

 

렘브란트, <코끼리>, 1637년, 검정 분필 소묘, 23 x 34cm, 빈 알베르티나

그러나 "실물과 꼭 같이" 보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하는 것은 스케치 풍의 화법만이 아니다. 그들이 더 더욱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생각되는 것들로서, 특히 거기에 대해서 미술가가 "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현대의 작품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사실 현대 미술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흔히 들리는 불평인 자연 형태의 왜곡의 문제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디즈니의 영화나 만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듯이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것이다. 미키 마우스는 실제의 쥐를 닮은 데가 거의 없지만 독자들은 그 꼬리의 길이에 대해서 신문에 격분한 투서를 보내지는 않는다. 디즈니의 매혹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더 이상 고유명사의 "미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이 디즈니 쇼를 보러갈 때에는 현대 미술 전시회에 갈 때와 같은 편견으로 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현대 화가가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그렸다면 그는 간주되기 쉽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미술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 설령 그들이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않은 그들의 이유는 월트 디즈니의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래 그림 11)은 현대 미술 운동의 선구자인 피카소(Pablo Picasso)가 그린 것으로 <박물지(Naturll Hlstory)>에 실린 삽화의 도판이다. 아무도 암탁과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들을 그린 이 매력적인 그림에서 결함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겄이다. 그러나 그가 수탉(아래 그림 12)을그릴 때는 단순히 닭의 모습을 재현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않았다. 그는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풍자화법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 풍자화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우리가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잡으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두 인습적인 형태와 색깔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은 때때로 별이 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별표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림에서 하늘은 푸르러야 하고 풀은 초록색이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린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에서 다른 색채를 보면 화를 낸다. (중략)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은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다. 

 피카소, <암탉과 병아리들>, 1941-2년. 에칭, 36x28 cm, 뷔퐁의 《박물지》삽화

12. 피카소, <수탉>, 1938년. 목탄 소묘, 76x55 cm, 개인 소장

13. 제리코, <엡솜의 경마>, 1821년, 유화, 92 x 122.5cm, 파리 루브르

19세기 유명한 프랑스 화가 태호 도로 제리코 (Theodore Gericault)가 그린 <엡솜의 경마> (위 13)와 같이, 당시의 그림이나 스포츠 해설도는 거의가 달리는 말들이 네 다리를 쭉 뻗고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0년쯤 뒤에 말이 질주하는 순간을 스냅으로 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카메라가 등장하자 화가와 관객들이 모두 그때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달리는 말은 우리들에게 그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런 포즈로 움직이지 않았다.

14.에드워드 머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동작>, 1872년, 연속사진, 킹스턴 어폰템스 미술관

사진은 말이 차례로 다리를 땅에서 떼었다가 다시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위 14). 우리는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말이 이와 다르게는 뛸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발견을 그들의 그림에 적용해서 말들이 실제로 달릴 때의 모습처럼 그리자 사람들은 그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를 뜻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하곤 한다. 우리는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전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감정이 격앙되기 쉽다. 우리는 모두 성경이 예수의 생김새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하느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가시화할 수도 없으며, 그리고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의 상들을 처음으로 그려낸 사람들은 바로 과거의 화가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형태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15.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거부된 작품,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제단화, 223 x 183cm, 소실됨

 

16.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제단화, 296.5 x 195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17.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 1505-6, 목판에 그린 유화, 113 x 88cm, 빈 미술사 박물관

라파엘로 (Raffaello, S.)의 유명한 마돈나 그림 중에서 <초원의 성모> (위 17)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분명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림으로 인물들이 훌륭하게 그려져 있음은 물론이고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성모의 얼굴 표정은 정말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을 위해 그린 라파엘로의 습작 스케치 (아래 18)를 보면 그가 가장 고심했던 점은 그러한 인물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러한 인물 묘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성취하려고 거듭 노력했던 점은 인물들 사이의 올바른 균형, 즉 가장 조화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올바른 관계였다.

18.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를 위한 네 점의 습작, 1505-6,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 종이에 펜과 잉크, 36.2 x 24.5cm, 빈 알베르티나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술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키워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혼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달로그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단지 카탈로그를 체크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미술가에 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렘브란트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 훌륭한 키아로스쿠로로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그림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러한 설익은 지식과 속물 근성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또 이와 같은 책이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관해서 재치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런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