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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19 발전하는 시각 셰계17세게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by 2mokpo 2023. 4. 25.

19 발전하는 시각 셰계

17세게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미술의 역사는 흔히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 즉 여러 양식들이 계승되고 발전되어지는 이야기로 설명될 때가 많다.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x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원주, 벽기둥, 코니스, 엔타블레이처, 쇠시리 장식 등과 같은 동일한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본래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이 브루넬레스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건축에 관한 많은 책들은 이 기간 전체를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크' 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없다 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이러한 비평가들에게는 고대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 통탄할 만한 취향의 타락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별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들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고전 건축의 규칙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오해한 건물들을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었고 또 옛 논쟁들도 우리들이 현재 관심 갖고 있는 건축적인 문제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도판250 자코모 델라 포르타, <로마의 일 제수 교회>, 1575-7년경, 초기 바로크 교회

우리에게는 도판 250과 같은 교회의 정면이 대단히 흥미 있는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모방했건 아니건 간에 이런 종류의 건물을 모방한 것들을 수없이 보아왔으므로 전혀 신기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건물이 로마에 처음 세워졌던 1575년 당시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교회당의 건립은 당시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로마에 단지 숫자 하나를 더 보태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로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다. 교회의 형태 자체가 새롭고 흔히 볼 수 없는 설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르네상스 방식인 원형의 대칭적 설계는 신에게 봉사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외면당하여 새롭고 단순하고 독창적인 설계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높고 위풍당당한 원개를 지닌 십자형이어야 했다. 신랑(身廊)인 커다란 장방형의 공간에서는 신도들이 지장없이 한데 모일 수 있었고 주제단(祭壇)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주제단은 이 장방형공간의 제일 끝에 있으며 그 뒤에는 초기 바실리카의 후진과 비슷한 형태의 후진이 있다. 개인적인 기도와 개별적인 성인들에 대한 기도를 위해서 신랑의 양편에는 작은 예배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각 예배실은 독자적인 제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십자형의 팔에 해당되는 양끝 부분에는 두 개의 큰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간결하고 독창적인 교회 설계 방식으로 그 이래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주제단을 강조하는 장방형의 형태로 이루어진 중세 교회당의 주된 특징과 장엄한 궁륭을 통해서 빛이 흘러 들어오는 크고 널찍한 내부를 매우 강조하는 르네상스 식 설계 방식을 결합한 것이다.

유명한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2-1602)가 설계한 <일제수(Il Gesu) 교회의 정면 현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왜 그 정면이 내부 못지 않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인상을 주었을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즉각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의 배치 방법까지도 고전 건축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즉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되풀이 언급하자면)마치 음악가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주요 화음처럼 건축가의 마음속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형식을 상기시켜준다. 이 단순하고 장엄한 정면에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전적인 건축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보면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해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눈에 띄는 두 번째 특징은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점이다. 이와 비슷한 요소들로 구성된 그 이전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이내 전체적인 특성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한 점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 있게 연결시키려고 무척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우리는 그리스의 신전이나 로마의 원형 극장 어딘가에 이런 종류의 형태가 있다고 상상만 해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거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변칙적인 장식물들을 종이로 살짝 가려놓고 그것들이 없는 상태를 그려본다면 이것들이 단순한 장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장식이 없다면 건물은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형태는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바로크 건축가들은 대규모의 전체 형태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통일성을 주기 위해서보다 더 대담하고 기발한 창안을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창안들은 따로 떼어놓고보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훌륭한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가의 의도를 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것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주된 쟁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와서 아주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사람의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였다. 이들은 둘 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카라치 자신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만큼 졸렬한 화가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훌륭한 화가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도판 2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판251 안나발레 카라치,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1599-1600,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156 X 149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의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이러한 작품은 감상적(感傷的)이라고 치부해버리기는 쉬우나 우리는 이 그림이 그려진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그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조용히 바라보며 묵상하도록 만들어진 제단화인 것이다.

