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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야기/정원의 꽃과 나무 이야기

얼레지

by 2mokpo 2010. 3. 23.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듯 한 꽃 봉오리가 피기 시작하면 신이 내린 어여쁜 애기 무당처럼

귀기(鬼氣)스럽게 보여서 무서운 느낌 마져 드는 꽃.

 

혹자는 ’야생화의 여왕’이라고도 부른다는 이 얼레지를 보면 나는 어째서 [무당] 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꽃잎이 완전히 뒤집기 하면 꽃잎 안쪽 깊숙이 W자 모양의 암자색 무늬가 선명하게 보인다.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있던 산골 아가씨의 파격적인 개방이다.

게다가 화사하고 고운 꽃과 달리 어두운 자줏빛 무늬가 피부병인 어루러기 같이 흩어져

’얼레지’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커다란 잎까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습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은 뭇 꽃들과는 견주기 어려울 만큼의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요.

 

얼레지는 ’가재무릇’이라고도 하고 ’車前葉山慈姑’라는 다소 어려운 한자이름도 가지고 있지만,

잎으로 국을 끓이면 미역국 맛이 나서 ’미역취"라 불리기도 한단다.

 

학명이 Erythronium japonicum Decne인데요 학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식물은 일본에서도 많이 자란다.

일본에서는 전쟁 패망이후 얼레지 인경(뿌리)을 캐어다 국수를 해먹었다고 하는데

 어려운 시절 중요한 구황식물이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단다.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얼레지는 춘궁기 시절 좋은 먹거리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독성이 있어 생으로 먹으면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는데요,

특히 흰얼레지는 독성이 아주 강해 먹으면 안된답니다.

 

그러고 보면 얼레지는 아름다운 꽃 그 화려함 속에

그 옛날 보릿고개를 넘지 못 해 굶주림에 헐떡이던 서민들의 애환을

끌어 안고 제 몸을 보시했던 갸륵한 풀인 셈이지요.

 

또한 얼레지는 진해, 거담, 진통, 이뇨에 효과가 있고, 두통 및 현기증 치료제로

한방과 민간에서 사용해 왔는데 최근에는 관상용으로도 각광 받기 시작한 데다

얼레지를 비롯한 산나물들이 항암제로도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어, 건강식품으로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얼레지의 영명으로는 Dog tooth violet이라 부릅니다.

영명이 재미있는데요 우리말로

구태여 풀이한다면 송곳니제비꽃'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것 같은데요 도대체

어떤 모습에서 송곳니나 개이빨을 연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야생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얼레지의 군락을 볼 수 있는데 얼레지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린 시간은 줄잡아 5~6년이나 됩니다.

땅 속에 자리잡은 얼레지 씨앗은 첫해에 떡잎 하나 내고,

그리고 해마다 조금씩 잎을 키워 큰 잎을 내밀다가 5년이 되는 해에야 두 장의 잎을 내고

6년째 다시 두 장의 잎을 내민 얼레지는 드디어 꽃대를 올리고 분홍빛 고운 꽃을

피워낸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가여워서라도 군락지를 보호해야 되겟지요.

얼레지의 인경은 해마다 깊어지므로, 절대 옮겨 심어 살릴 수 없으니

아예 시도도 하지 말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었구요...

 

<靑林 한현수/시인> 의 얼레지 시를 퍼 왓습니다.

얼레지

처음엔 코딱지만한 떡잎 한 장 내밀더니

꽃 한 송이 올려 놓는 데 육 년 걸렸습니다

꿀벌이 잉잉 다가오자 두근두근 가슴 졸입니다

과연 저 꿀벌은 얼레지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

 

얼레지는 왜 꽃잎을 뒤로 말리며 꽃을 피울까요

꿀벌과 얼레지의 만남을 엿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얼레지는 꿀 단지를 몸 깊이 숨겨 두고

매혹적인 꽃술, 야릇한 향내, 분홍빛 실루엣의 신방을 꾸밉니다

그러나 꿀을 도둑 맞는 걱정이 앞섰을까요

꽃잎을 맞닿도록 당겨서 허술한 꿀샘 뒷문을 가려 놓았는걸요

 

그러나 얼레지의 몸을 기웃거리던 저 꿀벌,

살그머니 꽃잎 빗장을 제치고 꿀을 따먹습니다

얼래? 얼레지 품에 안긴 것은 허공 한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