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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4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프랑스`1

by 2mokpo 2023. 5. 30.

24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프랑스

 

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의 이 시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이 시기는 화가나 조각가가 된다는것이 보통의 직업과는 다른 일종의 천직(天職)으로서 별도로 취급되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또한 이 시기는 종교 개혁으로 교회 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토록 자주 쓰이던 그림과 조각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되었고 이에 따라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여전히 길드와 협회를 조직하였고,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성과 시골의 별장을 장식하거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진열실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기 위해 미술가들을 필요로 하였던 돈많은 귀족들의 주문에 의존하고있었다. 다시 말하면, 1492년 이후에도 미술은 유한 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유행이 바뀌고 미술가들이 다른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어, 어떤 사람은 인물의 조화로운 배치에 관심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색채의 조화나 극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체로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똑같았으며 누구도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수천년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백년 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수많은 가설들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밝아오는 근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 번째 변화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고 있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 호레이스 월폴은 자신의 시골별장을 다른 사람들처럼 정통 팔라디오 양식으로 짓지 않고 고딕양식으로 짓기로 결정하였다.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는 중국의 건축과 정원양식을 연구하여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에 중국식 탑을 세웠다. 물론 대다수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르네상스건축을 고전 양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들조차도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해온 건축상의 관례와 전통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

도판 311 월풀의 고딕식 별잔이 세원진 1770년경 당시에는 이 건물이 골동취미를 과시하려는 한 사람의 기벽으로 간주 되었으나 그 이후 나타난 사실들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그 이상의 것 이었다.

도판311 호레이스 월풀, 리처드 벤틀리와 존 츄트,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1750-75년경, 신고딕양식 별장

그들은 15세기 이래 고전 건축의 규칙들로 통용되어오던 것들이 놀랍게도 다소 퇴폐적인 시기의 로마 유적의 일부에서 취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는 영국의 많은 온천들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는데 ‘그리스 복고’의 형태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온천마을이었다.

도판 312는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Cheltenham) 온천의 한 집이다. 도판 313은 파르테논신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도리아 식을 부활시킨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것은 유명한 건축가 존 손(John Soane : 1752-1837) 경이 그린

별장의 구상도이다. 이것을 약 80년 전 윌리엄 켄트가 지은 팔라디오 식 별장과 비교해보면 얼핏 보기에는 둘이 비슷한 것 같지만, 좀더 자세히보면 전혀 딴판임이 드러난다. 켄트는 그가 전통에서 발견한 형식들을 자유로이사용하여 그 건물을 구성하였다. 이와 비교할 때 손 경의 구상도는 그리스 양식을이루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사용한 습작처럼 보인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세계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도판312 존 패프워스, <첼튼엄의 도셋 하우스>, 1825년경, 섭정 시대 건물의 정면

미국의 건국 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1826)같은 사람이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도판 314)를 이러한 확실한 신고전주의(ner 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ck.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장식가들의 화사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게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것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성에 사용된 양식이었던 반면 혁명기의 사람들은자신들이 새로이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 시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은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특히 이성의 힘이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 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여기서도 문제의 근원은 멀리 18세기 중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우리는 호가스가 미술의 전통에 대해 얼마나 불만을 품었으며 의도적으로 새로운 대중을 위한새로운 그림을 창조하기 위해 나섰던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한편 우리는 레이놀즈가 전통이 위험에 처해 있기라도 하듯이 그 보존에 얼마나 급급해 했던가 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위험은 앞서 말한 사실, 즉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장인으로부터 도제로 그 지식이 전승되는 보통의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대신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철학과 같은 하나의 과목이 되어 버렸다.

'아카데미(academy)' 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를 암시하고있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나온 말로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따라서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이 안료를 갖고 윗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직업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던 구식의 방법들은 쇠퇴하고 말왔다. 레이놀즈 같은 아카데미의 교사들이 젊은 학생들에게 과거의 걸작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그들의 기교를 익히라고 재촉해야 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이것은 왕 스스로가 왕국 내의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이 번창하기위해서는 왕립 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그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여기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늘날 화가와 조각가들이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구매자를 찾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또한 그것을 위해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관념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 깨닫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대신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전시회에는 화려하고 가식적인 것이 단순하고 진지한 것을 압도해버릴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화가들에게 있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림의 주제를 멜로드라마 적인 것으로 선택하고 작품의 규모를크게 하거나 요란한 색채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이었다. 따라서 몇몇미술가들이 아카데미의 관학적 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소외 당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그동안 미술이발전해 온 공동의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가 즉각 불러일으킨 뚜렷한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림의 주제가 아주 당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보면 우리는 똑같은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과거의 그림들 중 대다수는 성경에서 따온 종교적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격의 그림들까지도 대개는 신들의 사랑과 다툼에 관한이야기들이 있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이러한 좁은 한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 이야기 따위의한 장면이나 중세나 당대의 역사적 일화를 그리는 일이 그토록 드물었던 것은 신기할 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대에 매우 급속히 변해버렸다. 갑자기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성공적인 화가나 외로운 반역자들은 다 같이 전통적인 주제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실 이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분명히 이들은 구세계에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도판 315 존 싱글톤 코플리, <1641년에 탄핵된 다섯 명의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 1>, 1785, 캔버스에 유채, 233.4x312cm, 매사추세츠, 보스턴 시립 도서관