 

도판252 카라바조, <의심하는 토마>, 160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07 X 146cm, 포츠담 장수시 궁 자선 시설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 252)을 살펴보자. 세사람의 사도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있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찔러보고 있는데,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림이 당시의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이 작품이 불경스럽고 심지어 극악무도하다고 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름답게 주름이 잡힌 옷을 걸치고 위엄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사도들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사도들이 풍상을 겪은 얼굴과 이마에 깊은 주름이패인 보통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실제 늙은 노동자들이었으며 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또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성 토마의 꼴사나운 동작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적혀있다고. 예수가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20강27절)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카라바조는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와 뒤러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 앞에 그려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인물 들을 보다 진실 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많은 이탈리아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Guido Reni : 1575-1642) 일 것이다. 볼로냐 출신의 이 화가는 한동안 어느 과에 들어갈지 머뭇거리다가 카라치 파에 입문하기로 결심을 했다. 스승인 카라치와 마찬가지로 당시 그의 명성은 현재의 평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났었다 한때는 그의 명성이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높았는데 도판 253 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레니는 이 프레스코를 1614년에로마에 있는 한 궁전의 천장에 그렸다. 이 그림은 오로라(새벽의 여신)와 전차를타고 달리는 젊은 태양의 신 아폴론을 그린 것으로 아폴론의 주위에는 아름다운처녀들(시간의 여신들이 즐겁게 춤을 추며 따라가고 있다. 횃불을 들고 앞서가는아이는 샛별이다. 찬란한 아침을 그린 이 작품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도판253 귀도 레니, <오로라(새벽의 여신)>, 1614, ,레스코, 260 X 700cm, 로마 팔라비치니 로스필리오시 궁 천상화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시비(是非)는 이내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옹호한 화가들 중에 위대한 거장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거장들은 우리들에게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엿보게해준다. 그러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세상은 보다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이었다.

도판254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638-9, 캔버스에 유채, 85 X 121cm, 파리 루브르

도판 254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하나이다. 이 그림은 조용하고 햇빛으로 가득찬 남국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잘생긴 청년들과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젊은 부인이 돌로 만든 큰 무덤 주위에 모여있다. 나뭇잎으로 관(冠)을 엮어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이들은 양치기들인 것 같다. 그들 중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덤에 새겨 진 명문을 해독하려고 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명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름다운 양치기 여자를 돌아보고 있다. 그 여자는 맞은편에 있는 남자 목동과 같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다. 명문에는 라틴 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 헤드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무덤을 둘러싸고 묘비명을 읽고 있는 이 인물들의 두려움과 명상의 경이적인 몸짓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서로 반향하여 이루어내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은 더욱 감탄할만하다. 전체 구도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은 심오한 미술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지식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이탈리아로 귀환한 또 한 사람의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으로 푸생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로랭은 캄파냐(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남부의 색조 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있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그는 푸생처럼 자연의 사실적인 표현에 있어서 완벽한 기량을 그의 스케치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나무의 습작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완성시킨 그림과 동판화에서는 과거의 향수어린 꿈과 같은 정경 속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재들만을 선택했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도 255)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 년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제의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만약 어떤 풍경이 클로드가 그려 보여준 시각 세계를 그들에게 연상케 하면 그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찬미하고 거기에 앉아서 야유회를 즐기곤 했다. 부유한 영국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클로드의 꿈을 모델로 해서 그들의 소유지 내의 정원에 자기들만의 소자연小)을 꾸며놓으려고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카라치의 방침을 그대로 실천한 이 프랑스화가의 영향은 이런 식으로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고 거기에는 이 화가의 사인이 들어갈 만하였다.

도판255 클로드 로랭,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1662-3, 캔버스에 유채, 174 X 220cm, 케임브리지 앵글시 서원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로 푸생과 클로드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1600년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스물세 살의 나이로 로마로 왔다. 그는 로마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 동안 머물렀던) 제노바와 만토바에서도 미술에 관한 많은 열띤 논쟁을 귀담아 들었으며 또 많은 고금의 명작들을 연구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듣고 배우긴 했으나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가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기질적으로 여전히 플랑드르 인이었고, 반 에이크와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및 브뢰헬을 배출한 나라의 화가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옷감과 살아 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모든 것을 가능한 한 최고로 충실하게 그리기 위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기법

과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또 품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벤스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

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탄했지만  그의 본질적인 신념,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대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보면 카라바조의 예술이나 카라치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루벤스는 카라치와 그의 유파가 고전적인 전설과 신화를 그림의 주제로 그리는 것을 부활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이 평가했다. (--)

