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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자연, 환경, 숲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2) 집 뜰의 화초·수목,

by 2mokpo 2017. 12. 20.


[신준환의 꿈꾸는 나무](2)집 뜰의 화초·수목, 조선 유학자에겐 식물 그 이상이었다신준환 | 동양대학교 초빙교수

[추사 김정희] 세한도 外 그림 몇점
추사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 생활 중에 그린 세한도(국보 180호)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몇 그루가 추위 속에 떨고 있는 그림은 유배지에서 제자에게 선물을 받은 추사가 자신의 처지와 ‘의리’라는 삶의 이치를

자연 속에 절절이 그려낸 문인화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이웃인 중국이나 일본과 다르게 집 주변의 산천과 연결해 자연미를 추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중국에서는 벽을 높이 둘러 주변을 가림으로써 사람들이 정원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보았으며,

일본에서는 철저한 인위적 조성과 관리로 인공미의 극치를 추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지을 자리를 찾을 때 거시적으로 백두대간과 정맥들이 조화롭게 짜여 있는 바탕을 가늠한 후,

미시적으로 뒷산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좌우로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싸주며 앞에서 나지막한 산이 유정하게 맞아주는 곳을 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 어디를 끊고 어디를 가릴 것인가?


우리 선조들은 멀리서 이상향을 구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의 체계를 읽어내고 그 짜임새를 이용해 마을을 이상향으로 꾸미고 자손만대 영화를 누리기를 꿈꾸었다.

선조들에게 정원은 크게는 집 주변의 산천이지만, 작게는 집 한편에 꾸민 화원이기도 하였다.

 자연을 배우려고 노력한 선조들은 주변에 흔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가치를 알아내어 칭송하며 동산을 꾸미기도 하였고

아름다운 꽃과 마음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호에서도 나타나듯이 수양의 정도에 따라 각각 독특한 산수경관을 즐겼던 퇴계(退溪) 이황은 매화도 사랑하여 인격을 가진 듯이 대우했고

죽을 때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고 챙겼다. 한 시대를 경영하는 철학을 놓고 우암 송시열과 대립한 미수 허목은

노년에 고향인 경기도 연천 석록(石鹿)에 십청원(十靑園)이라는 정원을 경영하면서 소나무·측백나무·전나무·잣나무·대나무 등

평소 좋아하는 나무를 괴석과 함께 가꾸었다. 물론 이름에 보이듯이 사슴이 돌과 어울리는 산천에 늘 푸른 식물 10가지를 심어놓고

마음도 늘 푸르기를 꿈꾸었지만 그 전에는 꽃을 심고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고 하였다.


우리 선비들의 꽃 가꾸기는 조선 초기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의 전통을 대부분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나 연꽃·동백뿐 아니라 서향·석류나무·치자나무·배롱나무·일본철쭉 등 외래종도 실려 있다. 
조선 숙종 시대에 활동한 이만부도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꽃과 나무를 사랑하여 고향인 경북 상주 노곡(魯谷)으로 돌아가 집에 심었던

식물에 대한 기록을 <노곡초목지>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여기에는 소나무·만년송·대나무·매화·오동·뽕나무·수유·앵두·복숭아나무·살구나무·배나무·감나무·밤나무·대추나무·모과나무·호두나무·석류나무·연꽃·국화·

구기자·모란·치자·장미·배롱나무·버드나무·동백·파초·닥나무 등 28종의 초목에 대해 품종과 특성, 재배법 등을 중심으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종묵 역해, <양화소록>). 이를 보면 기개와 지조를 함양해주는 상록수뿐 아니라 꽃나무, 열매를 먹는 유실수, 목재나 나무껍질을 쓰는 특용수, 약용식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선조들의 정원에 대한 생각은 매우 복합적이며 체계적이다. 우선 보는 규모가 주변 산천 경계를 포함하는 거시적인 차원으로 펼쳐지다

집 한편의 화단, 그리고 한 포기 화초로 수렴되면서 섬세하게 응시하며 지속된다. 그리고 정신수양은 물론 의식주 해결과 병의 치유까지 기대하는 것이다.