도판 315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어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친구인 셰익스피어 연구가 말론(Malone)이 이 주제를 화가에게제외하고 필요한 모든 시대적 고증 자료를 제공했다. 코플리는 찰스 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탄핵된 의원 다섯 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끌어낸 이같은 일화는 그때까지 대규모 그림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코플리가 이러한 과제를 위해 선택한 방법도 역시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의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17세기 의사당의 실제 모양과 당시 사람들이 입고 있던 의상에 관해 고증학자들과 사학자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는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하원 의원을 지냈던 사람들의 초상화를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귀족이나 유력한사람들의 저택을 찾아다녔다. 요컨대 그는 오늘날의 양심적인 제작자가 영화나 연극의 시대적인 장면을 재구성하기 위해 했음직한 바로 그러한 일을 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가 어떠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상 코플리 이후 백 년 이상이나 많은 화가들이 역사의 중요한 한 순간을 그리는 것에 이와 같이 엄밀하게 시대고증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건축에서의 '고딕 복고'와 비견할 수 있는 그의 역사화속에는 낭만적인 기미가 엿보인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였다.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 있으며 로베스피에르가 자칭 대사제로서 주관한 '최고자의 축제' 같은 선전 행사의 무대와 의상을 꾸몄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웅시대에 살고있으며, 그들 당대의 사건들이 그리스와 로마 역사의 여러 일화들과 마찬가지로화가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 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도판 316)마라는 목욕탕에서 집무하는 버릇이 있었고 욕조에는 간단한 책상이 붙어 있었다.

도판 316 자크-루이 다비드, <암살당한 마라>, 1793, 캔버스에 유채, 165x128.3cm, 브뤼셀, 벨기에 왕립 박물관

자객은 그에게 청원서를 건네주었고 그가 서명하려는 순간 그를 찔렀다. 이러한상황은 품위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는 다소 어렵지만 다비드는 경찰의 보고서와 같이 실제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영웅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점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이 그림은 공공 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순교자의 운명을 맞은 겸허한 '인민의 친구' - 마라가 자처했듯이 를 인상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주제를 내팽개친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들 중에는 위대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가 있다.

317 프란시스 고야, <발코니의 사람들>, 1810-15년경, 캔버스에 유채,194.8X125.t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판 317 의 <발코니의 사람들>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서일생을 궁정 화가로 보낸 18세기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고야의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인물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사실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도판 318) 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도판 318 프란시스 고야,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 1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7x140cm, 마드리드 프라도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한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고아는 단지 유화 작품을 통해서만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애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들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애쿼틴트(aquatint)라는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고아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인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우매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도판&nbsp;320 프란시스 고야, <거인>, 1818년경, 에쿼틴트, 28.5x21cm

도판 320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전경의 조그만 풍경으로부터 그 거인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집과 성들은 조그만 점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마치 실물인듯 뚜렷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이 무시무시한 유령을 상상할 수 있다. 괴물은 달빛이 비친 풍경 속에 불길한 몽마(夢魔)처럼도사리고 있다. 고야는 전쟁과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나라의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詩)와 같은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기때문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1827)였다. 블레이크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 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고 이러한 관학 미술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아니면 순진한 기인(奇人)으로만 단정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미술을 인정해 주었고그를 굶어죽지 않게 해주었다. 그는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를 위해, 또는 자신의시에 삽화를 그려 인쇄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도판321 윌리엄 블레이크, <태고적부터 계신 이>, 1794, 양각 에칭에 수채, 23.3x16.8cm, 런던 대영박물관

도판 321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블레이크는 램버스에 살 때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그의 머리에 떠오른 환상 속에서 컴퍼스로 지구를 재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는 한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느님의 이런장엄한 환상이다. 이 천지 창조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블레이크는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느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 갔다. 사실상 블레이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환상 속의 형상은 엄격하게 말해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niven, 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불렀다.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의 창조자도 사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환상은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갯불처럼 보인다.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그의 소묘상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렇게한다면 그의 예술의 진가를 놓치게 될 것이다.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 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 당시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백년 이상이 지나서야 비로소그는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었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공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 도움을 주면서도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 풍경화가가 서로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 중 하나는 J. M. W. 터너(J. M. W. Turmer : 1775-185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1837)이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엇이 있다. 하지만 그들 세대를 갈라놓고있는 오십 년 동안 두 라이벌 간의 접근 방식은 더욱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레이놀즈 처럼 터너는 그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종종 화제를 자아냈던 성공한화가였다.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도판 322)을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명백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도판 322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 캔버스에 유채, 155.6x231.8cm, 런던 국립미술관

터너는 이러한 비교를 자청함으로써 자기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는 단순함과 고요함, 그의 환상 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그는 자기의 그림을 보다 눈에 띄고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림 속에 모든 효과를 잔뜩 동원했다. 만약 그가 재능이 없는 화가였다면 대중에게 인상을 주려는 이러한 야심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뛰어난 무대 감독이었으므로 놀라운 품위와 기교로써 그 일을 해냈다.

도판324 존 콘스터블, <나무 줄기의 습작>, 1821년경, 종이에 유채, 24.8x29.2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그의 습작(도판 324)들은 흔히 완성된 그의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하다. 그러나 아직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도판 325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 캔버스에 유채, 130.2x138.5cm, 런던 국립미술관

도판 325는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단순한 전원 풍경으로 건초 마차가 개울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림 속에 몰입시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초원 위에 점점이 비치고 있는 햇살들을 살펴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아야 한다. 또한 물줄기를 따라가며 매우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진 물방앗간 옆을 거닐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그의 철저한 성실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며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1774-1840)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황량한 산의 모습

도판 3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실레지안 산악 풍경>, 1815-20년경, 캔버스에 유채, 54.9x70..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도판 326은 그 발상에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프랑스아 조제프 하임, '관전'의 새로운 역할 : <1824년 파리의 '살롱 전'에서 훈장을 나워주는 샤를 10>, 1825-7, 캔버스에 유채, 173x256cm, 파리 루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