도판256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제단을 장식할 그림의 습작으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얼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도판256 페터 파울 루벤스, <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대형 제단화를 위한 스케치, 1627-8년경, 대형 제단화를 위한 습작, 목판에 유채, 80.2 X 55.5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성인들은 축제의 인파와도 같이 성모의 높은 왕좌로모여들고 있다. 전경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와 순교할 때의 불에 달군 석쇠를 들고 있는 성 로센스, 그리고 토렌티노의 성 니콜라우스 수사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들의 예배의 대상인 성모에게로 이끌고 있다. 용을 누루고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화살과 화살통을 곁에 두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열렬한 감정으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사 한 사람이 순교의 상징인 종려 나무 잎을손에 들고 왕좌 앞에 막 무릎을 꿇으려 하고 있다. 수녀 한 사람이 포함된 한 무리의 여인들이 황홀하게 주 장면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아기 예수가 성모의 무릎 위에서 몸을 굽혀 한 어린 소녀에게 반지를 주려고 하는 장면이다. 작은 천사하나가 반지를 받으려는 소녀를 도와주고 있다. 이 그림은 성 카타리나의 약혼의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성 카타리나는 환상 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보고 그녀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좌의 뒤에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이를바라보고 있는 성 요셉이 있고 열쇠를 들고 있는 성 베드로와 칼을 들고 있는 성바오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서 있다. 그들은 맞은편에 홀로 서서 빛을 가득 받으며 무아의 지경으로 경배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당당한 성 요한의 도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귀여운 두 천사가 멈칫거리는 작은 양을 왕좌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하늘에는 또 한 쌍의 천사들이 성모의 머리에 씌워줄 월계관을 들고 내려오고 있다.

도판257 페터 파울 루벤스, ,아이의 얼굴>, 루벤스의 딸, 클라라 세레나로 추정, 1616년경, 목판에 붙인 캔버스에 유채, 33 X 26.3cm,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왕실 소장품

 

도관 257은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 이전 시대의 초상화들은 예술 작품으로서는 제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어쩐지 실물과 거리가 멀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루벤스가 어떻게 해서 이 생기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냈는지 분석해보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고 또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듯싶다. 그 이전의 티치아노보다도 루벤스는 한층 더 붓질을 그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의 그림들은 이제 더 이상 세심하게 입체감을 표현한 채색 소묘는 아니다.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적인 수단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그 점이 생명감과 활력의 느낌을 더욱 강조해주는 것이다. 루벤스에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거두게 만든것은 거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손쉽게 구상하는 천부적 솜씨와 그 속에 활기가층만하게 떠돌 수 있게끔 하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재간과의 조화에 있었다. 그의

예술은 궁정의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러한 왕족들의 권력을 미화하는 데 대단히 적합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이러한 영역을 그가 혼자서 독점하고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도판 258)은그가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매서운 눈매에는 자만심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였다. 이러한 동안에도 그의 안트웨르펜에 있는 작업실에서는 휘황찬란한 대작들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인 우화와 우의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딸의 초상처럼 실감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도판258 페터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 캔버스에 유채, 109.5 X 85cm, 빈 미술사 박물관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도판259 페터 파울 루벤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30, 캔버스에 유채, 203.5 X 298cm, 런던 국립미술관

도판 259가 그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막 퇴각하려고 하는 군신 마르스를 쫓아내고 있는데, 군신의 무시무시한 동료인 전쟁의 신 퓨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미네르바의 보호 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루벤스만이 해낼 수 있는 그특유의 것이다. 평화의 여신은 아이에게 젖을 주려하고 있고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목신(牧神)은 먹음직한 과실들을 더없이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술의 신 바코스를 섬기는 여사제 들은 금과 보석을 가지고 춤을 추고 있으며 큰 고양이처럼 평화스럽게 장난을 치고 있는 표범이 있다. 그 반대쪽에는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도망온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세 어린이들에게 한 젊은 수호신이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루벤스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성질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 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뚱뚱한 여인들을 보고 못마땅해 하겠지만 당시의 플랑드르에서는 날씬한 몸매가 유행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비평은 루벤스의 유명한 많은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1641)다. 그는 루벤스보다 스물두 살이 아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세대에 속했다. 그는 비단옷이건 인간의 육체이건 간에 사물의 질감과 표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루벤스의 모든 기법을 곧 터득했으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반 다이크는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 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그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1632년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도 영국식으로 안토니 반다이크 경(SirAnthony Vandyke)으로 표기했다.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나 긍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냥을 하던 중에 방금 말에서 내린찰스 1세의 초상화(도판 261)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고자 원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261 안토니 반 다이크, <영국 국왕 찰스 1>, 1635년경, 캔버스에 유채, 266 X 207cm, 파리 루브르

