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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말 아래 감춰진 마음이 더 무섭다

by 2mokpo 2015. 12. 2.

[아침 햇발] 말 아래 감춰진 마음이 더 무섭다 / 정남구
19일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야구 대표팀이 일본팀과 벌인 ‘프리미어 12’ 준결승전에서

3점을 뒤지다 9회에 4점을 뽑아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은 7회까지 아주 잘 던지던 오타니 쇼헤이 투수를 일본팀 감독이 교체한 것을 놓고 질문을 쏟아냈다.

김 감독에게도 한 외국 기자가 ‘당신이 만약 일본의 감독이었다면 교체했겠는가’라고 물었다.

김 감독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이렇게 대답했다. “투수 교체는 그 팀 감독만이 아는 것이다.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다.” 패한 팀 감독을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한마디였다.


말 한마디는 천냥 빚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한다.

2008년 11월12일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폴라 압둘의 집 근처에 주차된 차 안에서 폴라 굿스피드라는 서른 살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유명가수 압둘의 열렬한 팬이던 굿스피드는 2년 전 압둘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5’의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압둘에게 매우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것이 큰 상처가 되어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 이날 압둘의 집 근처로 찾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은 영화 <일대종사>에서 주인공 예원(엽문)의 입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다.

“아내는 말수가 적다. 말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잘 못하는 배우를 캐스팅한 까닭에 배역의 특징을 그렇게 정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은 상처를 남긴다’는 메시지의 울림은 깊었다.


말로 먹고사는, 그래서 줄기차게 말해야 하는 정치인의 말은 특히 무겁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세 사람의 말이 내게는 아주 무서웠다.

한때 대통령의 입으로 일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취지를 거론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민중총궐기대회 과잉진압 논란에 대해 “미국에서는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벗어나면 경찰이 그대로 패버리지 않느냐”며

“최근 미 경찰이 총을 쏴서 시민이 죽은 일 10건 중 8~9건은 정당한 것으로 나온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면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에스(IS·이슬람국가)도 그렇게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얼굴을 감추고서”라고 말했다.

말이 나온 순서대로 나열한 것인데, 섬뜩함의 정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말재주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채근담>에 이르기를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라고 했다.

말은 마음속에 들어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세 사람의 말은 국민의 일부를 ‘비국민’으로, ‘적’으로 보고 있다.

배제와 제거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위협의 말을 들으면 사람은 위축된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노린 것 같지 않다.


시절이 참 수상하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재벌 체제의 기업 경쟁력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경제에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나눠줄 수 있는 당근은 갈수록 모자란다. 그 빈자리를 채찍으로 대체하려는 기획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미 상당수 언론이 권력의 실질적 통제 아래 들어갔다. 반대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안 되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을 벌일지 상상해보라. 어제 내린 첫눈이 결코 서설 같지가 않다. 이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