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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 - 4

by 2mokpo 2018. 8. 4.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4) 

신앙이 된 박달·복숭아나무, 과학만으로 알 수 없는 식물 그 이상

ㆍ신앙과 함께한 나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사용했다는 향백나무는 높이 30m, 줄기 지름 2m 이상 자라며 방부·방충 능력도 있다.

우리는 나무를 믿는다. 나무는 크고, 인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생명이 길다.

큰 나무를 향한 경외심에 더해 사람이 태어났을 때도 큰 나무가 죽을 때도 여전히 큰 나무로 우뚝 서 있는 모습에서

고대 사람들은 영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큰 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고대 사회의 거석문화는 거의 없어졌지만 나무에 대한 믿음은 여전하다. 


나무는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게 한다.

늘 푸른 나무는 늘 푸르기에, 낙엽 지는 나무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새눈을 싹틔우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새순은 아무데로나 뻗지 않는다. 기를 쓰고 밝은 곳을 향해 뻗어나간다.

그래서 한 줄기 햇살을 부여잡으려는 가느다란 초록 가지의 치열한 몸짓은 우리 마음 깊숙이 생명력을 일깨운다. 


초록은 원래 햇빛을 지향한다. 동그란 모양을 한 광합성 세균은 밝은 곳을 향해 몸을 틀었다고 한다.

동그란 몸체가 빛을 감지하는 렌즈가 돼 햇빛 쪽으로 몸을 틀고 광합성을 잘할 수 있도록 햇살을 듬뿍 받게 한 것이다.

약 35억년 전에 진화한 남조류는 이렇게 광합성을 하며 대기의 조성을 바꿀 정도로 어마어마한 산소를 발생시킴으로써

더 큰 생물이 진화될 조건을 만들었다.

그 후 진화된 식물도 역시 광합성에 필요한 빛 감지 능력을 갖게 됐는데 나무도 이런 기원을 공유하기 때문에 햇빛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빛 감지 능력이 진화 과정에서 식물에서 동물로 수평적으로 전달됐다.

조류(藻類)의 일종인 와편모조류의 로돕신 유전자가 동물로 전달되고 그 결과 인류도 햇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믿는 신앙은 민속신앙이든 고등 종교든 모두 밝음을 지향한다.

인류와 나무는 빛을 향하는 원형적 기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단군신화는 태백산 신단수, 즉 크게 밝은 산(太白山)에서 자라는 나무로 하늘의 신이 내려오면서 이 세상의 의미를 얻는다.

최남선이 불함문화론에서 주장하듯 우리나라 산 이름에 나오는 ‘백(白)’의 의미는 단순히 희다는 뜻이 아니라 밝다는 뜻이 중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늘의 밝은 이치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늘나라 아들인 환웅이 밝은 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이 하늘의 뜻이 세상을 밝게 만드는 데 있다고 믿었다.


생태학적으로 나무는 우리가 보는 높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무는 줄기의 높이가 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저 멀리 우주에서 오는 햇빛과 저 깊은 대지를 연결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일궈낸다.

태양에너지로 광합성을 해 그 산물인 유기물로 땅속 깊이 뿌리를 뻗을 뿐만 아니라 유기물을 분비해 지하의 온갖 생물이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한다.

또 나무는 건조한 대기에 지하의 물을 뿜어 올려 구름을 만들고 강렬한 햇볕을 누그러뜨려 세상을 부드럽게 한다.


이렇듯 나무가 우주와 대지를 연결시켜주는 존재라는 신화는 그냥 신화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의미를 가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당한 요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신화와 과학을 곧잘 대립시키지만,

사실 신화와 과학은 시간적 규모와 의미 체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화에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잠재돼 있는 생물 진화의 기나긴 과정과 선사시대에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낸 모든 경험이 응결돼 있다.

과학이란 인류가 당면한 과제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주류 집단이 극히 최근에 합의한 방법론이자 인식체계다.

그래서 과학과 신화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신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 인간을 더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과학을 적절히 이용하면 신화는 미신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더 바람직하게 가꾸어 갈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박달나무가 신단수로 된 것에도 생태학적 의미가 있다.

박달나무는 깊은 산에 많이 자라지만 잘 자라는 자리는 어김없이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밝은 곳이다.

그런데 신단수의 박달나무를 현대에 와서 생물학적으로 확정한 박달나무(Betula schmidtii)만 의미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박달이란 배달겨레의 ‘배달’과도 뜻이 통하는 말로, 어원을 따져볼 때 ‘밝은 땅’ ‘밝은 산’을 두루 의미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폭넓게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우철의 <한국 식물명의 유래>에 따르면, 강원도 방언으로는 당단풍나무를 박달나무라고 하고,

경기도 광릉 지방의 방언으로는 산딸나무를 박달나무라고 한다.

그리고 문경새재 아리랑의 가사를 풀이할 때 물박달나무(Betula davurica)와 박달나무가 혼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우철에 의하면 쪽동백나무(Styrax obassia)를 물박달나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겨레의 말 쓰임새가 이렇게 다양하니 현대의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이름을 고집하기보다는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신단수를 달리할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

함경도나 더 북쪽에서는 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나 만주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도 충분히 신단수가 될 만하다.