선비가 벼슬을 할 때에는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고, 물러나면 고향에 돌아가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족적인 삶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 선조들은 벼슬을 하지 않을 때 기거하는 곳을 산림(山林), 임원(林園)이라고 즐겨 불렀다. 이런 전통을 총망라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시골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크게 16개 분야로 나누어 113권 54책으로 집대성해 놓았다. 이 결집체를 보면 우선 그 당시 수집한 지식의 방대함에 놀라게 되고,

곧이어 사대부는 삶이 곧아야 하고 생활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시골에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다양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자세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선조들도 물론 꽃을 좋아하였다. 살림집이나 사찰, 궁궐 뜰에 층계 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꽃을 심어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조 임금은 평소 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석류는 사랑하여 궁궐의 뜰에 심었을 뿐 아니라 오륙백 개의 화분을 팔진법을 써서 배치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도 한양에서 벼슬을 할 때 살 자리가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길가에도 화분을 배치해 어떻게 하면 행인들이 꽃을 다치지 않게 할까를

궁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화초를 가꾸는 것에는 실용적인 뜻도 있었다. 1960년대 시골 풍경을 돌이켜 보면, 이웃집에서 양귀비를 키웠다.

꽃도 예뻤지만 비상시 응급처방 약재였다. 아이들이 갑자기 설사를 하고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면 양귀비를 이용해 아이들의 복통을 진정시켰다.

그 집의 아이뿐 아니라 그 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혜택을 누렸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때 몇 집에서 심었던 목련·산수유·석류·작약·접시꽃 모두 유사시에 약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안방마님의 방문 앞 작은 화단에 심어 두었던 석류는 단맛이 나면 식용으로, 신맛이 강하면 약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치자나무의 용도는 더 다양하다. 선조들은 꽃이 하얗고 윤택이 나 아름답고, 꽃향기가 맑고 부드러우며,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로 노란색을 물들일 수 있는 등 치자나무의 4가지 장점을 기렸다.

더구나 열매는 가슴, 위, 장에 열이 나거나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

어릴 때 어머님들이 치자 열매로 물들인 노란색의 전을 부쳐주신 것은 아름답게 먹으라는 뜻도 있지만 우리의 속을 편안하게 해주시려는 뜻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님들은 치자나무의 실용적인 효능뿐 아니라 맑은 정신의 고양에도 이용하였다.

치자나무 하나만 보아도 우리를 건강하고 맑은 선비로 키우려는 부모님의 마음을 느낀다. 

유명한 별서정원인 소쇄원의 치자나무가 “눈서리에도 맑고 곱다”고 노래한 김인후는 국화가 사람을 오래 살게 해준다며,

세상사를 개탄하여 술을 마시는 남편을 위해 국화를 따와 술에 띄워주는 아내를 기리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국화는 봄에는 나물로 먹고

가을에는 약으로 썼는데, 이때 국화는 주로 감국을 말한다.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감국에 대해 정월에는 뿌리를, 3월에는 잎을, 5월에는 줄기를,

9월에는 꽃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화초도 계절마다 다양하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인 서거정은 여러 병을 앓으면서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여러 생에 걸쳐 국화를 좋아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동쪽 울 밑에 가득한 국화를 노래하였다.

이는 은일(隱逸)을 꿈꾸던 조선 선비들의 최고 모델인 도연명의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에서 유래하였겠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는 “울 밑에 선 봉선화야”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봉선화가 아가씨들의 손톱을 물들이는 용도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산림경제>를 보면 “여름에 꽃 피었다 열매를 맺는데,

씨는 기름을 짜서 음식에 치면 맛이 참기름보다 좋다”고 하였다. 이렇듯 우리 정원을 가꾸는 식물은 관상용인 것 같지만 늘 실용이나 정신수양,

그리고 치유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을 달래주는 식물도 있다.

<동의보감>은 원추리에 대해 “마음을 좋게 하여 기쁘고 즐겁게 하고 걱정을 없애준다. 정원에 심어놓고 항상 보는 것이 좋다”,

자귀나무에 대해 “분노를 풀어주어 아주 즐겁게 하고 걱정을 없애준다. 정원에 심어두면 화를 내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산수유도 약용뿐 아니라 “붉은 열매도 보고 즐길 만하다”고 <산림경제>에 소개되어 있다.


