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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한국화가)

강희안(고사관수도)

by 2mokpo 2009. 6. 25.

본관 진주(晋州), 자 경우(景遇), 호 인재(仁齋). 희맹(希孟)의 형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돈령부주부로 벼슬을 시작..

선비화가 이며 1444년에는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과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를 주석하였다. 한편 조정의 추천을 받아 명(明)나라가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글자를 직접 옥새에 새기기도 하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어 최항 ·성삼문 ·이개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어 수양대군 ·양성지 ·정척(鄭陟) 등과 조선 8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나, 1456년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 1462년 인순부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여 말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일찍부터 검상(檢詳)에 추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 ·최경 등과 더불어 3절(三絶)이라 불렸다. 문집에 원예에 관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전하는데, 산수화 ·인물화 등 모든 부문에 뛰어났다.

 

  高士觀水圖 (물을 바라보는 선비)

화면의 오른쪽에는 덩굴풀이 흘러내리는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에는 바위 위에 선비가 턱을 괴고 엎드려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세상살이를 조금 알 것 같다는 뜻인지,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전체적으로 넉넉한 여유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그림이다.

위쪽에 길게 드리워진 덩굴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는 중국 명나라 때의 절파 화풍처럼 거칠어 보이지만, 자유분방하고 경쾌하다.

 

화면의 왼쪽 중앙에 인재(仁齋)라는 강희안의 호 도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나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강희안이 활동하던 조선 초기에는 안견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중국 북송대의 이곽파(李郭派) 화풍의 그림을 즐겨 그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와는 달리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 화풍의 구도를 여실히 보여주며, 엎드린 인물의 모습이 1679년에 만들어진 중국 화보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의 인물 모습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강희안은 중국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개자원화전》의 모본이 되었던 중국의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어서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나 진위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분방한 붓질과 구도 등 뛰어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15세기 중엽 북송(北宋) 회화의 영향을 받은 안견(安堅) 일파를 중심으로 웅장한 산수를 묘사하고 그와 대조적으로 인물을 미세하게 나타내는 것이 그 당시 화단 추세였다.

이러한 화단 추세와 관련시켜 볼 때 인재의 《고사관수도》에 나타난 화풍은 매우 새롭고 첨단적이다.

필치(筆致)가 활달하고 세련되어 사대부의 기품이 나타난다.

이러한 인물과 덩굴풀로 드리워진 가파른 절벽의 모습을 담은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의 구도(構圖)는 16세기 화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개자원화보 :

중국 청(淸)나라 초엽 중국 청(淸:1679년)의 화가 왕개(王槪)·왕시(王蓍)·왕얼 3형제가 편찬한 화보(畵譜).

  화보엔  <고씨화보><당시화보><십죽제화보><개자원화보>등 이 있으며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보는 화보 이다.

화보 : 혼자 그림공부할 때 보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