시베리아와 만주지방의 샤먼 나무는 자작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생물과학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단순히 인문지리적 식견을 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하고 결합할 때 바람직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역사적 사료 가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가의 일연이나 개혁적 삶을 산 신진관료였던 이승휴가 일부러 이런 신비한 이야기를 기록한 심정에 대해서도 평가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몽골의 침략으로 온 백성이 유린당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된 후에 적국의 속국이 된 나라에서

무슨 마음으로 이런 글을 남기고자 했던가를 생각하면

“황당한 이야기라 사료 가치가 없다” 또는 “아니 그러기에 더 중요하다”라는 논쟁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지식인으로서 백성과 함께 살아내야 했던 의미를 우리가 되살리지 못하면 학문의 빛은 흐려지고 말 것이다. 


원래 우리 민족은 밝은 세상을 지향했다. 민속뿐 아니라 정사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나무에만 국한하더라도 <삼국사기>를 보면, 복숭아나무가 때를 모르고 10월이나 8월에 꽃을 피웠다는 기록이

신라 본기에만 6번 나온다. 음력 8월은 가을이고 10월은 겨울이니 꽃이 피는 것은 이상 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벚꽃 개화를 예측하며 계절의 변화를 고상하게 감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삼국시대에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의 개화를 보았다.

그럼 왜 복숭아나무였을까? 복숭아나무는 전통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불로장생하는 나무로 숭상됐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을 보면,

복숭아나무는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이른 시기에 봄 기운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양기 충만한 나무여서

귀신과 같은 음기를 쫓아내는 힘이 강하다고 여겼다.

특히 해가 뜨는 동쪽은 만물이 소생하는 근원이면서 양기와 생명력이 충만하므로 동쪽으로 뻗은 가지의 귀신 쫓는 힘이 가장 크다고 믿었다.


또 복숭아는 하늘의 과일로 불로장생의 힘을 준다고 믿어왔는데,

현대 한의학에서는 복숭아 씨에 있는 여러 물질이 항염증 작용, 진해 및 진통 작용, 항알레르기 작용을 하고,

가지는 갑작스러운 복통을 완화시킨다고 한다(안덕균의 <한국본초도감>).

오랜 경험에 따른 믿음이 현대 과학으로는 물질로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효과 때문에 민간에서는 복숭아나무의 효능이 전국 각지에 전승되고 있다.

특히 경기도에서는 나무껍질을 구워 이로 물고 있으면 치통에 좋다고 한다(국립수목원의 <한국의 민속식물>). 


이제는 이런 민속 경험이 전통지식이란 이름으로 생물다양성협약 등 각종 국제협약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2010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나고야 의정서가 채택된 이후

‘생물자원에 대한 접근과 이익 공유’를 뜻하는

ABS(access and benefit sharing)가 영어로 그대로 통용될 정도로 산업계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세계 각지의 토착민들이 믿던 신앙이 경험으로 구체화되면서 여러 식물을 이용해 치유하는 전통이 형성됐고,

이런 전통이 생물다양성 보전에도 도움이 되며,

전통지식의 가치를 정당하게 지불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인식에 세계 각국이 합의한 것이다.


고등 종교로 들어가도 신앙과 함께한 나무의 이야기에서는 토착 신앙에서 보는 원형적 기능이 그대로 유지된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마이켈 조하리는 <성서의 식물>(김준민 번역)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성서 식물을 과일나무, 농작물과 정원식물, 야생초류, 삼림의 수목과 관목, 강변과 늪의 식물, 광야의 식물,

가시나무와 엉겅퀴, 들에 피는 꽃, 약과 양념, 향료와 향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창복은 <성서 식물>에서 “성서에 나타나는 식물종은 110~125종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종수는 140종이다.

이 140종은 이미 밝혀진 종수를 수록함과 동시에 일부 후보에 올라 있는 종까지 포함시킨 것”이라면서

정확한 이름을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후보 종을 수록하고 있다. 중요한 정보를 잃지 않고 미래에 전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에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사용된 향백나무(Cedrus libani)를 소개한다. 


향백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심고 있는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와 같은 속의 나무로 높이 30m, 줄기 지름 2m 이상 자라며

수령이 2000~3000년에 이르는 상록교목이다.

 나무 향기가 좋고 방부·방충 능력이 있어 이미 3000년 전 니네베 궁전을 지을 때도 사용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Ficus religiosa)가 유명하다.

이 나무 역시 높이 30m, 줄기 지름 3m까지 자라는 거대한 나무다.

민간에서 광범위한 증상을 치유하는 약재로 쓰이고 있어 신앙의 대상으로는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너무 추워 보리수나무가 자랄 수 없기에 대용으로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를 심고 있다.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도의 보리수나무가 자랄 수 없어 잎이 비슷한 피나무 종류를 보리수나무 대용으로 심었던 것을

우리나라 사찰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도 보리수나무는 뽕나무과의 무화과나무속에 포함되고 피나무는 피나무과의 피나무속에 속하기 때문에 무척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보리자나무도 구하기 어렵기에

그와 비슷한 염주나무(Tilia megaphylla)나 찰피나무(Tilia mandshurica)를 대용으로 심는 경우가 많다.

사찰에서는 보리자나무도 보리수나무로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우리나라에 다른 과의 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가 따로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보리자나무라 한 것이다.

신앙이 전파되는 길과 과학이 가는 길은 이렇게 어지럽게 갈라져 있다. 

나무를 보는 우리의 인식은 그저 나무에 머물지 않고, 하늘로 뻗고 대지로 심화된다.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밝은 세상을 지향하고 일궈내는 나무를 보면서 생각한다.

밝은 마음을 지향하던 민족의 후손인 우리는 어지러운 오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퍼온 곳: http://news.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