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최근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바가 있어 옮김니다. (158쪽)
법정 : 용서라는 말에는 어딘지 수직적인 냄새가 나요. 비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중생끼리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어요.
용서라기보다는 서로가 감싸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용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최인호 :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기도'라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가 있는데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용서의 개념이다.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다니, 어떻게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기본인 '주님의기도'에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진 않는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성철스님 말씀대로 인간이 인간을 용서 못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 이런 말을 했지요.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 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하나이다"
"하느님, 저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니 제가 저들을 용서 합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왜 하느님께 용서를 미뤄 버렸는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일곱 번 씩 일흔 번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내가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저 사람이 하느님으로 부터는 용서 받은 존재 이다'
라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용서라고 봅니다. ……
이렇게 하느님의 용서를 발견 하는게 우리의 용서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나 같은 사람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는 존재로구나'라고
깨닫는 일이 전재가 되어야 합니다.…..
뉘우침이 전재가 되었을 때
' 나같은 사람도 용서 받았고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저 사람도 용서받은 존재이니
서로 미워해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이때 우리에게 용서의 기쁨이 다가올 수 있지요.이건 가능한 얘기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런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음을 우리가 발견케 하시고'
이게 오히려 우리가 올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끊임없는 죄의식을 안겨 줄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