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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내 생각은--

대경도

by 2mokpo 2009. 8. 13.

 

                                                                                     반대하신 분들의 펼침막 입니다.

                                                                        경도를 오가는 배에 찬 반의 펼침막

                                                             골프장이 들어서면 이런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길이 어떻게 변할까?

                                                                   이 바닷가가 어떻게 변할까? 걱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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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대경도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8월9일 대경도를 다녀 왓습니다.

골프장이 들어서면 이 안내도의 글귀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겟습니다.

섬 전체의 생김새가 고래와 비슷하다고 해서 고래<경>과 섬<도>를 사용했다는데 골프장이 들어서면 이렇게 바뀔까요?

섬이 골프장으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고 해서 입 구<구도> 혹은 오른다고해서 <오도> 혹은 내린다고 해서 <하도>라 할까요--

세월이 지나 서울에서 귀양을 와서 살앗기 때문에 경도라 바뀌어 사용 한다는데 그후 세월이 지나 골프장이 들어서 이제는 <골도>로 바뀔런지 <프도>혹은 <장도>

로 바뀔런지---

난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대경도의 민속

 

독특한 당제와 아쉬운 당산나무

 

경도 내에 있는 외동 마을(바깥몰) 사람들은 서쪽의 기운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보완(裨補)하기 위해 흙을 쌓아 산(造山)을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나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당산나무인데, 약 500년 전 자손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가 살면서

소나무 두 구루를 심고 매일같이 자식처럼 키운 것이라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두 소나무에게 “마을을 지키는 이정표가 되라.”고 당부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위쪽 소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로, 아래쪽은 할머니 나무라 고 믿으며,

당산나무로 지정하여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그 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당산제와 풍어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주관하는 당주는 마을 총회에서 나이든 사람 가운데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만약 당주가 부정한 짓을 했을 때,

그 해는 흉어와 흉년이 들며, 질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당주로 정해지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3일 간 화장실에 갈 수 없고 화장(化粧)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3일 동안은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당주는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룻날에 당제에 필요한 음식을 구입할 때,

값을 깍지 않아 부정타는 것을 막았고, 당주집에 차릴 음식과 당산에 차릴 음식을 따로 장만한다.

당주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나면 당주는 다시 목욕재계하고 당산 음식을 준비하여 당산제를 지낸다.

이 때 마을 사람들과 당주가 서로 만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정에 제를 올렸으며, 마을 사람들도 그믐날 저녁은 각별히 주의했다.

정월 초하루 날이 되면 각자 집에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풍물패를 앞세워 당산에서

다시 제를 지낸 다음 헌식을 한다.

대부분의 마을 당제에서는 제가 끝나면 음식물을 황토흙에다 묻는데,

경도에서는 제물을 새끼줄에 매어 당산 나무에 묶어 두는 것이 특징적이다.

헌식이 끝나면 풍물패와 함께 당주집으로 가서 마지막 제를 올림으로써 모든 의식을 마친다.

당주는 일년동안 상가집을 비롯한 궂은 장소에 가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하지 않으며,

마을 사람들도 당주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당의 당산나무는 완전히 말라버렸고, 할아버지당의 소나무는 가지 하나만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의 실수가 새로운 일가(一家)를 이루어

안몰(내동) 마을 성터(城址 : 일명 呂亭, 堂山城)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던 고려 말, 이곳 안몰 마을 앞 성산에 어여쁜 여인이 수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와서 외롭게 살았다. 시종들은 무리를 나누어 한 무리는 성산 뒤쪽 평지에 커다란 대궐을 짓고, 또 다른 무리는 바닷가와 산에서 커다란 돌을 주어다 높은 성을 쌓아 올렸다.

바람결에 들려 온 소문에 따르면 이 섬에 정착한 미모의 여인은 왕비(후궁)였고, 그 밖의 시종들은 조정의 신하라 하였다. 그들이 이곳으로 쫒겨 온 사연은 어느 날 왕비가 지엄한 어전에서 실수로 방귀를 뀌는 무례를 범하는 바람에 왕의 미움을 사 유배된 것이라 했다.

이후부터 왕비는 성 안에 4,500여 평의 땅을 갈아 춘하추동 갖가지 씨를 뿌리고 거두어 차차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왕비의 억울함과 슬픔은 뼈를 아프게 하는 찬서리로 굳어만 갔다.

고독과 회한으로 가슴을 걷잡지 못한 왕비는 조정에 나아가 관용의 은혜를 간곡히 진언했으나 매번 허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안고 되돌아 온 왕비는 유배 당시 뱃속에 담고 왔던 태아를 분만했으며, 옥동자였다.

갓 태어난 왕자를 본 후궁은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가운데도 왕자의 성을 자신의 성인 법중 여(呂) 자로 썼다고 한다. 여왕자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나 이웃 규수와 혼인하여 자손을 보게 됨으로써 이곳 여씨(呂氏)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후세 사람들이 후궁의 억울한 사연을 안타깝게 여겨 성터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시대 비석도 없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