여기서의 찰스 1세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확고한 권위와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며, 예술의 후원자이자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자로서 타고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의 다른 외형적인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자질들을 초상화 속에서 그처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가를 당시의 귀족 사회가 갈망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아니다. 사실 반 다이크는 너무나 많은 초상화 주문을받았기 때문에 그의 스승 루벤스처럼 혼자서 그 주문을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조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형에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의 옷을 입혀서 그것을 그렸다. 나머지 얼굴 부분조차도 반 다이크가손대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불쾌하게도 이러한 초상화들 중 일부는 후대의 의상 마네킹들과 비슷하게 미화되어 있다. 반 다이크가 초상화에 많은 해독을 끼친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이 그의 걸작 초상화들의 위대성을 감소 시키지는 않는다. 루벤스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건장하고 힘찬 인물들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명문 출신다운 귀족적인품위와 신사적인 유유자적한 태도(도판 262)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이 바로 반 다이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판262 안토니 반 다이크, <존 경과 버너드 스튜어트 경>, 1638년경, 캔버스에 유채, 237.5 X 146.1cm, 런던 국립미술관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루벤스의 제자 반 다이크와 같은 해에 출생했고 반 다이크가 찰스 1세의 궁전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슷한 지위를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에서 누리고 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 1599-1660)였다.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그의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도판 263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들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그런 유형의 '풍속화' 이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 (도판 252)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 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표현된 물건들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또는 이 장면이 중요한지 아닌지 물어볼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색채도 엄격하게 말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갈색과 회색, 녹색 계통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전체는 너무도 풍요롭고 원숙한 조화 속에 어울려 있어 이 그림 앞에 한번 서 본 사람은 결코 이 그림을 잊을 수 없게 된다.

도판263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비아의 물장수>, 1619-2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 X 81cm, 런던 웹스리 하우스 웰링턴 박물관

264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 1649-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40 X 120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로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백 년여 뒤인 1649~50년에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의 역사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견해의 변화를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p. 322, 도관 206)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해서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붓을 가지고 물질의 광택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교황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 있어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며 잘 베껴낸 공식 같은 그림은 아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로마에 가면 누구나 팔라초 도리아 팜필리에 있는 이 걸작을 보는 위대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그런 예로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이라고 알려진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대작(도판 266)이다. 우리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을 화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그리고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뒷벽에 있는 거울에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앉아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도판 265). 그러므로 중앙의 한 무리의 사람들은 화실을 방문온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의 인물은 두 시녀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왕의 어린 딸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시녀 중의 한사람은 공주에게 다과를 주고 있고 다른 시녀는 국왕 부처에게 절을 하고있다. 우리는 이 시녀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심심풀이로 궁 안에 데리고 있는 두 사람의 난장이(못생긴 여자와 개를놀리고 있는 소년)의 이름도 알고 있다. 배경에 있는 심각한 얼굴을 한 어른들은방문객들이 얌전하게 구는 지 살피는 것같이 보인다.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는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아마도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공주를 불러들였는데 왕이나 왕비가 벨라스케스에게 그가 그릴만한 모델이 왔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지배자가 한 말은 언제나 명령으로 간주되므로, 이 지나가는 말은 벨라스케스에 의해 현실화되어 이같은 걸작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도판266 디에고 벨라스케스, <라스 메니니스(시녀들)>, 1656, 캔버스에 유채, 318 X 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물론 벨라스케스는 그의 현실에 대한 기록을 위대한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살이었던 스페인의 왕자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도판 267) 과 같은 작품에는 인습에서 탈피한 곳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화에서는 여러 가지 농도의 붉은 색조(호사스러운 페르시아 카펫에서부터 벨벳 덮개를 씌운 의자, 커튼과 어린이의 소매와 불그스름한 볼에 이르기까지가 배경 속으로 몰입되는 흰색과 회색의 차가운 은빛 색조와 결합되어 독특한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도판267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 165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5 X 99.5cm,빈 미술사 박물관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진영에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정치적 장벽의 또 다른 쪽인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