최근 미국에서 연구된 소리경관(sound scape)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지만 선조들은 이미 이런 요소를 즐기고 있었다.

선비들이 벽오동을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는 것이기보다는 빗소리를 감상하려는 것이었다.


벽오동의 잎이 넓어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즐기는 데 좋은 짝을 만난 듯 흥이 났을 것이다.

파초도 잎이 넓어 종이가 귀한 시절에 붓글씨를 연습하는 좋은 재료였지만 빗소리를 즐기기에도 그만이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솔가지의 음색이나 뒤편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의 청량함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의 아파트에서는 빗소리를 감상하기 힘들고 특히 정원을 갖기는 어렵다고들 느낀다. 베란다를 없애지 않으면 작은 정원도 만들 수 있고

화분을 놓고 즐길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좁은 공간에서 화초를 즐기는 슬기가 뛰어났다.

필자는 비가 올 때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고 잎이 큰 식물을 창틀에 내놓아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긴다. 꼭 창밖에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창틀에만 두어도 들이치는 빗방울의 소리가 은은하다.

어떨 때는 바깥의 세찬 빗소리와 창틀에 둔 식물의 잎에 떨어지는 둔중한 소리가 어울려 화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보듯이 조선 선비에게 정원수는 정신수양의 매개이기도 하였다. 선조들은 좋은 꽃이나 나무를 소유하는 데 정신이 팔려

원대한 뜻을 잃어버리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멀리하고 자연을 관찰하여 삶의 이치를 알아내는 ‘관물찰리(觀物察理)’의 정신을 추구하였다.

자연을 배우며 마음의 근원을 울리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은 정원을 가꾸며 스스로 절제하는 법을 배우고 마음을 닦으며 덕을 기르려 하였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와 자기로 존재하는 한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서 수양이 깊어지면 그렇게도 갈구하던 자신의 시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우화등선(羽化登仙)도 따로 필요 없으리라.

그래서인지 선조들은 소나무의 자태에서 천년 학이나 거북을 살려내고, 용을 날아오르게도 하였다. 자연스러움을 사랑한 백운거사 이규보는

재배환경이 그렇게 열악했던 고려시대에도 움집을 만들어 꽃을 키우는 것을 싫어하였고,

조선의 왕이었던 성종과 명종도 겨울에 움집에서 핀 꽃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다(이종묵 역해, <양화소록>).


이런 정신적 바탕으로 아름다운 산수경관에서 심성을 기르며

“산 절로 물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를 노래하던 선조들은 격무에 시달린 몸을 여기서 치유하였다.

서거정은 병가를 내고 집에서 “발을 걷고 푸른 산을 마주하며” 요양하였고,

조선 사림의 조종으로 추앙받은 김종직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 속에서 움을 틔우려는 원추리를 보고 힘을 얻었다.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상촌 신흠은 병으로 사직한 후 “안석에 기대면 바로 산을 마주보고 창문을 열면 성곽을 비스듬히 둘렀네,

동산 안의 나무 예닐곱 그루는 장막과도 같이 푸르게 우거졌네”(강민구, <병중사색>)라고 노래하며 몸을 다스렸다. 


상처를 입지 않고는 새살이 돋아나지 않듯이 고통을 겪지 않고는 세계의 깊이를 울려내는 사상이 싹트기 어렵다.

신흠은 문 닫고 누운 열흘 사이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고 놀라워할 정도로 병에 시달리면서도 공부와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아

오래 마음을 울리는 명시를 지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오래된 정원수의 노래와 향기가 있으며 생기도 살아나는

이 시는 지어진 지 400여년이 지난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을 때 사업에 실패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을 지니고 있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노래를 품고 있고(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매화는 일생을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질이 그대로이고(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버들가지는 백 번을 잘라내도 새 가지가 다시 난다(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102049005&code=610103#csidx30782aaf70289478ed76ad862db8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