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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 사조 명화/매너리즘

매너리즘(Mannerism)

by 2mokpo 2023. 3. 13.

후기 르네상스 문화는 문학의 타소, 세르반테스, 코르네유, 라신등과 철학의 카산디, 샤롱, 산체스, 캄파넬라, 데카르트, 그리고 자연과학의 갈릴레이와 파스칼, 미술의 루벤스와 베르니니 등을 낳았다. 인문·사회, 자연과학, 예술 등 각 분야에 걸쳐 발전의 기초를 다져 준 사람들이 이들만은 아니었지만, 16.17세기 서구 문화의 계몽적인 정신과 그 시대상을 이들이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채로운 지식과 진보성은 1400년대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은 인간 중심주의의 확신, 이성적 수단에의 의존 등으로써 합리적, 과학적 연구 태도를 낳았고 폭넓은 지식, 즉 철학, 과학, 고전학, 예술 등 각 분야의 다채로운 연구를 활발하게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인본주의라 칭하고 있는 이유도 인간의 이성을 응용한 외부 세계의 연구에서빛나는 성과를 거둔 데에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기에 볼 수 있는 르네상스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종교관의 문제였고, 이에 뒤따르는 표현 양식의 문제였다. 네덜란드의 인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와 독일의 신학자 루터의 종교관의 대립에서 인본주의의 종교와 종교개혁을 보게 된다.

전자는 개인 이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신앙의종교적 가치를 두었으며 후자는 개인 양심의 권리를 중요시했다.

그러나 교회는 반종교개혁 改革)이라는 입장에서 개인이이성의 판단에 따라 모든 사상 문제,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권리를 박탈하려 했다. 교리(敎理)에 대한 토론은 허용되지 않았고 교회의 결의는 맹목적으로 준수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개인 사상의 과피를 뜻하는 것이며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나 루터의 순수한 종교관과는 다른, 중세적이며 봉건적인 상태의 교회와 신학적 가치를 되찾으려는 것이 로마 교회의 입장이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종교관에 공통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본주의가 갖고 있는 개인의 합리주의가 종교개혁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인의 합리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표현 양식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예술에 끼친 반종교개혁의 영향은 교회의 통제하에 있는 미술가들로 하여금 외부 세계의 탐구를 불가능하게 했고 또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시계 (可視界)의 재건이라는 문제보다도 새로운 소묘법, 구도법 등을 개발했으며 신천지의 개척보다도 선배가 발견했던 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목적에 부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현실 공간과 정상적인 인체 비례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버리고 중세기의 미술가들처럼 임의의 구도, 즉 의도적으로 인체를 장신화(長身化)하여 이것을 자유스럽게 사용했다. 이밖에도 1400년대 성기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정신적인 것보다도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색조를 추구했다. 또한 주제 선택과 그것을 다루는 문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성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적 주제라 해도 인간으로서의 의의를 강조하는 세속적인 소재로 다루어졌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학적 또는 초자연적인 면을 역설하는 주제가 애호받게 되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이와 같은 전환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에 대해 반종교개혁을 옹호한 트리엔트 회의의 결의 (1563)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그릇된 교리를 암시하거나 문맹자(文盲者)에게 위험한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성상(聖像)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법령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반종교 개혁자들은 종고 예술에서 과학상의 부정확한 점을 없애려 한 것뿐만이 아니고 세속적이며 이교도적인 색채를 배제하려 한 것이다. 청교도적인 반종교개혁 정신은 종교화의 품위를 내세우며 나체 표현에서도 문제를 제시했다. 금욕적이며 교의(敎義)의 순수성을 보여 주는 인체상 만이 허용된다는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심판>이 교회의 예배당에 보여졌을 때 그림 안에 있는 많은 나체상이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품위 없이 저속하다는 이유에서였다.르네상스 본래의 고전적 성격에서 벗어나고 또 이와 대조를 이루게 되는 반종교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표현 양식이 소위 매너리즘이

. 이러한 현상의 대두는 르네상스를 지배했던 합리적 이상을 버리고 중세 가톨릭주의의 비인본주의적 신학 가치가 되돌아옴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 미술사학자들은 매너리즘을 병적양식(樣式)또는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양식 사이의 과도기를 이루는 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리오넬로 벤투리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이며 선명한 해석을 내리고있다. 매너리즘은 높이 평가되어 있는 16세기의 대가들 작품에서가장 볼받을 만한 요소를 선택하여 같은 수법으로 삼고 있다.이에 따라 선택한다는 것과 이것을 합리화하고 배합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여기서 일종의 절충주의적인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스위스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프린은 그의 저서 고전 미술에서매너리즘을 형식주의적 예술또는보편적 예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르네상스 후기에 나타난 매너리즘의 이러한 표현 양식은 파올로 베로네제나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매너리즘이라는 표현 양식의 발생 근거를 당대의 종교관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그 표현 수단은 그것을 구체화하는 수단으로 표본이 되는 대가들의 표현 요소를 선택하여 이를 모방하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있다. 이렇듯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보여준 15세기의 이상적 합리주의 표현과 16세기 후반의 형식주의적 표현을 전제로 17, 18, 19세기의 서구 미술을 들여다볼 수 있다.